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사라졌다.


어느날 갑자기, 돌현듯,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장이 사라졌다.







**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동시에 위로 뻗어오르며 자정을 가리킨다. 

어둠이 온 세상의 시야를 뒤덮는 칠흑같은 시간.


그러나 오늘 그 시간은 코핀 컴퍼니의 사장실에서 불현히 흘러나온 한줄기의 빛에 그 형태를 잃어갔다.


불빛의 시발점은 한 소녀에게 있었다.


보드라운 검은 블라우스에 곧고 뻣뻣한 재질의 새빨간 자켓을 걸치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의 소녀. 

알트 소대의 서윤이었다.


그녀는 작은 손전등을 거꾸로 쥔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모습이 그저 심상치만은 않았다.


소녀의 꾸밈새는 평소와 같았지만, 마치 무언가에 홀려있는 사람처럼, 그녀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미친듯이 사장실의 서류들을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아니야..."


소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양손에 든 서류들을 확인하고 허공으로 내던졌다. 그리곤 곧장 서류를 다시 집고는 똑같은 행위를 몇분 동안이나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이어진 소녀의 그러한 기행을 저지한 것은 어둠 속으로부터 흘러나온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직도 언더그라운드 시절 손버릇을 못 버렸나보군요, 서윤양. 누가 허락도 없이 이곳을 뒤적거려도 된다고 했죠?"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서윤은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부사장님."


어느순간 어둠 속에 자리를 잡고 고요히 그녀를 관망하고 있던 이수연을 보며 서윤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안대로 얼굴의 반을 가렸음에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기분 나쁜 여성이라고, 서윤은 항상 그렇게 그녀를 생각해왔었다.


이수연은 팔짱을 낀 채, 사장실 한 켠의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 야밤에 무단 침입에, 기밀 서류 절도라니. 

이건 충분한 징계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이 건은 사장님께 제가 직접 전해드리도록 하죠. 그러니 일단 돌아가..."


"...마세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눈을 감으며 한심하다는 투로 자신를 나무라던 이수연의 말을 끊고 서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작은 응어리에 이수연은 응답하듯 눈을 반쯤 게슴츠레하게 뜨며 질문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거짓말하지 마시라고요."


이수연을, 아니 어쩌면 그녀의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퀭하게 풀려버린 눈빛으로 서윤은 대답했다.


평상시엔 윤활유를 덧칠한 것처럼 능글거리던 그녀의 목소리조차 지금만큼은 무겁게 그늘을 드리운 상태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이수연은 하고자 했던 말을 다시 입 안으로 감추고 그녀를 지긋이 응시했다.


어느 때보다도 섬뜩한 살기가 담긴 눈짓으로,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전해드리긴 누구한테 전해드린다는 거죠?" 서윤이 이수연에게 따지듯이 질문했다.


"..."


"그럼 대답해보세요. 이 사건을 들으셔야 할 사장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신지."



잘못을 나무랄 것은 자신쪽이었다는 듯, 그녀는 이수연에게 숨을 돌릴만한 잠깐의 틈조차도 주지 않았다.


"사장님께서 이 한달 동안 어디로 사라지신 건지."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녀의 냉소적인 목소리.


만약 그녀를 모르는 이들이 이 상황을 봤다면, 그녀의 어투에서 어떠한 감정의 미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연은 달랐다.


나름대로 서윤을 오래 지켜봐온 그녀에게 있어,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는 마치 태풍의 정가운데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의 요동치는 격류 속에서도 오히려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로 고요한 자태를 고집하는 태풍의 눈 속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서윤이 하고자하는 말은 간단명료했다.


지금 사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관리 감독하고, 지금과 같은 다툼을 중재해야 할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무려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렇게 잠깐의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둘 중 누구도 섣불리 입술을 떼지 못하던 도중, 땅에 눌러붙은 서늘한 침묵의 운을 떼며 이수연이 입을 열었다.







**



지금으로부터 약 한달전, 코핀컴퍼니의 사장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이유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는 어느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져있었다.


사건의 초기, 직원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워낙에 유별난 로봇, 유별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질 일은 없다며, 이 또한 그저 순간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사람들은 좀스런 미소와 함께 이 사건을 괜스레 웃어넘겼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그림자의 코빼기조차도 비치질 않았고, 그에 따라 직원들 사이에서도 점차 적잖은 소문이 맴돌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납치되셨다.' 라던가, '사장님이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떠나셨다.' 같은 소문들.


그럼에도 직원들은 여전히 그의 안위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그들에게 이 사건은 그저 하나의 가십거리였고, 유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들에게 사장의 행방에 대해 질문했을 때, 한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장님이 없어지셨다고요? 뭐 별일 있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장님인데."


어쩌면 그 대답을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에 가까웠다. 자신들의 사장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리 없다는 믿음.


항상 기행적인 행동을 일삼고 장난스런 태도를 유지했던 그였기에, 

직원들은 이번 사건 또한 그의 기행의 일부일 뿐이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결국 그 소문들은 단지 의심의 씨앗에 지나지 않았고, 그저 흘러가는 급류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의 입에서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씨앗이 싹을 피우는데에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3주가 지났다. 

