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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무작정 관리부실로 달려갔다. 관리부 일을 맡아서 하니까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관리부실 문을 열자 앉아서 일에 집중하는 카린 양이 보였다. 문 여는 소리에도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나 씨와 눈이 마주쳤다.
"시윤 씨?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카린 양의 눈치를 본다. 하나 씨는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내 눈치까지 덤으로 같이 본다. 괜히 하나 씨에게 피해가 될 것 같아서 따로 부르려는 순간-
"시윤 씨. 지금은 업무 시간입니다. 사적인 얘기를 하러 오신 거라면 지금은 거절하겠습니다."
"... ..."
"펜릴 소대는 곧 출격 하셔야 하니 함선에 탑승 하실 수 있도록 대기해주세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말투로, 그저 공적으로 대하는 말인데도, 마음에 비수로 박혔다. 온 몸을 때리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온다.
"... ... 미안해요. 하나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문을 닫고 돌아서 나왔다. 머릿속도 마음도 혼란했다. 왜, 왜..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내게 화가 난 걸까. 스승님의 말이 상처였을까. 아니면... 그냥 그 망할 라이브 스트리밍에 찍힌게 문제였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멋대로 한 행동들 투성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결국 나만 괜찮고, 나를 위한 욕심이었을까.
그저 일 적으로 잘해준 거에 대한 답례나 호의였을까.
'... ...반은 사심입니다.'
'죄송해요.'
그럼 그 때. 왜. 나를... 나에게 그런 걸까.
도무지 모르겠어. 속마음을.
용혈이고, 언령이고, 독심술이라도 쓸 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그림자가 괴롭혀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아파서, 머리도 따라 아파온다.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걸어간다. 이 와중에도 일하러 가야 한다는 게 참... 기구하다.
... ...
모래사장에 어두운 밤이 드리우고,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했던 모래는 발을 꽁꽁 얼리려는 듯 냉기가 가득하고, 다정하게 나를 이 곳으로 이끈 파도는 거칠게 모래 사장을 덮쳐온다. 달빛 하나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이 모래사장을 삼킨다.
-
그 이후로 카린 양은 나에게 먼저 연락은 커녕 회사에서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후방 지원을 나가도 펜릴 소대보다는 다른 소대에 지원을 나갔다. 하나 씨가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길, 퇴근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하나 씨의 일을 더 받아서 하고, 출근도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항상 먼저 와 있다고-
나와는... 어쩌다 마주치면 간단한 인사만 하고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이제는 늘 하던 머리띠도 하지 않는다.
... ...
하나 씨가 신경 쓰이면 모두가 퇴근한 뒤에 관리부실로 가보라고 했지만... ... 거절했다.
아무렇지 않게 장난도 치고, 떠들던 지난 날은 이미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일주 일하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세어 보는 것조차 그만뒀다. 비참해지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모두가 나의 눈치를 본다. 그것도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그녀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가 회사에서 일을 하듯. 나도 회사에서는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아파오니까.
... ...
"야."
... ...
"주시윤!"
"...네, 듣고 있습니다."
"듣긴 뭘 들어? 들었으면 다 죽은 침식체는 왜 그렇게 쑤셔 대는데?"
"하하. 딴 생각을 좀 했네요."
"적당히 앞서나가. 생각 없이 달려들면 다친다니까-"
"네-네-"
"대답만 하지 말고."
"아파요~ 스승님~"
결국 팔이 붙잡혀 함선으로 반 쯤 질질 끌려왔다.
스승님은 나에 대한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그 때 그 일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냥 갑자기 화낸 것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을 뿐이니까.
... ...정신차리고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
시간이 약이라는 거. 그런 거 다 거짓말이다. 지금도 옛날에도 그런 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걸어온 길 뒤에는 수 많은 물음표들이 가득했다.
왜 나만 두고 그렇게 가셨나요?
왜 나를 거두어 주셨나요?
왜 나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건가요?
