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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처뿐인, 그저 상처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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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춘 것은,

나약함과 진실.

 

잃은 것은,

영원한 안식."

 

- 블리치 캐릭터북 ‘masked’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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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하라 대저택

p.m.07:00



힐데는 주시윤의 방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손에 들린 쟁반에는 주시윤 몫의 식사가 얹혀져 있었다.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쟁반에 들려있는 국이 찰랑인다. 쟁반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힐데는 생각에 잠겼다.


그 때도 이렇게 직접 끼니를 챙겨줬는데.



"....."



갑자기 든 옛날 생각은 무뚝뚝한 여신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드리웠다.


요 근래 힐데는 주시윤의 건강을 챙기는 것에 열심이었다. 


주시윤이 빠진 저택 경호 인력의 편성을 더욱 짜임새 있게 바꾸는 것은 물론이요, 시간만 됐다 하면 주시윤의 방에 찾아가 안부를 묻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식사를 가져다 주는 것도, 본래라면 나나하라 가문의 시종들이 할 일을 힐데가 뺏다시피 해서 가져다주는 길이다.


깨어난 주시윤에게 향후 일은 신경 쓸 것 없다는 둥, 몸 관리나 잘 하라는 둥, 차갑게 대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힐데가 주시윤에게 쏟는 관심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의 것에 가까웠다.


매사에 냉정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백전연마의 노장이, 누군가에게 부모가 할 법한 행동을 보인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도 아닌 소년에게?


그야말로 빅 히트감 뉴스다. 코핀 컴퍼니 사내 신문 제 1면에 박제되고도 남을 만큼 특종거리다.


그만큼 힐데에게 주시윤이라는 소년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주시윤의 존재는 모든 발키리들이 하는 '최초의 서약' 이나, 자신에게 맡겨진 인류 수호의 사명만큼이나 거대했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셀 수조차 없을 만큼 긴 시간을 홀로 살아오던 그녀에게 어쩌다 떠밀려 온 약속.


지키지 않아도 됐지만, 도저히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던 무거운 약속.


그렇기에 힐데는 주시윤을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검술, 카운터로서 CRF를 다루는 법, 체력, 간단한 전술과 다양한 교양 지식들.


또한 그를 모든 위험요소로부터 배제시켜 왔다. 가령 예를 들면, 클리포트 인자와 같은 위험한 힘.


클리포트 인자를 가진 이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나가면서. 아직은 시윤이가 힘에 대해 알지 못했으면 해서. 필요치 않은 살인마저 불사했다.


그 모든 것들이 주시윤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희생이요 힐데 자신의 업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뱀의 수하들이 저택을 습격하고 주시윤을 중태에 빠트렸다고 할지라도, 그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힐데의 눈은 굳은 사명으로 점점 차올랐다. 눈동자를 채우는 사명은 정의감을 넘어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으로 보였다.


쟁반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힐데는 속으로 다시금 다짐했다.


한아. 연화야. 너희의 아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켜내겠노라고.


그것이 어떤 방식을 사용하게 되건간에.


반드시.


주시윤의 방문 앞에 다다른 힐데는 한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들겼다.



"주시윤. 나다. 들어가겠다."



그녀다운 여장부 같은 말투로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힐데는 문을 열어젖혔다.


주시윤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TV를 본다던지, 코핀의 사원들과 SNS로 연락을 취한다던지, 그런 모습 대신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듯 턱을 괴고 이불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해진 여름 밤하늘이 슬슬 방 내부를 어둠으로 수놓는다. 


침대 부근에 있는 호롱불 몇 개가 어둠을 밝히며 방을 은은하게 비췄다.


그 가운데에 있는 주시윤은 한밤의 귀공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힐데를 맞이했다.



"아. 스승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어?"



힐데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상에 가지고 온 쟁반을 얹었다. 



"별 거 아닙니다. 앞으로 뭐 하지? 정도의, 그런 사소한 고민?"



배시시 웃으며 주시윤은 힐데의 물음에 뭉뚱그려 답했다.


사실은 사소한 고민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중대한 고민이었지.


그것도 힐데와 자신의 관계를 뒤흔들어 버릴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 고민.


힐데에게 있어 금기이자 불문율로 취급되는 주시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이전부터 그래왔지만, 무의식 너머에서 새로운 기억을 접한 이후 과거의 진실을 향한 주시윤의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랬던 것이 얼마 전에 치후유와 루시아에게 받은 조언을 토대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주시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알아야 했다.


