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이따금 그 때의 일이 떠올라요

"더럽고 꾀죄죄한 것들"
"길바닥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벌레들."

평범한 사람들이 들었다면 화를 내며 길길이 날 뛰었을지도 모르지만 저에겐, 아직까지도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운 말이에요.

선생님, 그거 아시나요?

전쟁 고아에겐 '이름'이라는 것은 없어요.

'야', '너', '걔'는 오히려 고풍스러운 수준이고 대개는 차마 선생님께 들려드리기 힘든 천박하고 더러운 말들로 저, 그리고 우리들을 불렀답니다.

선생님, 그거 아시나요?

전쟁 고아에겐 '꿈'이라는 것은 없어요.

꿈으로 뻗어가야 할 손에는 폭탄과 총이 자리를 대신하고 꿈을 꾸어야 할 머리 속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였고


그게 바로 저였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아무것도 아닌 소녀는 '가은' 이가 되었고

선생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을 때
아무것도 없던 소녀는 꿈을 꾸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너무나도 착하고, 너무나도 다정하고,
너무나도 옳곧고, 너무나도 멋있으세요.

그렇기에 저는 선생님 주변에 여자들이 많은 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 속으로는 너무나도 불안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오기도 했어요.

만약.

아주 만약에.

선생님이 누군가의 연인이 된다면, 상상 만으로도 울적해지지만, 저는 선생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선생님의 행복한 얼굴을 지켜보는 것이니까요.











제 욕심이 과했던 걸까요.

제 이런 이기심에 선생님이 질려버리신 걸까요.

선생님. 왜 저를 떠나버리신건가요.

차라리

차라리 제 눈이 다시 멀어서

눈이 멀고, 귀가 멀어,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래서 선생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거라면

그렇다면 나았을텐데.

차라리 제가 미워 떠났다는 말이라도 한 마디 하셨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미어지진 않을텐데


선생님.

사랑하는 선생님.

혹시라도 이 편지를 보신다면

선생님을 사랑하던 '가은'이가

......아니

한 '소녀'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