이제 새로운 물음표가 새겨진다.
왜 그때 나를 안아주었나요?
-
여태 계속 다들 퇴근 할 때 따라서 하다가, 오늘은 일부러 같이 퇴근 하지 않았다. 사옥 옥상에서 도심을 내려다 보았다. 지금 이 건물엔 나, 사장님, 부사장님, 그리고 카린 양 뿐이겠지.
생각에 잠길 거면 집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그냥 남아있었다. 그저 누군 가와 마주치길 바라면서도 또 아니기를 바랬다.
모순적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쓴 웃음을 지으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따라 아름다운 야경으로 바뀌는 도심을 멍하니 본다. 완전히 하늘이 흑색으로 바뀌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슬슬 갈까 생각했다.
오묘한 기계음이 들린다.
"오! 시윤군! 여기서 뭘 하는겐가!"
"이제 퇴근하려고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장님."
"누굴 기다린 건 아닌가 보군. 내 말이 맞나?"
"... ... 글쎄요. 그냥 야경이 보고 싶어서 있었을 뿐입니다."
우웅- 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나에게 다가온다. 늘상 그렇듯, 멍청해 보이는 기계 표정 때문인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시윤 군이 생각보다, 우유부단한 면이 있구만."
"그런가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이네."
"말씀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정시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요."
"시윤 군에게는 지금 쓰는 시간에 대한 야근 수당을 주도록 하지. 이러면 이야기를 나눠볼 의향이 생기는가?"
"... ... 사장님도 그 말 지키셔야 할 겁니다."
"하하. 물론일세!"
나는 옥상 벤치에 앉고, 사장님은 그 옆에 섰다. 기계인데 선 게 맞나. 아무튼-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깬 건 사장님이었다.
"그때 하트베리의 스트리밍에 찍힌 건은 나도 보았다네."
"징계는 언제 내려오나요."
"우리 사칙에 사내 연애는 금지라는 항목은 없어서 말이야. 카운터는 카운터끼리 통하는 게 있고, 남녀가 모여있으면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 ...사장님."
"말하게."
"왜. 저에게 카린 양을 맡기셨습니까."
"음- 아무래도 아주 오래 전 어떤 사건 때문에 본 적이 있다는 보고를 참고했지. 아무래도 아예 낯선 사람보다는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좋지 않은가?"
"그 자리에는 스승님도 계셨습니다. 스승님이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펜릴 소대장? 그 친구는 너무 난폭해서 말이야. 완전 부적합이라네."
"하하하..."
"미나 양을 대하는 시윤 군의 모습을 보면서 시윤 군이 딱 맞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자네에게 맡겼지."
"... ..."
하늘이 더 어두워지고. 그라운드 원의 빛 기둥이 선명하게 보인다. 간간히 함선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시윤 군을 카린 양에게 붙여 준 것이 원망스러운가?"
"...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하나 내가 물어보도록 하지."
"...?"
"자넨, 카린 양을 좋아하는가?"
"... ... ...하하- 모르겠네요."
"자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 방법은 없네. 나는 독심술 같은 건 쓸 줄 모르는 한낱 기계일 뿐이니까."
"전지전능하신 사장님이라 독심술 정도는 패시브인줄 알았습니다."
"하하하하! 재밌군! 하지만 시윤 군. 난 정말로 그런 능력은 없다네. 기계가 아니더라도 특정 카운터가 아닌 이상 그런 속 편한 능력은 없어."
"... ..."
"사람의 생각을 알기 위해선, 결국 부딪히고 싸우고 대화해야만 알 수 있지. 괜히 사람이 말을 하고 쓰고 언어라는 걸 만든 게 아니니깐. 하다못해 언어란 게 없는 지역에서도 몸짓, 발 짓을 하고 표정을 읽지 않는가."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전부 알고 있는 것을 상기 시켜줄 뿐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여태 까지 그래왔듯이. 수 많은 물음표 뒤에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고 두려웠으니까.