주한과 연화의 자식으로써, 그 날 부모님을 잃은 피해자로써, 모든 것을 들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스승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헤실헤실 웃던 주시윤의 실눈이 아주 살짝 떠지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실눈으로 지내던 그가 눈을 뜰 정도면 얼마나 굳은 결심을 한 것일지 짐작할 만 했다.


해야 할 말이 목구멍 발치에서 떠나질 않고 목울대를 울려댄다.


말해야 해. 말해야 한다고 계속 마음을 닥달한다. 


 

“제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



주시윤의 질문에 힐데는 말이 없었다. 5초, 10초, 1분이 다 되가도록 힐데는 주시윤을 가만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 외의 말을 들어서 충격받은 것 같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실신해 있다가 깨어난 녀석이 대뜸 그건 왜?”

 


그것이 고르고 골라서 나온 첫 대답이었다.


대뜸 왜 물어보느냐고.


힐데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다 한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 난 이미 모든 걸 다 말해줬어."


"...."


"네가 아는 그대로다. 그 날. 네 부모님의 클리포트 인자가 폭주했고, 난 나의 사명에 따라 네 부모를 처리한거야. 그게 전부다."



주시윤은 기대도 안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아니, 심드렁한 표정 이면에는 아주 약간의 기대가 심어져 있었다. 혹여나 제대로 된 답을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푸른 눈동자 너머에서 그 기대가 슬픔의 형태로 아른거린다. 주시윤은 애써 표정을 풀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예전과 똑같은 답을 해주시네요."


"변명할 생각도, 피할 생각도 없어. 그게 사실이니까."



힐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부모님을 죽였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화가 치밀어도 모자랄 대답이다. 


사람을 죽여놓고 어떻게 그딴 대답을 하냐고, 사이코패스냐고 역정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주시윤은 그러지 않았다.


힐데가 사람을 멋대로 죽여놓고 죄책감도 갖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주시윤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어떤 진실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러니 무엇이든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는데, 힐데는 그 요청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말하게 할 수 밖에.



주시윤의 눈이 푸른 빛에서 붉은 빛으로 점점 물들어갔다.


기이한 힘의 흐름이 주시윤의 주변을 감돌기 시작했다.


주시윤은 평소라면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극단적인 수를 뒀다.


자신에게 내제된 변종 클리포트 인자, '용혈'의 힘을 사용한다면, 힐데는 억지로라도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제자를 바라보던 다정했던 시선은 어디 가고, 힐데는 주시윤의 힘이 감도는 즉시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고사리같은 손이 세차게 휘둘러진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시윤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용혈의 힘으로 언령을 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힐데는 분노를 담아 한 마디씩 강하게 얘기했다. 그녀의 제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용하지 말라고 막아놓은 힘을 사용하려 들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스승인 자신이라니. 무슨 바람이 불은 것인가?


화를 내는 힐데의 반응과는 달리, 주시윤의 붉어졌던 눈은 언제 그랬냐고 말하는 것처럼 금새 붉은 기가 가셨다.


바라보면 편안해지는 푸른 인상의 눈동자가 다시 힐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힐데는 잠시 주시윤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그의 하관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살포시 풀었다. 주시윤은 숨을 크게 내쉬며 턱을 어루만졌다.


애초에 주시윤은 힘을 정말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힐데의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미끼였을 뿐.



"안심하세요. 정말 이 힘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



아쉽다는 듯이 주시윤은 힐데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들을 더 이야기해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바보였네요."


"말했잖아. 네가 아는 그대로라고. 이런 얘기 더는 하고 싶지 않구나."


"왜 이야기를 자꾸만 끊으시려는 거죠?"



힐데는 하루빨리 이 이야기를 끊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언령을 틀어막으려고 과하게 대처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의 말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주시윤은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언급이 금지된 주제를 초강수까지 둬가며 이렇게 꺼내왔다. 더는 뒤로 갈 수 없다. 애초에 뒤로 갈 의향도 없다.


다시 한 번, 주시윤은 강수를 두기로 했다.



"이유가 뭔가요? 스승님이 알려주신 사실들, 그 너머에 뭔가 있는 건 아니고요?"



주시윤의 말을 들은 힐데의 눈빛이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





 


주시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힐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기에 몰라야 정상인 사실을 주시윤이 알고 있다는 것은, 배후에 누군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단서가 된다.


