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스한 빛을 내는 거리의 가로등과 상점가의 조명이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어둑어둑해야 할 저녁을 밝게 비춘다.
하지만 조명보다, 하늘에 꽉차게 뜬 보름달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것은
한 손엔 선물을, 한 손은 부모님의 손을 쥐고 웃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였다.
아이들이 순수한 미소로 온 세상을 수놓을 수 있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과
선물때문만이 아니라 오늘이 상상만으로도 유쾌해지는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날티나게 풀어헤친 셔츠 앞섶에서
느껴지는 껄렁껄렁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이
스쳐지나갈때마다 미소띈 얼굴로 행복을 빌어주었다.
번화가에서 멀어질 수록 가로등과 조명도 뜸해졌고, 가족과 함께
웃고 있는 아이들도 덩달아 자취를 감춤에 로이의 표정은 평소대로
굳어져 갔다. 물론 그의 목적지인 기관에 가까워 진다는 이유도
무시할 순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회인들이 일터와 근접할 수록
표정이 썩고 힘이 빠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니까.
며칠 전, 갑작스레 기관의 요원들에게 강제로 휴가를 부여한
제멋대로에 왈가닥인 기관장 아가씨덕에 로이는 훈련도 임무도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좀이 쑤시고 마음이 영
답답한 탓에 휴식이 휴식이 아니었다. 차라리 바빴으면 더 나았을까.
크리스마스같은 대 명절에 혼자 일없이 집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원래 따로 연락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있었다해도 최근의 격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 졌을 가능성이 높았기때문에 평소의 크리스마스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제는 너무 할 게 없어 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더니
들려온 건 그 시건방진 수녀꼬맹이의 목소리였다. 요즘은 그런
자격도 없는 꼬맹이한테 상담역을 맡기나?
"할 일 없어서 좋으시겠어, 아주. 정 따분해 죽겠으면 좋아하는 거나
만나러 가던가."
...하지만 그 꼬맹이가 예전에도 그렇고, 제법 날카로운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이는 지금 기관에 가고 있었다. 며칠동안 먼지가 쌓였을테니,
정식 출근 전에 깨끗하게 청소나 해둘 생각이었다.
청소를 하고 있으면 맘이 편해졌고, 깨끗한 것을 볼 때 느끼는
기쁨은 어디 비할 바가 없었다.
로이는 슬슬 눈 앞에 보이는 기관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생각보다 청소할 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내적 아쉬움을 삼키고 먼지를 털던 로이의 귀에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달그락, 하는 소리가 자꾸만 들렸다.
로이는 숨을 죽이고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소리는 기관의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엘리자베스가
티타임을 즐기곤 하는 그 장소. 기관의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차나 쿠키에 독을 타려는 암살자가 잠입한 것은 아닐까?
로이는 쇠사슬을 팔에 감고 문을 벌컥 열었다.
"어..?"
"뭐죠?"
로이가 마주한 건 예상했던 암살자가 아니라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차려 입고 요염하게 다리를 꼰 채 와인글라스를 들고 있는, 그의
제멋대로에 왈가닥인 상사, 엘리자베스 팬드래건이었다.
"아니.. 난 그 뭐냐, 침입자인줄 알고.."
"제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고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힐책하는 말투와는 다르게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의 그녀.
로이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난감했다.
평소에 본 적 없던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엘리자베스의 미모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원래도 예쁜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녀의 성격에 질려버린 로이를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
"뭐, 뭐하고 있냐 여기서..?"
"저야 기관이 제 집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죠."
"혼자서?"
"그럼 누구와 함께 할까요? 페리어? 모건?"
농담조로 말 끝에 나지막이 웃음짓는 엘리자베스를 차마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로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하마터면 '나는 어때?'라고 물을 뻔 했다.
안 되지, 또 어떤 개무시를 당하려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온 김에 한 잔 어때요, 그 귀여운 앞치마는 벗어두고."
아차.
그는 먼지 털려고 두른 앞치마를 재빨리 벗어 던졌다. 오늘따라
별 것 아닌 일에도 이상하게 행동이 과장되고, 긴장됐다.
