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ArtStation - Snake Illustration, Anabel Martínez Baños
(6) 심연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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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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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에어리어
나나하라 신사
p.m. 2:00
클리포트 게임을 빙자한 마왕들의 세계침공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마왕 전원이 클리파 차원 째로 봉인당하며 일단락 지어졌다고들 말한다.
물론 마왕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봉인을 피하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존재를 여러 갈래로 찢어 봉인을 피하려 들었던 4번째 클리포트의 마왕 '가아그셰블라'.
그리고 8번째 클리포트의 마왕 '아드라멜렉'의 반신, 통칭 '뱀'이라는 신성 침식체.
반토막이 난 이 마왕의 잔재들도 결국 봉인되었다.
가아그샤블라는 영국의 '프리드웬 기관'의 시초였던 전대, 아드라멜렉은 일본의 '나나하라' 가문의 모태가 되는 전대에 의해서.
무수한 희생을 동반한 끝에 나나하라의 초대 가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뱀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뱀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나하라 가문의 사람들은 나나하라 대저택 인근에 작은 신사를 하나 지어 봉인을 숨겼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신사지만, 그 정체는 종류를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다양한 금제와 주술로 이루어진 거대한 봉인.
그것이 나나하라 자매와 힐데 일행이 와 있는 봉인지의 정체였다.
......
봉인지에서 힐데는 요 몇 년 간 초대 가주가 설치한 봉인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왔다.
초대 가주 또한 구 관리국의 인물. 그러니 그가 만들어낸 봉인 시스템 또한 구 관리국의 것이다.
비록 가주와 출신지는 다를지라도 구 관리국의 시작부터 조직과 운명을 함께 해온 힐데라면 사소한 점검이나 보강쯤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나하라 자매와 힐데, 루시아 일행이 하고 있는 이 '청소작업' 또한 봉인을 보강하는 한 종류의 일이었다.
네 사람의 발치에는 검은 빛을 띈 뱀 형상의 시체가 사방에 깔려 있었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뱀 형상의 생명체들도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치후유는 달려들던 뱀 하나를 검으로 날렵하게 베어냈다.
치나츠는 손짓으로 바람을 일으켜 뱀을 날려버렸다.
치나츠가 날려버린 뱀들에게는 루시아가 결계로 형상화한 검을 꽂아넣었다.
네 명의 소녀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뱀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고, 쉭쉭대며 죽어가는 뱀의 소리들이 봉인지 내부를 가득 채워나갔다.
"놈의 '잔재'가 또 범람했네요. 언니."
"그러네. 이전보다 더 심한 것 같아. 아버님께서 살아 있으셨을 땐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깔끔한 검무로 뱀들을 베어낸 뒤, 검에 묻은 것들을 털어내며 힐데가 말했다.
"어쩔 수 없다. 마왕이 가진 힘은 특수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봉인이 불가능해. 게다가 평범한 봉인이기에, 술자가 죽었을 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약해지는 것은 필연이다."
치나츠는 막 가주가 되었던 어린 시절, 힐데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기억해냈다.
초대 나나하라 가주의 힘이 뱀과 극상성인 덕에 지금까지 가둬둘 수 있었던 것일 뿐, 뱀을 가둬두고 있는 봉인은 계속 약해질 것이다.
또한 봉인이 약해질수록 이 지역 인근에 현실 침식과 같은 이상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뱀들이 봉인지에 바글거리는 것도 힐데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상현상 중 하나였다.
뱀의 힘이 봉인을 잠식해가면서 봉인 너머로 범람하는 현상으로, 제 때에 전부 없애줘야 봉인의 침식을 막아낼 수 있었다.
치나츠는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죽인 뱀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했다.
눈때중으로 봐도 알 수 있었다. 뱀의 개체수가 이전에 봉인을 점검할 때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는 것을.
치나츠의 얼굴이 근심을 머금고 굳어갔다.
"소대장님."
"알고 있다. 범람하는 양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군."
때맞춰 좋은 타이밍에 온 것이라며 힐데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봉인을 더 손보면 돼.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원래 모든 싸움은 지키는 쪽이 우위에 있어."