흔들리던 눈빛은 당황과 사명감 사이에서 가야 할 길을 잃고 갈팡잘팡했다. 힐데의 말투가 다시 거칠어졌다.



"너. 그 침식체와 조우하고 나서 뭘 본거지?"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기절했으니까요."



힐데는 주시윤을 구석에 몰아넣다시피 하며 윽박질렀다. 주시윤은 항상 그래왔듯 대수롭지 않게 힐데에게 대꾸했다.



"거짓말 말고 말해. 네가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을 리가 없어. 필시 놈이 네게 뭔가를 보여줬겠지. 그 보여준 것이 가짜 기억일지 어떻게 알고 그런걸 믿느냐?"


"그래서 제가 스승님이 말씀해주신 것 너머에 뭔가 더 있는건 아니냐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짜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

 


힐데는 주시윤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이런 흐름대로라면 자신이 배후에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주시윤에게 이실직고하는 셈이나 다름 없다.


한 방 먹었다.


 

"하하. 좋아요. 기왕 말하게 된 거, 다 말씀드리죠 뭐." 



이번에도 주시윤이 먼저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녀에게 무엇 하나라도 끌어내기 위해서, 계속 자신 쪽에서 패를 공개해가며 힐데에게 답을 종용한다. 


주시윤은 자신이 침식체에게서 전해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 이상한 침식체를 통해 제가 본 건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그 당시의 기억이었어요."


"뭐, 라고...?"


"제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 말이죠.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과거와는 살짝 달랐지만요. 그 기억 속에 스승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렇다면 뭐가 가짜인 걸까요? 스승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셨던 것? 아니면 제가 새로 떠올린 것? 그렇게나 찾아 헤맨 기억들이 이토록 절 혼란스럽게 하니까, 요 근래 머리가 너무나 아팠습니다."


"......"


"이제 다시 묻죠.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말해주실래요?"



치후유는 그 때 그렇게 말했다. 먼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그 말대로 굵직한 패는 대부분 드러냈다. 


주시윤은 눈을 꼿꼿이 뜬 채, 힐데의 눈을 응시하였다. 그녀가 진실을 말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입을 열었다.


그 성과가 주시윤이 바라는 대로 드러날 것인지, 기대를 배신할 것인지, 주시윤은 힐데가 후자만큼은 선택하지 않기를 빌었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더냐?"



몇 십 초 가량의 침묵을 깨고 힐데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주시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최악의 대답이었다.



"내가 네 부모를 죽인 쓰레기일지언정, 널 키워오면서 한 순간도 네게 거짓되게 대한 적은 없었어. 네 부모님을 불미스럽게 죽여야 했던 건 나다. 그러니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날 믿어라. 그리고 때가 되면..."

 

“결국 항상 이런 식이네요. 똑같은 대답."



도돌이표였다. 주시윤은 힐데의 말을 끊어버렸다.


더는 듣고싶지 않았다. 


힐데는 몇 번이나 그가 품고 있던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몇 번이나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는 것을 거부했다.


실로, 정말로, 처음으로 주시윤은 그의 스승이자 보호자인 힐데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저는 제가 어떤 존재인지, 부모님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은데도, 부모님이 그리워 사무쳐도 참아가면서 스승님을 믿어 왔어요. 


그래서 진심을 부딪친다면 스승님께서도 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스승님을 믿었던 만큼 스승님께선 절 믿어주시지 않나 보네요.”


"그 기억은 틀렸다. 내가 말해준 게 맞아. 나쁜건 나고 너는 아무 잘못 없다고. 내가 말한 것이라면 뭐든 믿고 따르던 네가, 무엇을 봤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냐?"



정말 마지막이다. 주시윤은 이것까지 말하진 않으려 했는데 하면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전부 힐데에게 공개해 보였다.



"많은 것을 봤죠. 그 침식체를 통해 떠올린 기억 말고도요. 어차피 말하게 된 거. 끝까지 다 말해드리죠.


전 일본에 온 후 계속 악몽을 꾸기 시작했어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자꾸만 저를 향해 속삭이더군요. 고귀한 피를 가졌다니, 속박을 깨고 자유를 찾으라니. 그 꿈속에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요."

 

"꿈이라고? 그게 사실이냐!?"



힐데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듯 그녀의 작은 체구가 주시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단순히 침식체에 의한 돌발 사건 정도로만 여겼으나, 그런 가벼운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이 힐데의 안을 가득 채워갔다.


힐데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 꿈이란 것은 주시윤만이 꿀 수 있는 종류라는 점도 알았다.