로이가 맞은 편에 앉자 엘리자베스는 그윽하게 웃으며 아름다운
선홍빛깔 와인이 찰랑거리는 잔을 로이에게 건넸다.
이렇게 차분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다름 아닌 로이에게 짓다니.
그녀는 적잖이 취한 게 분명했다.
"고맙네."
"천만의 말씀을. 건배 할까요?"
엘리자베스는 귀족의 품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동작으로 우아하게 잔을
들어올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예쁘고 하얀 겨드랑이가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바람에 로이는 숙맥처럼 벌벌떨며 겨우
잔을 맞부딪혔다.
쨍,하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로이는 와인을 들이켰다.
전혀 신사답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어째선지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는 대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커어.. 와인 맛 정말 좋은데?"
"후후. 물벼룩 주제에 뭘 좀 아시는 군요."
엘리자베스는 와인을 즐기는 교본이 있다면 교보재로 삼을 정도의
우아함을 뽐내며 와인을 홀짝여 로이를 주눅들게 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왜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까.
"그래서, 휴가중에 기관엔 무슨일로 오셨죠?"
엘리자베스가 턱을 괸 채 꼬았던 다리의 방향을 바꾸며 물었다.
"어, 할 게 너무 없어서 기관이나 청소하려고 왔는데."
"아하하, 당신 답네요."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린 그녀를 보고 이제야 그녀답다 싶으면서도
그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걸 보니 역시 뭔가 다르다
싶었다. 아니면 지금의 로이가 평소같지 않은지도.
"그런데 너는 여기서 혼자 왜 와인이나 마시고 있는거야? 너정도면.."
로이는 황급히 말을 멈췄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을 크게 뜨며 말 꼬리를 잡았다.
"저 정도면? 저 정도면 뭐죠?"
"아니, 너 정도로 예쁘면 충분히 남자도 만나고.. 그럴 수 있지
않겠냐고. 크리스마스는 연인끼리 보내는, 뭐 로맨틱한 날이라잖냐."
늘 자신만만하던 기관장의 눈에 쓸쓸함이 감도는 것을 섬세한 남자
로이가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되니까요."
"왜?"
로이는 마음 한구석에서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질문을 이었다.
"마왕의 편린을 봉인하는 임무를 맡은 기관장이 사사로이 연애같은 가볍고 달콤한 것을 즐길 여유가 있을까요."
예상외의 정론에 로이는 뭐라 답해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실 뿐. 어째선지 첫 모금에선 느끼지
못 했던 쓴 맛이 혀 밑에 감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별안간 격정적인 어조로 탁자를 내리쳐 로이는
들고 있는 잔을 거의 놓칠 뻔 했고, 잔에서 튀어나간 와인은
식탁보에 루비 빛깔의 얼룩을 남겼다. 저거 빨리 빼야 되는데.
"저도 한창때의 소녀라구요. 연애하고 싶고, 놀러다니고 싶고.."
방금까지 보여왔던 차분함과 우아함은 온데간데 없고, 그녀는
흘러넘치는 감정에 겨워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 슬슬 취기가 오르는 듯 했다. 로이는 슬며시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 그녀가 더이상의 흑역사를 만들기 전에 침실에 데려가
재울 요량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물벼룩, 당신은 연애세포가 다 죽었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당신도 나름 매력있고 괜찮은 남잔데 왜 연애를 안하느냐고
물은 거에요. 아니면, 예쁘장하게 생긴 게 설마 남자를.."
"아니 이 여자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니거든? 나도 연애 하고 싶어!"
"그럼 하죠."
로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서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죠. 일일 연인, 같은 느낌으로."
뭐야, 일일인가..
황당하고 제멋대로인 제안이 일일에 그치는게 어째서 아쉬운걸까.
"뭔 소리야, 홍차폭탄!"
엘리자베스의 가느다랗고 예쁜 검지손가락이 로이의 입술에
닿는다. 고운 손에서 나는 향기가 로이의 코를 간질인다.
"오늘은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로이라고 부를테니."
"리,리즈?"
"네, 그렇게요."