"저희가 여전히 유리하단 말씀이신가요?"
"저희 선조님께서 남긴 힘의 잔향이 약해질수록 봉인의 균열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치후유도 치나츠에게 편승하여 의견을 더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에겐 치나츠 가주, 그대가 있지. 초대 가주와 동일한 힘을 갖고 태어난 나나하라 최강의 바람술사. 그대의 힘이 성장할수록 이 봉인에 남은 힘을 보강하는 것은 더 쉬워진다. 우리 입장에선 봉인을 계속 조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힐데의 말에 루시아가 오른손을 입에 갖다댄 채 진지한 눈빛을 하고 답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 봉인된 놈에게도 지금의 때가 기회겠네요. 가주님이 더 장성하기 전에 이 봉인을 뚫어야 할테니까."
"그렇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봉인 내부에 지금 이렇게 잔재가 범람한걸 보니 녀석이 먼저 수를 둔 모양이야."
그 때였다.
크흐흐, 흐흐흐흐흐흐-!!!
갑자기 봉인지 내부에 큰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광기에 가득 찬 웃음소리가 봉인지를 뒤흔들었다.
웃음에는 사람의 음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음산한 노이즈가 끼어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히 거부감을 유발했다.
네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몸의 긴장을 한껏 유지한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유리하다고? 너희가?
우스울 정도로 예리한 고찰이구나. 최후의 발키리여.
""??!""
"이 목소리는...?"
자신을 지목해온 목소리에 힐데는 깜짝 놀랐다. 우위를 상정하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지금껏 봉인을 점검하면서 범람이 일어난 적은 있을지라도, 뱀의 목소리가 들렸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뱀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이 봉인지 전체가 이미 뱀에게 상당 수준 잠식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봉인의 쐐기인 함선 카미이즈미의 상태는 멀쩡했고, 봉인의 다른 부분들도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 정도로 봉인이 잠식되어 있었다면 힐데 자신이 진작에 알아내고 조치를 했을 것이다.
아니, 조치를 하기도 전에 뱀 스스로가 봉인을 깨고 나왔을 것이다.
"봉인이 우리 예상보다 더 많이 잠식되어 있던 건가요!?"
"아니. 봉인에는 문제가 없다. 있었다면 우리가 진즉에 발견했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는 네 사람을 향해 노이즈가 잔뜩 낀 음산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뱀의 말투는 상당히 고양되어 있었다.
내 반신이 이 세계에 다시 한 번 강림한 것을 잊었느냐?
비록 나뉘어졌을지라도, 하나가 되고자 하는 본능은 사물의 섭리.
반신의 태동은 날 가두고 있는 이 봉인에도 영향을 끼쳤지.
"언니. 오사카 대절멸 사건...."
"그럴 수가... 설마 그 때의 일이 원인이 됐으리라곤-"
치후유와 치나츠는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한 채였다. 당황한 것은 힐데도 마찬가지였다.
아드라멜렉의 현실 강림이 설마 뱀의 봉인마저 뒤흔들다니. 초대 가주의 할아버지가 와도 예측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도 당황하는 것과 행동은 별개의 것.
뱀이 이미 깨어나 있는 상황이라면 놈은 어떤 수단으로든 반드시 공작을 걸어올 것이다.
대비해야 한다. 오랜 세월의 전투로 다져진 그녀의 경험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뱀의 수작질보다 힐데의 행동이 한 차례 빨랐다. 힐데는 옆에 서 있는 루시아와 치나츠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모두, 서로의 손을 잡아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해선 안 돼!!"
호들갑 떨지 말거라. 최후의 발키리여.
내가 깨어난 것은 맞지만, 안타깝게도 너희를 내 뜻대로 어찌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 말이야.
당장에라도 이 역겨운 봉인을 깨부수고 너희의 정신을 갈가리 찢어놓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쉬워.
서로 손을 마주잡은 네 사람은 침묵한 채로 상황을 살폈다.