어찌 모르겠는가.


주시윤이 꾼다는 꿈은, 봉인되어 있는 '뱀'의 전조와도 같은 현상이니까.


뱀이 주시윤을 노리고 바깥 세상에 손을 대려고 한다는 의미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힐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불안함은 행동할 것을 자꾸만 촉구했다.



"...안되겠어. 처음부터 이곳에 널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수연에게 연락해둘 테니 그라운드 원으로 돌아가거라. 내일 당장."


"저 말 아직 다 안끝났습니다. 이러시긴가요? 스승님?"


"위험하단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받아치려던 주시윤에게 힐데는 그녀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네게 이 땅은... 놈이 봉인되어 있는 이곳은... 위험하단 말이다. 꿈까지 꿨다면 더더욱! 그건 네 목숨과도 직결된 현상이야.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되는 일이란 말이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내가 잘못 판단했어."



힐데는 주시윤의 양 어깨를 붙들고 새겨 들으라는 듯이 강하게 말했다.



"잘 기억해둬라. 주시윤. 네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이 무엇이건, 알게 되는 순간 네게 하나도 도움 될 것이 없다. 이 이상의 호기심은 네 목숨까지 앗아가고 말거야."



제자를 생각한 스승의 애타는 조언이었지만, 주시윤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만이 모든 정보를 알고, 제자인 자신에게는 어떤 정보도 풀어주지 않는 힐데의 태도가 더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럴려고 자신은 패를 전부 공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일방적인 선언 따위를 듣기 위해서 속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만하라는 만류 따위를 듣기 위해서, 이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잃고 말게 될거라고요... 누구에게요? 클리포트 인자 사용자는 죽이겠다는 입버릇처럼, 설마 절 죽이시겠다는 의사는 아니겠죠?"



주시윤은 약간의 독기를 말에 담아냈다. 비릿하면서 슬픈 미소가 얼굴에 내걸렸다.


힐데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이야기를 단박에 잘라냈다.



"...긴 말 않겠다. 내일 당장 그라운드 원으로 돌아가. 스승으로써 명령이다."

 

"아뇨.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힐데는 아연실색하며 되물었다.



"그 날 이후로 줄곧 찾아 헤맸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왜 죽어야 했는지, 스승님과 저희 부모님은 어떤 사이였는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과거를 찾아 지금까지 발버둥 쳐 왔어요. 실마리가 잡힌 이상,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주시윤. 내 말 들어. 제발."

 

"지금껏 충분히 들어왔잖습니까? 알려주신 건 전부 익혔고, 스승님 말씀하셨던 것들 한 차례도 거스른 적이 없어요. 다 스승님의 큰 뜻이 있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에요."


"주시윤!!!!"

 

"한번쯤은!"



주시윤의 언성이 처음으로 살짝 높아졌다. 단호한 어조에 방 내부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는 듯 했다.


어쩌면, 힐데가 주시윤과 함께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듣는 고함.



"한번쯤은, 그렇게 고분고분 살아왔다면 반항도 들어주셔야죠."



하지만 힐데의 입장은 완고했다. 여전히 그녀는 주시윤을 강제로 돌려보내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허락할 수 없어. 스승으로써든, 널 쭉 키워온 입장에서든. 아까도 분명히 말했다. 이 이상 알려고 해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고. 네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박살나버린 후회의 잔해물 뿐이야, 그만 멈춰."

 

"그런 식으로, 언제까지 마냥 숨기려 드시는 건가요? 미나 양에게는 무엇이든 하나라도 알려주려 하시고, 저에게는 숨기기에 급급하시다니. 스승님께서는 제자를 차등적으로 대하시는 분이셨나요?"



주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스승님께선 도대체 언제까지 모든 것들을 숨기시려는 걸까.


반감이 들다 못해 이젠 야속할 지경이었다.


힐데가 지금껏 보여준 선한 모습들과, 매몰찬 모습들이 서로 충돌하며 산산히 부숴져간다.


주시윤과 힐데 사이에 그려진, 관계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그림도 점점 찢어져간다.


걸어 잠구기만 할 뿐 소통의 여지를 보이지 않으려 하는 힐데에게 주시윤은 처음으로 서운한 감정을 내비췄다.


 

"당장 클리포트 인자만 봐도 그렇잖아요? 제가 가진 힘. 쓰지 말라고 하셔서 안 썼습니다. 하지만 미나 양은 멋대로 쓰게 내버려두셨죠. 같은 힘인데, 왜 저는 막으시면서 미나 양은 방임하시는 거죠? 


