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로 관계없지만 https://arca.live/b/counterside/41339592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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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해가 가고 새 해가 왔다.
누군가에겐 저번해에 못한 금연을, 다이어트를, 나태한 생활의
청산을 재차 시작하는 분기점같은 하루겠지만, 또 누군가에겐
먹기싫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는 하루에 불과할 것이다.
느지막이 떠오른 겨울 해가 중천에 자리잡아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 늦은 아침까지도 눈에 수면안대를 착용하고
이불을 돌돌 싸맨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유미나는 후자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오늘만큼은 평소의 특별할 것 없는 새해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얼마 전 교제를 시작한 남자친구와의 신년데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가 당직만 아니었어도 같이 해를 넘겼을테지만 일때문인걸
어쩌겠는가, 그가 푹 쉬고 나올수 있게끔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덕에 그녀도 이렇게 늦잠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녀는 안대를 벗고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더듬거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신입. 아직도 자고 있는 거냐. 냉큼 튀어나와라. 간만에 소대장이
맛있는 거 사주마."
"맛있는 거...?
유미나는 공짜 음식에 입맛을 다시며 빛의 속도로 외출준비를
완료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4시니까 여유는 충분했다.
새해는 뭔가 다르긴 하구나. 그 소대장에게서 먼저 연락도 오고.
유미나는 목도리를 동여매고 들뜬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
간밤에 내린 눈을 기분좋게 밟으며 걷다보니 저 멀리 눈처럼
새하얀 은발의 꼬맹이 소대장이 보였다. 그녀도 금연을 새해목표로
잡았는지 늘 입에 물고 있던 담배대신 껌을 씹고 있었는데 표정이
썩 유쾌해보이진 않았다.
"소대장~ 새해복 많이 받아! 오래 기다렸어?"
"아, 신입. 새해복 많이 받도록."
"왠일이야? 먼저 밥을 사주겠다고 다 하시고. 에헤헤."
"자주 사주는 편 아니냐?"
힐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비싼거 먹으려고 할때면 미안..하다 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지던걸
물고 늘어지기에는 금연 1일차의 까칠한 표정이 너무 매서웠다.
이런 날은 그냥 적당히 비위 맞춰주는 게 상책이다.
"아 그렇지 참. 어.. 근데 우리 둘만 먹어?"
"그럴리가. 주시윤은 커피사러갔다."
"엑, 선배 어제 당직섰잖아?"
"그 나이땐 밤새도 커피 한 잔이면 멀쩡해야지. 나땐 말이야..."
다행히 힐데가 꼰대보따리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직전에
주시윤이 커피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유미나와 주시윤은 소대장몰래 애정이 담긴 눈빛 신호를 나눴다.
힐데는 주시윤이 건넨 김이 모락모락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는
왜 이렇게 하나도 안 단걸 사왔냐며 투덜거렸다.
"스승님. 아메리카노는 원래 그런겁니다."
"됐다. 역시 나는 믹스커피가 좋아. 너네는 이빨 안시리냐?"
힐데는 이렇게 추운 날에 아이스를 홀짝이는 젊은 것들을
이해가 안 돤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하, 저희는 얼죽아거든요."
"쯧,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힐데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불족발집이었다.
유미나는 당황스러웠다. 불족발이라니, 먹다보면 추해질 수 밖에
없는 음식아니던가. 이제 갓 사귄 커플이 먹기에는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유미나는 흘끗 주시윤의 눈치를 살폈으나, 주시윤은
당직 서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힘없는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왜 하필 불족발이야!
유미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힐데는 불족발집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내부는 제법 깔끔했고 들어서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식욕을 돋궜다.
다만 직원들은 빈말로라도 친절하다곤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뭐야 소대장? 여기 원래 접객이 이래?"
유미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힐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원랜 이렇지 않았느니 어쩌니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유미나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주문한
음식이 놓였다. 그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자태에 유미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와아, 진짜 맛있는데요? 좀 맵긴하지만."
"후우, 그렇지? 많이 먹어라."
유미나는 처음 마음먹었던 '조신하게 먹기' 라는 목표는 온데간데
없이 전투적으로 불족발을 포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주시윤은
한창 여자친구가 뭘 해도 예뻐보일 시기라 막국수를 비비며 그저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 볼 뿐이었다.
"와, 매운데 맛은 있다.. 좀 불친절하긴하지만 이 정도 맛이면.."
유미나가 새빨개진 입술을 휴지로 닦아내며 매움을 달래던 찰나,
프리덤라이더의 린 시엔과 아키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新年、明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新年快乐!"
방금까지 그렇게 불친절했던 점장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벌떡 일어나 아키와 린 시엔을 맞이하는 점장을 본 유미나는
어이가 없었다. 선택적 불친절은 뭐하는 짓이지?