"시윤 군. 내가 방법을 계속 찾고 있네만. 카린 양이 가진 시간은 많지 않네."
"... ... 얼마나 남았죠."
"더 이상 정제 투여를 해도 몸의 구성원소의 분해를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그 때가 언제 올지는 나도 모른다네. 수 년 뒤일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지."
"... ..."
"그 시간 동안 저렇게 몸을 혹사 시키는 것을 지켜볼텐가?"
"그건 좀 마음이 아프겠네요."
"시윤 군.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무너져 내려갈 때는... 두려워도 결정해야 자네에게도 이로울 걸세."
"하하..."
"나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나."
"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죠."
"안타깝게도 카린 양은 당장 내일이라도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일세. 다르게 보면 카린 양은 당장 내일이라도 자신이 사라지는 게 아닌 자신이 살 던 세상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 이렇게 열심히 살고, 해오는 것들이 무색하게 말일세."
"... ..."
"카린 양이 자네를 맘에 안 들어하는 것 같아서 걱정하는가?"
"하핫... 너무 놀려서 싫어할 것 같네요."
"하하하하-.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서 모를일이지. 그리고 생각해보게. 애초에 시윤 군을 싫어했으면 자네들이 그렇게 우연히 행복한 얼굴로 찍혔을리가 없지 않은가?"
"... ..."
"찍힌 장면을 제대로 본 적 있나?"
"아니요. 서윤 양이 보여준 걸 잠깐 본 게 전부입니다."
사장님의 표정이 출력 되던 화면에 하트베리의 스트리밍 장면이 나온다. 아주 잠시 동안 웃으면서 걸어가는 나와 카린 양이 화면 구석에 지나간다.
"... ... 그건 예의 상 웃은 걸 수도 있죠."
"그건 카린 양에게 물어보았는가?"
"...아니요."
"그럼 저 스트리밍 캡쳐 사진이 뜬 이후... 아니 자네가 펜릴 소대장이랑 다툰 뒤로 카린 양이 갑자기 피하는 이유도 제대로 물어봤는가?"
"그건... ..."
"시윤 군.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네. 나도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할테니, 시윤 군도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군."
"... 감사합니다."
"요호호! 우리 코핀컴퍼니의 사장은! 우리 직원 남녀의 사랑을 응원한다네!"
"하하하..."
나의 멋쩍은 웃음을 뒤로 하고, 사장님이 먼저 옥상 출구로 사라졌다.
... ...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나는 왜...
'더 이상 정제 투여를 해도 몸의 구성 원소의 분해를 막을 수 없을 때까지.'
'수 년 뒤일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이... 금요일인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다.
... ..그래, 구질구질 한 건 질색이다. 멍청한 짓 따위 하고 싶지 않다. 부모님의 죽음을 파해칠때 처럼 하면 되잖아.
수 많은 물음표 중을 확실하게 답을 찾은 적은 많지 않다. 얽히고 섥혀서 너무도 복잡하니까.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어떤가.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당연한 것을 남이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수 많은 물음표 중에 확실하게 답을 적을 수 있는 게 생겼는데.
... ...
아니 어쩌면, 새로운 감정에 대한 용기가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거절 당할 용기까지.
그래. 방법론이 아니라. 누가 들으면 오그라든다고 할 만큼, 아주 거창한 용기 따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의 정리가 끝난 순간 자리를 박차고 옥상 출구로 향한다.
*
"고작 사랑의 큐피트나 하실려고 야근 수당 이야기를 꺼내시다니."
"이것도 다- 직원 복지 중 하나 일세 부사장. 무조건 직원을 쥐어 짠다고 답이 아니야."
"그래요. 그 망할 사랑 싸움 때문에 카린 양이 대신 시윤 군의 야근 수당은 물론이고 본인에게 들어가는 이터니움 정제 값까지 미친 듯이 뽑아내고 있군요. 저렇게 일해주면 제 입장에선 딱히 손해는 아닙니다만."