너와 신입은 다르니까, 라는 같잖은 이유인가요? 다르다 해도 뭐가 다른지, 설명이라도 해주셨으면 이해라도 할텐데 그런것 하나 없으셨잖아요?"


“그건... 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널 지키려는 게다. 그 저주받은 힘에 두 번 다시 엮이지 않도록 막으려는 거야. 널 억압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억압할 의도가 없으셨다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클리포트 인자를 쓴다면 네 부모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거다.' 라니. 힘을 쓰면 널 죽이겠다는 말을? 그런 태도를 보이시는데도 제가 스승님을.... 언제까지나 믿고 따를 것을 원하시는 건가요?”


“그만!!!!!”


"도대체 뭘 숨기고 계시길래 이리 추해지면서까지 꽁꽁 싸매려 드는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번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아요."



주시윤의 선언에 힐데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신용 단말기를 켜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수연. 나다. 수송기 보내서 내일 시윤이 복귀시켜."


“...스승님!!!!”



묵묵부답과 진술 회피로 일관하다가 이제는 아예 강제로 치워버리겠다?


그렇게는 못 가지. 다시 한 번, 주시윤이 고함을 내질렀다.



"스승으로써 명령이다! 내일 당장. 끊겠다."



힐데는 주시윤이 성을 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통화를 마쳤다. 한겨울 추위만큼이나 차가움이 서린 눈동자가 주시윤을 응시했다.


제자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 시선은 오히려 결의로 굳어지다 못해 독선적이리만치 느껴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 아빠와 엄마가 시킨 일이다. 널 지키라고.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나야말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돌아가."


"큭...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렇게 저를 꽁꽁 싸메고 돌으라 하셨다고요? 돌아가시기 전에?"



듣다 못해 주시윤은 어이가 없어서 비릿하게 웃었다.


계속 힐데를 찌를 수록 무언가가 떨어지긴 했으나, 그것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충격적인 소식들 뿐이었다.



"적당히 하세요 스승님. 세상에 자식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숨기려는 부모가 어딨다고 그러시죠?"


"말했을텐데. 네 부모와의 마지막을 함께한건 나라고. 그 아이들의 유지를 이어 널 지키고 있을 뿐이야. 다른 의도는 없어!"



감추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걱정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걸 무릅쓰고 꺼낸 이야기들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도 솔직하게 대응해줄 것이라고 믿어서. 스승으로써, 보호자로써의 선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힐데의 대답은 그 모든 기대를 배신했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정보를 취사선택하며, 그 모든 행동의 동기가 나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알 수 없는 말 뿐이다.


와닿지 않는 말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힐데의 말 또한 주시윤에게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게 어딜봐서... 어딜봐서, 지키는 겁니까."



주시윤은 서운했다.


서운함이 이제는 힐데를 향한 분노로 점화되기 시작했다.


순한 인상을 자아내던 얼굴은 어디가고, 화와 서운함으로 잔뜩 구겨진 얼굴이 나타났다.


더는 참지 못하고 주시윤은 힐데에게 소리쳤다.



"부모님께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최소한이라도 알고 있는게 자식 된 도리 아닌가요? 스승님은 그런 것마저 져버리시겠다고요? 대체 그 빌어먹을 날의 진실이 뭐길래!!"


"그깟 도리 따위보다 네 목숨이 더 중요해!!!"



힐데도 지지 않고 주시윤에게 맞서 고함을 쳤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급격히 끌어올려지며 찢어졌다.



"한과 연화에게 부탁받은 네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걸 위해서 네가 그 진실에 닿지 않게 해왔을 뿐이다. 그게 내 방식이었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네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니까, 내 입버릇처럼 내 손으로 널 죽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것만큼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절대로!!"


"...."


"마지막 경고다. 이 이상 알려들지 말고 거기서 관심을 끊어.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러니 시윤아. 제발-"


"....하하. 전 스승님께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뭔가를 알려주실 줄 알았지만,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네요. 패를 다 내보여도, 속마음을 전부 내보여도, 돌아오는 이야기는 항상 그거죠. 널 지키기 위해서란다. 라니."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면서, 지켜주겠다는 말이 부모님의 유지라는 말은 도대체 왜 한단 말인가?