적은 정신을 찢어놓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그 말로 미뤄보아 정신 계열의 능력으로 이쪽에게 접근해오리란 점은 넷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쉭쉭대는 뱀의 혓바닥 소리가 봉인지 내부에 소름끼치게 울려퍼졌다. 허공에서 거대한 눈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일분 일초가, 지옥과도 같은 적막함이 네 사람의 피를 서서히 말려갔다.
아. 그래. 그 증오스러운 바람잡이 놈의 힘이 다시 느껴진다 했더니, 네가 그 후손이로구나.
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 목표는 치나츠였다.
치나츠는 침묵하지 않았다. 당당한 눈을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겁 없이 맞선다.
"네. 초대 가주 나나하라 하루토의 후손, 나나하라 치나츠입니다. 현 나나하라 가문의 가주로써 당신을 봉인하고 있죠."
쉭, 쉭, 하고 혓바닥 소리같은 바람이 봉인지 내부에 불어온다.
참으로 어여쁜 아이야.
어여쁘면서도, 유약하고, 조금만 건드려도 산산조각날 것 같은, 그런 온실 속의 화초같이 사랑스러워.
그 아름다운 영혼은 또 어떠한지! 바라보기만 해도 나 스스로가 추하게 느껴질 정도야.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아이야. 그 어여쁜 영혼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보여주지 않으련?
쉭, 쉭. 바람이 말을 걸어온다.
귓가에, 눈에, 뇌 속에, 영혼에 한마디 한마디가 새겨지며 마음이 절로 움직인다.
치나츠는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고 있었다.
"핫?!"
"언니! 홀리면 안됩니다. 조심하세요!"
"고, 고마워. 치후유."
치후유가 치나츠의 팔을 덥석 잡자 치나츠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치나츠는 왜 힐데가 자신의 의견을 칼같이 묵살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놈에게 있어 극상성의 힘을 가진 자신마저도, 단지 말 몇마디 들었을 뿐인데 정신이 흔들릴 뻔했다.
하물며 다른 연합원들은? 치후유는? 이래서야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수준이다.
경계를 늦춰선 안된다. 등골이 서늘해진 치나츠는 카운터 능력을 일깨워 방어막처럼 주변에 둘러쳤다.
치후유가 으르렁대며 저 너머로 소리쳤다.
"언니께 손 끝 하나라도 대게 두진 않는다, 흉물 놈!!"
오, 후손이 하나 더 있었군. 그 패기로운 모습이 마치 날 봉인하던 그 순간의 바람잡이 놈을 생각나게 하는구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정말 당차고, 굳센 기개야. 내 힘의 잔재들을 용맹스럽게 썰어 넘기는 걸 봤을 때는 전율마저 느꼈단다.
그러나 그 대나무와도 같은 굳은 심지 뒤에, 네 마음 속에 깃든 어둠의 조각이 내게는 보인다.
검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가주인 언니 뒤에 가려진 채 살아야 했던, 너의 어둠이 보이는구나.
"헛소리를. 난 언니의 뒤에 가려진 것이 아니야. 언니와 길이 다를 뿐이지."
치후유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뱀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뱀은 한껏 고양된 말투로 치후유에게 계속 속삭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굳센 벚나무같은 아이야.
어른들이 널 바라봐주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억울하게 느껴지진 않니?
나는 알아. 그 시간동안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것은 너잖니. 나나하라 치후유.
겨울에 쌓인 눈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아이야.
난 너를 오래전부터 계속 봐왔단다.
너의 탄생부터, 네가 검을 잡은 순간, 다섯 살에 맞은 생일날 언니에게 선물을 받던 순간, 언니와 함께 진심을 털어놓고 마음을 열던 순간,
그 모든 순간 순간들을 다 알고 있단다.
쉭, 쉭, 하고 바람소리가 울린다.
바람의 혀가 뱀처럼 얼굴을 타고 흐른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서도, 안쪽에서도, 뇌 속에서도, 입 속에도,
목소리가 가슴 한 켠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지금도 가주가 되고 싶지는 않니? 언니를 넘어서 가문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싶지는 않니?
"헛, 소리....를....?"
간단해. 그 검을 뽑아 네 곁에 있는 언니를 베어.