여자의 비꼬는 말에 남자가 크게 헛기침을 한다.
"크흠, 크흠! 지금 카린 양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군."
"뭐, 어찌 됐든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군요. 제가 말해도 한사코 저렇게 자리를 지키고 일합니다."
"컨디션도 원소 유지에 영향을 줄 텐데... 큰일이구만. 시윤 군이 빨리 선택 해야 할 텐데 말이지."
"... ... 그 뺀질거리는 친구가 엑자일러에게 빠지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것도 당신이 의도 한겁니까?"
"예상 밖의 일일세."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붙여 놓고도 예상 밖의 일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 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일세. 뭐, 남녀의 사랑은 항상 예측 할 수 없는 법이지만."
"고작 사원들 연애질 하는 거나 보려고 이러시는 건 아닐테고요. 사내 익명 게시판에 스트리밍 캡쳐본을 올린 거도 사장님인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하하하-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역시 내 대리인 답군!"
"... ...악취미시군요."
남자의 홀로그램 화면에는 복도를 누가 빠르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여자 역시 cctv를 지켜보았다. 화면에 나온 당사자가 회사 밖을 빠져 나갈 때 까지.
*
관리부실의 문을 열었지만, 이미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무작정 사옥 밖으로 나간다. 이미 놓쳤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 뛰어간다.
사옥 정문으로 나가는 카린 양이 보였다. 심장이 뛴다. 이제 더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보면 되는데. 막상 보니 또 말문이 막히고, 몸이 굳는다. 속으로 용기를 내자고 다짐 해 놓고 또 쪼그라 들었다. 이걸 서윤 양이 알면 엄청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의도치 않게 뒤를 밟는 모양새가 되었다. 예상 외로 바로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집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간다. 그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강이 흐르는 그 공원이었다. 밤이라서 까맣게 보이지 않는 강물. 그녀는 그때의 그 벤치에 앉아서, 까맣게 물들어서 보이지 않는 강 쪽을 본다. 주변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표정일까. 속으론 궁금하면서 여전히 말을 걸지 못했다. 이쯤 되니 용기도 없고, 말 거는 법도 까먹은 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쌀쌀한 바람이 추운지 몸을 움츠린다. 나도 모르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가 내 스스로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한심한 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 다시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괜히 이럴려고 그런 게 아닌데, 스토킹 하는 것 같아서 양심이 찔린다.
한참을 걷고, 카린 양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카린 양이 걸음을 멈췄다.
"언제까지 따라 오실 거에요."
"... ..."
"지금 하시는 행동은 스토킹이랑 다를 게 없습니다."
"하하... 미안해요. 카린 양."
"회사에서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할 말이 있으신 건가요."
"... ..."
뒤를 돌아서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말투에서는 어떤 감정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일할 때 쓰는 특유의 상투적인 말투였다.
바보같이 내가 대답을 못하자 갑자기 뒤를 돌아서 성큼성큼 다가온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질 쳤다.
화난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내 팔을 잡고는 무작정 끌고 간다.
"어...? 어? 잠깐, 잠깐. 잠깐만요..!"
"... ..."
엄청 많이 화가난 듯 쾅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나를 끌고 간다. 끌고 간 곳은 카린 양이 사는 집안 이였다. 크게 당황한 나랑 다르게 카린 양은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거의 나를 집 안 바닥에 패대기 쳤다.
"아..하하하... 역시 여성분이여도 카운터는 카운터네요... 이렇게 끌려 오다니... 카린 양이 이렇게 대범한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
"시윤 씨."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부르니 아무 말이나 뱉던 입이 다물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보니 카린 양은 나를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여긴 누군가가 볼 위험도 없이 오직 저희 둘뿐입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지금 해주세요."
"... ..."
"그게 아니라면 제가 실례했습니다. 할 말 없으시면 나가주시면 될 것 같네요."