힐데와 주시윤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펜릴소대는 식탁을
쾅 치며 일어났다.
"뭐, 뭡니까?"
"당신 장사 그렇게 하지마."
유미나는 살벌한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족발집 점장을 노려봤다.
"우리가 우리 돈내고 밥먹으러왔지 공짜 밥먹는거 아니잖아?
그런데 외국인한테는 친절하고 우리한텐 그딴식으로 대해?"
"그, 그건 외국인들이 우리 음식점을 찾아주니 고마워서.."
"..이 족발집이 휘청할때도 믿고 이용해준 나 같은 단골도 개무시하고
입만 살았군."
힐데도 조그만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위압감을 뿜으며 조용히 쏘아붙였다. 점장은 뒷걸음질치다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힘들때 함께해준 손님을 이따위로 대하는 매장이 어딨나?"
힐데는 배신감에 거의 칼까지 뽑을 기세였다. 주시윤은 힐데를
말릴 목적으로 그녀를 막아세운 뒤 점장에게 말했다.
"손님을 차별하는 모습이 영 보기 안 좋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잘 되는지 기대가 되네요."
주시윤은 정말 비꼬려는 의도 없이 꺼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흑막력과 당직 후 쉬지 못한
피곤함이 겹쳐 최종보스같은 분위기를 뽐냈다.
겁에 질려 주저앉아있는 점장을 뒤로 한 채 아키와 린 시엔에게
맛있게 먹으라는 눈짓을 한 유미나는 이미 밖으로 나가 있는
주시윤과 힐데에게 다가갔다.
힐데는 어딘가 굉장히 마음이 상해 있는 어린아이 같아 측은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별점이나 깎죠, 스승님."
".. 얼마 전에 5점달라면서 서비스주길래 다시 5점 해줬는데.."
"소대장, 그 족발집 진짜 좋아했구나."
"한 때 정말 잘나가고 고객들한테 잘하던 때가 있었다. 작년 이맘때
쯤이었는데.. 언젠간 다시 정신차리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힐데는 충격이 컸는지 먼저 돌아가버렸고, 예정보단 조금 이르지만
주시윤과의 데이트를 하게 된 유미나는 먼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선배? 괜찮아?"
"네, 사실 어제 당직중에 좀 졸았거든요. 끄떡 없습니다. 하하."
"피곤하면 좀 쉬어도 되는데."
"유혹이 대담하신데요 미나 양?"
"아니! 이건 그런 의미가, 유혹이 아니라!"
주시윤은 유미나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이렇게 입술을 빨갛게 칠하시고 쉬자고 하시길래 영락없이..."
"묻었으면 진작에 얘기해줘야지! 한참 걸어왔는데!!"
"예뻐서 화장품인줄 알았다니까요. 발색이 아주 잘 나와서."
유미나는 수치심에 주시윤의 팔뚝을 퍽퍽때렸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시윤은 비명도 못 지르고
그녀의 주먹을 받아내느라 고생했다.
"..선배, 나 먹는 거 보고 정떨어진거 아니지?"
"설마요. 너무 복스럽게 드셔서 제가 다 배불러지던데요."
"그 멘트 왠지 여자친구로선 아웃이라는 말 같은데.."
"절대 아닙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나왔으니 밥이나 먹으러.."
주시윤은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유미나가 그를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고꾸라질 뻔 했다.
"선배 역시 안 괜찮은거 같은데?"
"하하.. 역시 조금 쉬었다 가야 할 것 같기도.."
어떻게 말하겠는가. 사귀기로 한 그날 밤부터 설레서 잠을 못이뤘다고.
지금도 그녀 옆의 남자친구로 서있자니 긴장된다고.
주시윤은 그녀와 팔짱을 낀 자신의 팔에 전해져오는 체온과
가슴의 뭉클한 감촉에 온 몸이 찌르르 떨렸다. 역시 자극이 강해.
유미나는 주시윤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여기로 이끌고 오긴 했지만 막상 그를 들이려니
불안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속옷 널어둔 건 걷었나? 방 청소는 했었나? 냄새나진 않겠지?
에이, 모르겠다!
유미나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숨을 돌렸다.
"선배, 푹 쉬고 일어나."
"미안해요, 미나 양. 근사한 식당에서 근사한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유미나는 벌써 잠들기 직전으로 보이는 주시윤의 앞머리를 쓸었다.
"괜찮아, 앞으로 근사하게 데이트 할 일 많을텐데 뭐. 일어나면
라면 끓여줄게 선배."
"어라, 라면 먹고 가라는 건..."
주시윤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기에, 조금 붉게 물든
유미나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 이번 라면 얘기는, 조금은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