베고, 베고, 또 베고, 목을 자르고, 팔을 동강내고, 다리를 끊고,
몸통을 썰어내서, 장기를 끄집어내고, 코를 도려내, 눈을 씹고,
두개골을 갈르고,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어.
피를 빨아먹는 벚나무와 같이, 어여쁜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나의 이름을 외치는거야. 아주 간단해.
태초의 뱀의 이름으로 말ㅎ-
"태초의 뱀의 이름ㅇ
"치후유 양!!!"
"치후유! 정신 차려 치후유!!!"
"현혹되지 마라 치후유!!"
"?!!"
치후유는 화들짝 놀라며 숨을 몰아쉬었다. 양 손을 움켜쥐었다 풀어보고, 고개를 여러 차례 뒤흔들었다.
"치후유, 괜찮은거야??"
"허억... 허억.... 제,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방금 전, 치후유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절대로 뱀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뱀의 말은 거짓이다. 놈이 뭐라 말하든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굳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뱀이 하라는 대로 이상한 말을 읊고 있었다.
루시아와 힐데, 치나츠가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눈 앞이 아찔했다.
바람의 힘을 부리는 아이야. 너 또한 마찬가지란다.
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치후유를 농락하던 소리는 다시금 방향을 틀어 치나츠를 겨냥했다.
강력하고 자유로운 바람을 다루면서,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한 그 모습이 너무나 애달프구나.
가문의 의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진 채, 억눌려 살아온 너의 앳된 뒷모습에 눈물마저 돌을 정도야.
내가 그 짐을 조금 덜어낼 방법을 알려줄까? 알고 싶지 않니?
"당신이 알려주는 방법 따위, 들을 가치조차 없습니다."
내 손만 잡으렴. 지금 저택에 모여있는 가문 사람들을 전부 말 없는 시체로 바꿔줄 수 있단다.
그래. 보이는구나. 목 없는 시체, 팔다리가 잘린 시체, 오장육부가 튀어나온 시체,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
시체만이 남은 채 고요함에 잠긴 너희 가문의 모습이 보인다.
그 수많은 시체더미 속에 홀로 서서 시원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네 모습이 보인다.
아아.... 나나하라 치나츠여.
나의 이름을 외치며 무거운 짐 대신 내가 내미는 왕관을 받아들고,
세계 열방의 모든 생명 없는 것들의 왕이 된 네 모습이, 내겐 보이는구나...!!!!
치나츠는 답하지 않았다. 뱀이 의도하는 대로 말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내부로부터 힘을, 카운터 능력을 끌어올렸다.
아까처럼 보호막을 치는 정도가 아니라, 정면에서 부숴 꺾기 위한 힘을 모은다. 바람의 기운을 급속도로 몸 한복판에서 순환시킨다.
"이 바람은...?"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치후유는 고개를 들었다.
쉭, 쉭 하고 불어왔던 음산한 바람 대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바람이 한번 몰아칠 때마다 들릴락 말락 한 음이 시작되어, 음산한 뱀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다.
사방에서 치나츠를 중심으로 불규칙하게 불어오는 바람들은 서로 부딪히며 음을 만들었고, 화음을 구성했고, 하나의 춤이 되었다.
치나츠는 치후유와 루시아, 힐데를 껴안으려는 듯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치나츠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바람들이 갑자기 폭발하듯,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내며 다시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키이이이이&#이이!@$ㅇㅣ이-!!!!!!!
저 너머에서 잔뜩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네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다.
뱀이 속삭이던 저주와 폭력의 말들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더이상 이 곳은 봉인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뱀의 존재? 네 사람에겐 이미 뒷전이었다.
네 사람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각자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집중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몰아치는 바람의 모습은 힐데가 보기엔 마치 왈츠를 추는 것 같았다.
바람의 색을 볼 수 있다면 분명히 분홍 빛깔의 바람일 것이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치후유는 자신의 입가에 분홍색으로 빛나는 꽃잎 하나가 날아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벚나무 아래, 벚꽃 무도회에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오감이 현실로 돌아왔다.
치나츠의 얼굴에는 어린 소녀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치후유도, 루시아도, 힐데도, 편안한 표정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굉장하군. 이게 나나하라 가문이 갖고 있는 '시조의 힘'..."