"카린 양..."
"... ..."
상처 주려는 듯한 말과는 다르게, 떨림이 느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입술이 떨리고, 손 끝도 떨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 방울에 나는 신발을 대충 발에서 빼버리고 방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조금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 나도 멈춘다. 현관문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카린 양.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신 거에요. 시윤 씨가 사과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우는 건데요."
"... ..."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렇게 울면서 나를 응시하더니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발을 딛는다.
"저랑 대화 시작하고 이렇게 서럽게 우시는데 어떻게 제 탓이 아닐 수가 있겠어요."
"... ..."
"카린 양. 저는... 어억?"
갑자기 나를 또 밀고 들어 간다. 넘어질 뻔한 몸의 중심을 간신히 잡고, 미는 속도에 따라 뒷걸음질 친다. 어느 순간 다리에 무언가 걸려서 뒤로 넘어졌다. 푹신한 감각이 굳이 보지 않아도 침대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찰나에 카린 양이 침대 위로 올라와 양손을 내 몸 양 옆에 딛고 나를 내려다 본다. 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어두운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여전히 울면서 나를 바라본다.
"카린 양?"
"순전히 제 잘못이고, 제 탓입니다. 시윤 씨가 저에게 잘 못하신 건 없어요."
"아니, 대체 카린 양이 뭘 잘 못 했는데요! 대체 뭘요!"
"어차피 사라질 사람이 욕심 내서 뭐하냐고요!"
"...!"
"...지금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순전히 제 욕심입니다."
"... ..."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사람에게... 어차피 사라질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 정말 큰 잘못이죠. 안 그런가요?"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뜬다. 이번엔 내 눈을 피한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치 않게 다 듣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펜릴 소대장님에게 쏟아내는 이야기 전부요. 그 때 아주 강렬하게 깨달았어요. 저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이라는 거를. 언제 어디서 몸이 망가지고 분해되어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 카린 양."
"뜻하지 않은 이별을 또 겪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냥 저 혼자만의 욕심이었으니 저 혼자 끝내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상처 입은 사람이 어차피 사라질 사람 좋아 할 리 없으니까!!"
"카린 양!!"
"... ..."
마음이 아파서 문드러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마음 아픈 이야기가 듣기 버거워서. 듣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 이런 말도 안되는 고민을 했을 걸 생각하니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내 눈을 다시 마주했다. 인상을 쓰면서 나를 보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윤 씨. 당신은 분명 좋은 사람입니다. 저처럼 이기적이고, 제 욕심만 부릴 줄 아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그건 순전히 카린 양의 생각 아닌가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아니요. 그 말 틀렸어요. 다 틀린 말이라고요!"
"...!"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려 내 쪽으로 잡아 당긴다. 갑작스럽게 가해지는 힘을 예상 못한 듯, 힘없이 내 품으로 떨어진다. 이제 왜 그랬는지 알았으니까... 들었으니까. 물음표에 답을 완성 시킬 시간이다.
떨어진 그대로 내가 꽉 안아버리자 카린 양이 발버둥을 쳤다.
"제발.. 시윤 씨. 제발."
"카린 양. 움직이지 말고 이대로... 제 얘기도 좀 들어주세요. 저에게도 말할 기회를 줘요."
"... ..."
그녀가 움직임을 멈춘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체온에 심장이 요동친다.
"카린 양. 말대로 저는 소중한 가족을 잃고, 한 번은 그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의지했던 스승님이 말도 없이 떠나가 버려서 상처를 받았었어요. 뭐, 애초에 스승님이라곤 하지만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요."
"... ..."
"그래요. 어쩌면 정말로 내일 당장 카린 양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애정을 갈구해도, 그 사람이 사라지면 받지 못하니까. 아예 포기 해버릴 수도 있죠. 그런데도, 저는 지금 카린 양을 안고 있습니다. 어때요? 정말 단순히 본인의 욕심과 짝사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이렇게 까지 하는 게 다 가식 같아요?"