엘리자베스, 아니 리즈는 화사하게 웃어보였고 로이의 무방비한
심장은 그대로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오늘처럼 그녀가 귀여워
보인 적이 없었다. 드레스때문일까? 아니면 홀짝거린 와인때문에?
와인.
그렇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취한 상태일 것이다.
설레긴 했지만, 취한 사람을 상대로 연인놀이를 할 만큼 그는
쓰레기가 아니었다.
"홍ㅊ... 아니, 리즈. 너 지금 취했어. 들어가서 자."
"대담하시네요, 로이. 연인이 되자마자 동침을 권유하시다니."
"무, 무슨 동침이야? 너 진짜 만취했구나?"
"무슨 말씀을, 저는 멀쩡하답니다."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워 로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딘가 불안한 발걸음, 휘청거리는 엘리자베스.
"로이, 어쩌면..."
엘리자베스가 오늘 중 가장 가깝게 있었고 그녀의 향기가 마치
그의 바로 옆에 서있는 것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로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어쩌면 좀 취했을지도.."
엘리자베스가 균형을 잃고 로이의 품으로 픽 쓰러졌지만 가까스로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애석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풀사운드로 들려줬을테지만 만취상태라 기억을 못할거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이였다.
그녀는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상태였음에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운 몸을 가진 한창때의 처녀가 그토록 무거운 책임과
지위에 눌려 있다니. 로이는 엘리자베스를 안쓰럽게 바라본 후
공주님안기로 들어올려 침실로 향했다.
엘리자베스의 침실은, 아니 여자의 침실에 처음 들어온 로이는
바짝긴장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한눈에 화사하고 산뜻한
느낌의 벽지와 가구들이 여자의 방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정리를 안 하고 냄새나는 여자방도 많다던데, 다행히 엘리자베스는
그런 여자는 아닌 듯 했다.
로이는 품에 안겨 쌕쌕거리는 엘리자베스를 조심스레 침대위에 눕혔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자 했을 뿐인데, 별안간 엘리자베스의 팔이 그를 잡아당겨
침대에 끌어들였고 기습에 당황한 로이는 속절 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로이의 얼굴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가깝게 마주본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만큼.
와인향이 침구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와 섞여 로이를 설레게 했다.
침대에는 엘리자베스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 했다.
엘리자베스의 녹색 눈동자에 벙쪄있는 자신이 비쳐보였다.
"..안 취했었냐?"
"저 정도 되는 사람이 고작 와인 몇잔으로 취할리 없죠."
"완전히 당했네."
"후후."
엘리자베스의 웃음이 그의 마음을 또 뒤흔들었다. 어쩌면 취기가
도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로이 쪽일지도 모른다.
"제 침대에 누운 첫 남자가 되신 걸 영광으로 생각하시죠, 로이."
"켁.. 뭐라고 반응해야 할 지 감도 안 잡힌다."
"로맨틱하지 못 하시네요. 손등에 입맞추면서 '고맙습니다, 리즈.' 하면 되는걸."
로이는 엘리자베스가 내민 손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최고급악기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예쁜 목소리를 속삭이는,
조금 도톰하면서도 건강한 혈색을 띈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종착지이기라도 한 것 처럼.
오늘 처럼 그녀가 아름다워보인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의 마력일까, 와인이 빚어낸 마법일까.
로이는 조곤조곤 뭔가를 말하고 있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훅끼쳐오는 와인 향과 향수 냄새,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한 체온이 그를 번쩍 정신들게 했다.
로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당황하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소녀의 입술을 빼앗은 것 치고 굉장히 무례한 애프터네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눈을 반쯤 뜨고 말했다.
"미,미안! 나도 모르게.."
"제가 당신의 충동을 불러일으킬만큼 매력적이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다지 화난것같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입꼬리의 씰룩거림, 붉어진 뺨이 그의 충동을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이 이상 더 어떤 행동을 보여야 옳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와의 입맞춤은 이런 느낌이군요."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연인과의 입맞춤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나요?"
엘리자베스는 옆으로 누운 채 도발과 수줍음이 섞인 미소를 보내왔다.