"대단해요 언니! 언제부터 이 정도로 능력을 잘 쓰게 되신 거에요?"
"다들, 칭찬도 좋지만 잠시 아껴두세요. 제 결계에 놈의 존재가 탐지됩니다."
루시아의 말에 네 사람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뱀의 기척을 살폈다.
뱀이 나타나기 전처럼 소름 끼치는 적막함이 봉인지를 다시 뒤덮었다.
루시아는 아까 전 뱀이 치나츠와 치후유의 정신을 잠식하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미리 영혼 너머에 결계를 쳐 놓는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정신공격을 포착하여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봉인된 상태에서도 말 몇 마디로 인간의 정신을 흔들어 놓다니,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내가 그 때 말했지 않느냐.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금도 너희들의 정신을 잠식시킬 뻔한 놈이다. 이런 괴물이 세상에 다시 풀려난다면 세계는 끝이야."
다시 음산한 바람이 쉭, 쉭, 하고 불어왔다. 아까보다는 그 기세가 약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지. 모든 필멸자들이 벌이는 광란의 연회!
살육과 살점과 피와 내장이 튀기고, 피냄새와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지천을 뒤덮는 아름다운 광경!
나의 동족들과 함께 하는 신성한 의식의 개최를 알리기엔 아주 적격일 거야.
음산하면서도 광기에 찬 웃음소리와 함께 봉인지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쉬익, 쉬익 하는 바람이 한순간 광풍이 되어 봉인지에 내부에 울려댔다. 수천억 마리의 뱀이 혀를 날름대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더럽혔다.
"벗어나려고 자꾸만 발버둥쳐봤자 소용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네놈이 거기서 나오는 일은 영영 다시 없을 테니까."
더는 못들어주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뱀 모양 침식체의 사체에 칼을 꽂아넣으며 힐데가 소리쳤다.
그러나 뱀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영 시큰둥했다.
오호라. 그래. 그렇게 나와줘야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나갈 생각이 없는데.
아니, 그 이전에. 왜 내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죠?"
"나오려고 봉인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이런이런. 우리들을 몇 번이고 방해해왔던 네가 이렇게나 물러진 모습을 보일 줄이야.
어차피 봉인은 아직도 건재해. 이 너머의 일부를 잠식시킨 것만으로 봉인을 넘어설 수 없다는건 내가 너희보다 잘 알아.
그런데 내가 왜 너희 앞에 존재를 드러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뱀이 말한 대로였다.
이렇게 말은 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반신 아드라멜렉이 현실에 강림하느라 이뤄진 편법.
통상적으로는 봉인이 올바르게 작동하는 이상 뱀과 치나츠 일행이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또한 뱀의 능력이 사람의 정신을 흔든다지만, 봉인되어 있기에 제대로 된 세뇌조차 불가능하다.
가능했다면 진즉에 힐데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가 이미 세뇌되어 뱀의 봉인이 풀렸을 것이다.
즉, 여기서 백날 대화를 나눠봤자 뱀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힐데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해 들어갔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 때문에?
다음에 뱀이 입에 담은 말은 힐데의 정곡을 날카롭게 찔러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택 경비는 잘 되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네 제자라는 그 사내아이. 나의 권속으로써 탐날 만큼 강력한 카운터던데 말야.
순간, 힐데는 처음 뱀의 목소리를 들은 때보다 훨씬 크게 동요했다.
"네 놈, 지금 무슨!!!"
"시윤 군을 어쩔 셈이냐!"
"이봐 너! 시윤이한테 뭔 짓 했어? 대답해!!"
옆에서 치후유나 루시아 또한 뱀에게 고래고래 소리쳐댔다.
힐데의 마음 한 켠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죽은 부모 대신 약속 때문에 손수 키워온 아이다. 주시윤은 힐데에게 있어 사명과는 별개로, 사명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뱀이 뭔가 술수를 쓴 것인 양 언급해온다.
주시윤이 뭐 어쨌다는 것이지? 지금쯤 경호 임무라는 허울 아래 편하게 널브러져 있을 녀석에게 무언가 장치를 해 두었다는 걸까?