"... ..."
"저도 카린 양 좋아해요. 들어보세요. 이렇게 미친 듯이 쿵쿵 대는 소리요."
"... ..."
"이제 제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것 같아요?"
"... 아니..요..."
점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한 손으론 등을 토닥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해야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늦게 말해서 그리고 늦게 알아 차려서 죄송해요. 카린 양."
"흐윽..."
"진심으로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는 울다 지칠 때 까지 나를 붙잡고 울었고,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 ...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던 육지에 달빛이 드리운다. 차디찬 바람이 조금씩 잔잔해지고, 모든 걸 집어 삼킬 듯이 치던 파도도 점점 약해진다. 달빛이 비춘 곳, 모래 사장 위 누군가가 서있다. 조금씩 다가가서 손을 뻗는다. 그 사람은 내 손을 잡고 조금씩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더 이상 모래가 닿지 않는 곳으로 점점 데리고 간다. 나는 그렇게 애정이라는 육지의 땅을 밟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 손이 따뜻해서 놓치지 않게 꽉 잡는다.
-
"다 울었어요?"
"... ..."
"풀어드릴까요?"
품 안에서 도리도리질을 한다. 그 조용한 대답에 답하듯 나는 다시 꽈악 안는다.
"귀여우시네요. 악!"
가슴을 한 대 맞았지만, 그래도 귀엽다. 이젠 귀엽다는 생각도 맘대로 할 수 있다.
"아파요. 소중하게 다뤄주세요~"
"흥!"
"하하하-"
역시 귀엽다.
울음이 다 그쳤어도 나는 계속 카린 양을 품에 안았다. 따뜻하고 기분이 날아갈 것 처럼 좋다. 요 2주 가까이 철벽(?) 당한 시간을 모두 보상 받는 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 피해 다니는 거 안 힘들었어요?"
"엄청 힘들었습니다."
"하하- 저도요.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몰라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렇게 다~ 보상 받는데요. 뭘. 그쵸?"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좀만 더 빨리 대화를 할 걸 그랬다. 뭐, 그 덕에 어쩌다 보니 야근 수당도 얻었지만...
아무튼, 고개만 까닥까닥 하는 게 참 심장에 해롭다.
"카린 양. 안 피곤해요?"
"요근래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더니 불면증이 와서..."
"하하하- 큰일이네요. 카린 양은 맨날 일정한 시간에 자야할텐데 말이죠. 마음 고생 많이 하셨네요."
"... ..."
카린 양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본다. 나도 시선을 마주친다.
"예쁜 얼굴에 다크 써클이 턱까지 내려오셨네, 얼굴도 엄청 빨개지셨네요?"
"그게... 시윤 씨..."
"네~?"
"... 제 하반신 쪽에 이상한 게 느껴져서요."
"... ..."
"... ..."
"음...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
"... ..."
"미인이 이렇게 제 위에 안겨있는데-"
"... ..."
"당연한 거 아닐까요?"
"... ..."
"... ... 풀어드릴까요?"
"그건... 조금 싫네요."
"하하하-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앟!"
이번엔 옆구리를 강타 당했다. 하지만 억울한 걸. 남자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능구렁이."
"그런 능구렁이 안에서 안 나가시는 여기 귀여운 분은 무슨 생각이실까요?"
"흥-"
뭐,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좀 참아봐야겠다.
"무슨 생각해요?"
"몰라요. 그냥 행복해요."
"저도요-"
문제 상황(?)과 별개로 우리는 또 다시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얼어버렸던 마음을 그렇게 조금씩 녹여간다.
+) 다음껀 19창작 탭에 올라갈거야!!
순애물이나 매운맛만 쓰다가 떡씬은 첨써보는거라 많이 막히고 있지만 힘내볼게!!!
엄청 초 장편 되어가고 있는데도 읽어줘서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