로이의 평정심은 그 미소에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어느새 그녀의 양 팔을 붙들고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된 로이는
엘리자베스의 들숨과 날숨마다 오르내리는 젖가슴에,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당찬 눈동자와 대비되게 붉게 물든 뺨에,
가볍게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풍기는 은은한 샴푸냄새에 매혹되어 버렸다.
로이는 자신이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남자였던가 하고 한탄했다.
애초에 뭘할 생각으로 이런 포지션을 취한거지?
그 스스로도 납득할만한 대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본능. 그래, 이건 본능이었다.
"제법 대담한 행동도 할 줄 아시네요. 다시 봤어요."
엘리자베스는 긴장감과 다소의 기대가 묻어나는 눈빛을 보내며
로이를 올려다 보았지만, 여전히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동공에서
드러나는 불안감을 느끼고 한숨을 쉬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올려
로이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살짝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제가 이 이상 얼마나 더 의사표시를 해야 하나요?"
로이를 속박하던 이성이라는 쇠사슬이 당돌한 아가씨의 입맞춤
덕에 완전히 끊어졌고 두번의 감질나던 입맞춤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듯 그는 공격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엘리자베스도
열렬히 화답하며 두 사람의 첫키스는 본능에 몸을 맡긴채
크리스마스의 밤은 깊어져갔다.
얼마간의 시간을 서로의 입술과 혀를 탐닉하다, 로이의 손이
엘리자베스의 가슴에, 엘리자베스의 손이 로이의 허리에 닿고
그녀는 낯선 감각에 짜릿함을 느껴 아찔한 숨결을 로이의 귓가에 뱉었다.
로이는 늘 그를 괴롭히던 시덥잖은 걱정과 기관장에 대한 사소한 불만따윈
모두 뒤로 한 채 눈 앞의 매력적인 그녀에게만 온전히 집중했다.
초보 연인들에겐 '그래야만 하는 분위기' 가 온다.
비록 크리스마스가 만들어준 일일 연인이었지만, 그들에겐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그는 그녀를 백배정도는 아름답고
차분하게 보이게 만들어 준 마법의 이브닝드레스 끈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귀여운 반응을 연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로이는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울 여성을 배려하기 위해,
스탠드에 손을 뻗어 조명을 끄려 했다.
"불 끄지 마세요!"
날카로운 비명.
늘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불안감이 묻어나온다.
로이는 아차 싶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둠을 싫어했다. 어둠속에서 마주한
숙적들에게 떨었던 자신이 싫었고, 혼자 남겨진 그날의 적막이 두려웠다.
시간이 흘러 성숙해지고 강해진 뒤에도 어둠은 그녀를 괴롭혔다.
..하물며 어둠속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버넷 경도 이제는 없었다.
달아오르던 달콤하고 뜨거운 분위기는 차게 식었다.
결국 어둠에 대한 공포를 끝내 이겨내지 못한게 좋았던 분위기도
전부 그르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걱정하지마, 리즈. 내가 옆에 있을게."
불안한 분위기를 깨는 로이의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그의
따뜻한 손길이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늘 그녀가 버넷 경을 겹쳐봤던,
한참 모자란 그의 혈육이, 부족한 점만 눈에 보이고 실망만 시켰던
또 다른 버넷이 그녀에게 새로운 빛이 되어주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로이가 질식할 정도로 세게 그를 껴안았다.
로이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끔 한동안 그녀를 안은 채 어루만졌다.
"그런데 여자들은 보통 부끄러워서 불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네. 로이는 여자 경험이 아~주 많으신가 보네요. 잘났어."
"아니..! 일반론적인거라고! 미치겠네."
다시금 녹아내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그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용기의 붉은 묘약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애정을 듬뿍 담아 로이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향기로운 와인이 그녀의 입에서 그의 입으로 찰랑이며 흘러갔고
키스를 마친 혀와 혀사이에서 찐득한 실이 늘어졌다.
"자.. 그럼 잘나신 기사님, 계속 이어서 해볼까요?"
로이는 다시 엘리자베스의 몸을 더듬으며 덤벼들었고, 그녀는
그녀만의 기사, 로이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메리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