주시윤은 힐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평안 대신 공허함이 자리했고, 입가에는 미소 대신 음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힐데와 자신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더는 의견의 조율 같은건 바랄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왜 알아주지 못하냐는 분노와 애절함 뿐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생각이 없진 않아요. 스승님이 무엇을 그렇게 숨기시고 있는지, 꼭 찾아내고 말겁니다."


"주시윤."


"아무리 막아내신다 할지라도, 어떤 수단을 써서든요. 마음에 안드신다면 항상 말하시는 것처럼 죽이시던지요. 죽이실거면 지금 뿐입니다."


"주시윤!!!!!"



쾅!!


힐데는 언성을 높이며 옆에 있는 벽을 내리쳤다. 그녀의 분노가 벽을 타고 온 방을 울려댔다.


불만이 있다면 죽이라니. 자신이 손수 키워온 아이에게서 도저히 들을 수 없을 법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힐데는 크게 화를 냈다. 



"말 조심해. 죽인다니 뭐니, 그딴 말 한번만 더 해봐라. 그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느냐!!"


"그게 그렇게 문제라면!!!!!"



쾅!


주시윤도 마찬가지로 언성을 높이며 침대의 틀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분노의 화산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글거렸다. 


더는 힐데의 사정이니 뭐니, 그런 것들은 고려 선상에 있지 못했다. 이렇게나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려 한 자신을 매몰차게 내친 힐데의 잘못이다.


더 큰 분노가 마그마처럼 주시윤의 이성을 덮어버렸다.



"자식이 부모님 이야기 좀 알겠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라면.... 그깟 제자 타이틀, 필요 없습니다."


"....."


"더 할 말 없으시면 그만 가주시죠. '스승님'."



주시윤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힐데를 호칭으로 불렀다. 분노를 쏟아내기 전 최소한의 예우였다. 마지막 호칭이었다.


같이 걸어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간다. 그 모든 기억들이 눈 앞에 서 있는 냉정한 여신에게로 날아가 깨져 흩뿌려진다.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마음 문을 열고 힐데와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그것이 너무나 불만스럽고, 원통해서, 주시윤은 제자 타이틀까지 집어던지며 힐데에게 반감을 표했다. 


주시윤은 더 이상 힐데를 의지할 수 없었다.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제자를 차등적으로 대하고, 제자의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려는 보호자 같은건.


그런 보호자 같은건, 필요 없었다.



"....."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전의 장난기 있고 단란했던 분위기는 이제 없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던 감정도 없다.


서로 생각해 뒀던 말들은 분노라는 함수로 인해 원망과 깎아내리는 말들로 치환되어 갔다.


한 차례 격한 태풍이 방 안을 쓸고 지나갔다. 탄환이 다 떨어진 감정의 총포가 발포를 멈추고, 잔뜩 뜨거워진 총열을 냉각시키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쉬어라. 내일 돌아가기 전까지."



주시윤은 내일 강제로 자신을 보내려는 힐데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힐데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하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키며 방을 떠나야 했다.


힐데도 알고는 있었다.


주시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시윤의 마음이 얼마나 애탈지,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알려줄 수 없었다.


알려주는 일만큼은 절대로,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할 수 없었다.


주시윤이 찾는 진실이 그 스스로의 목을 졸라 죽이게 되리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를 상처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한때 제자였던 이들의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 대가가 설령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방을 나서며 힐데는 수도 없이 주시윤을 향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이런 말 밖에 하지 못하는 날 원망하라고.


하지만 네가 얼마나 아프더라도, 얼마나 힘들더라도,


널 반드시 지키고 말 것이라고.


마음 속 한 켠에서 눈물 섞인 다짐을 하며 힐데는 갈갈이 찢어진 마음을 억지로 기우려고 발버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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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때문에 자주 못쓰고 그나마도 읽기 힘들게 자꾸 길게 써서 미안할 따름이다.


내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이번 화였음. 


원작의 주시윤은 모든 것을 알고 힐데를 용서할 이유를 찾아 헤맸지만, 거기서 좀 띠용해서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


만약 주시윤이 뒷사정을 모르고 있었다면? 몰라야 했기 때문에 힐데가 숨기고 있는 거라면? 그러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브금 제목처럼 진실의 적이 된 스승을 마주한 주시윤, 그리고 주시윤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적이 되려는 힐데.


앞으로 주시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선택으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그건 차차 지켜봐주길 바래.


항상 읽어주는 게이들에게 너무나 고맙다. 너희가 아니면 이런 똥글쟁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