다른 카운터도 아니고, 나나하라의 누군가도 아니고, 왜 하필 주시윤일까?
힐데는 속이 들끓어서 당장에라도 뱀에게 주시윤에 대한 것을 캐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냉정하게 사고하며 머릿속의 퍼즐들을 하나 하나 빠르게 맞춰 나갔다.
여기서 대화를 걸어온 이유, 자신과 주시윤의 위치, 그리고 대화 너머에 숨어 있는 의도. 뱀의 진짜 목적.
힐데가 냉랭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는 반면, 뱀은 즐겁다는 듯 고양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현명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도록 보험을 들어두는 법이지.
이리 되기 전에 '온전한 시절의 나'는 나의 권속들을 세상 곳곳에 흩뿌려 놓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깨어나 있는 지금, 권속들에게 내제되어 있던 나의 힘이 발현한 상태겠지.
"권속, 이라고....?"
하나 문제를 내보마.
봉인되기 전 내가 바깥 세상에 뿌려놓은 권속들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나라에 있는 권속은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
지금 여기서 나와 이렇게 담소를 나눌 때는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수를 잘못 둔 것은 아닌가?
음산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뱀의 목소리가 차츰 저물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치나츠가 갖고 있는 통신용 패널이 갑자기 켜지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긴급보고! 긴급보고! 침식체들이 쳐들어왔습니다! ]
[CSE 레벨 지속적으로 상승 중! 1, 2종 다수 확인! 3종도 보입니다!]
[가주님! 복귀하셔야 합니다! 봉인지 인근에도 침식체들이 관측됩니다!]
긴급 상황임을 알리는 다급한 통신들이 빗발치는 가운데, 힐데는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뱀은 애초에 시선을 끌기 위해서 존재를 드러냈을 뿐이다.
본래라면 대화조차 나눌 수 없어야 하는 존재가 짠 하고 나타난다면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 동안에 바깥 세상에서 자신의 사도가 다른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원래부터 그랬다. 뱀은, 아드라멜렉은, 이런 권모술수에 굉장히 능한 마왕이었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놈이라 미처 읽어내지 못했을 뿐. 힐데는 자신의 아둔함을 스스로 책망했다.
머릿 속이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징 하고 울려왔다.
"언니. 이건...."
"그래. 양동작전이었구나."
"여기 갇혀있는 주제에 잔꾀를 잘 부리네요. 설마 봉인된 채로 바깥 세상에 손을 뻗을 수 있었을 줄이야."
루시아는 힐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한 각오가 나타나 있었다.
"다음 지시를 내려주시죠. 힐데 소대장님. 시윤이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가야 하잖아요?"
".....지금부터 봉인지를 이탈해서 저택으로 가세한다."
제길. 하고 힐데는 땅에 꽂혀 있던 검을 과할 정도로 세게 뽑아내어 괜히 화풀이를 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냉철해 보이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뜨거웠고, 누구보다도 불안정했다.
제발 시윤이만은 무사하기를.
힐데는 나나하라 자매와 루시아를 이끌고 봉인지를 빠르게 이탈하며 그렇게 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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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노.....
- 뱀의 목소리는 디아3 시네마틱의 레아블로 생각하면 됨 쉭쉭 소리랑 노이즈랑 음산한 느낌 섞인 악마 목소리.
- 가아그샤블라가 분열당했듯 여기 오리지날 설정상 아드라멜렉은 물질중독을 가진 아드라멜렉 / 정신중독을 가진 뱀으로 반갈죽당했음. 전자의 활약상을 보고 싶다면 내가 쓴 이수연문학 모음 - 카운터사이드 채널 (arca.live) 여기로.
- 초대가주인 나나하라 하루토가 저런 미1친 씹오버밸런스 좆괴물련을 줘패고 봉인할 수 있었던건 그 힘이 정화하고 치유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정신침식 면역 토템 역할을 했던거임. 그 점은 작중 치나츠가 힘 좀 개방했다고 괴로워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 그리고 주시윤은 생각보다 꽤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