그리고 사장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을 웃어넘겼던 직원들조차 어느순간부턴 슬슬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느 회사의 사장이 한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 동안 그 종적을 완전히 감추어버린단 말인가?


일개 바지 사장이나, 자신의 직무를 떠넘기는 무책임한 인간이라면 그런 경우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회사의 업무를 내팽개치고, 직원들의 관리를 나몰라라 할만큼의 말종이 아니라는 사실은 코핀컴퍼니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단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필시 사장에게 어떠한 일이 생겼다는 결론.


하지만 그들이 그 결과를 도출해냄에 이르렀어도, 평범한 회사의 사원들에게 그 이상을 조사할만한 능력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구심과 불안감을 품으면서도, 똑같은 일상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물론 이는 평범한 사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였다.


일반 사원들과는 별개로, 평소 사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몇몇 사원들은 이를 기점으로 그들의 의혹을 단단하게 할 충분한 증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마다 회사를 찾아오는 순백의 아이돌에게 그의 행방을 묻기도 했고,


회사의 부사장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고,


사장의 딸을 자청하는 구 시대의 유물에게 그의 마지막 행적과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기도 했으며,


혹시나 카운터 범죄가 연루되어 있을까 싶어 인연이 있는 국내 유일 카운터 범죄 수사팀에 실종 신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답변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를게 없었다.


그저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나마 건져올린 수확이 있다면 그의 마지막 모습.


사장이 애용해마지 않는 머신갑의 기체가 뽈뽈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바로 시그마가 보여준 단 10초 가량의 cctv 화면에 들어있던 모습 전부였고, 그 뒤로 아무리 시간을 돌려봐도 그가 방에서 나오는 걸 목격할 수는 없었다.











**





그 뒤로 일주일의 시간이 더 지났다.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진실을 찾던 사원들도 어느덧 하나둘씩 조사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단 한 명, 서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어쩌면 이 회사에서 그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구 세계의 관리자.

모든 것을 자신의 체스판 위에 올려놓으려하는 모략가.

그리고...자신의 과거를 찾아준 은인.


이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코핀컴퍼니의 사장이었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이 감정은 동경심이 아니다. 감사함도 아니며,


경외감 또한 아니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얼룩진, 어쩌면 격동이라는 그녀의 인생 그 자체를 대변하는 듯한 혼동의 감정. 그것이 그녀가 그녀의 사장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었다.


그녀조차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이 사장을 향해 품고 있는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다.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은 일그러졌음에도 끈끈히 그와 그녀의 사이를 연결해주는 실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있기에 회사에 남았고,


그가 있기에 리플레이서로 위장 잠입을 하기도 했다.


그가 있기에, 그가 종종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끝을 한 번쯤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젠 그가 없다.


어째서?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어디로? 그 장소 또한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직접 그의 행방을 찾아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르고, 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 진실을 직접 찾아볼 수 밖에 없다.


밝혀진 진실이 자신의 목을 조이는 족쇄가 되더라도, 그녀는 그 진실을 찾고자 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그간의 일을 생각했다.


가장 수상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그 해답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회사에서 사장의 정체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가장 수상한 장소는 어디일까.


이 또한 그 해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사장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그외의 기밀 서류들을 꽁꽁 싸매둔 그 장소.


그리고 사장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그 장소.


바로 사장실이었다.


모든 수사는 기초부터 시작해야한다 하지않았던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 혹은 증인과, 사건의 발생 장소. 


지금은 그 두 가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




"서윤양, 이전에도 아마 제가 똑같은 답변을 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특유의 조소가 깔린 듯한 냉랭한 어조로 이수연이 말했다.


"저는 모릅니다."


"또 거짓말을...!"


"아뇨,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잡음조차 들리지 않던 사무실에 이수연이 신고 있는 구두굽의 소리가 날카롭게 청각을 자극한다.


그녀는 이내 사장실의 책상에 하체를 올려놓더니 손으로 몇가지 서류들을 들쳐보며 말을 이어간다.


"제가 이런걸로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일말의 장난기가 존재할 틈마저 주지않은 묵직하고도 무감정한 목소리에 서윤은 잠시 숨을 삼켰다.


무엇이 그녀을 이리 만들었단 말인가.


"다른 기업들과의 미팅은 밀렸고, 사장님의 결재를 받아야하는 서류들은 쌓여만 가고 있죠."


이수연이 갸냘픈 손가락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서윤양에게 묻고 싶군요. 서윤양은 지금 사장님이 어디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순간 서윤의 말문이 막혀왔다. 


질문의 청자를 자신으로 뒤바꾼 것에서 오는 당황감과 그를 찾을 유일한 방법이 더 이상 없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


그녀의 반짝이는 푸르른 눈동자에 그러한 당황스러움이 비치자 이수연은 짤막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피차일반인 것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그리 말하며 이수연은 서윤이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던 서랍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들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이수연이 종잇장을 흘려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찾았다는 듯, 그녀는 서윤을 향해 손짓을 하며 그녀를 자신의 근처로 불러 들였다.


저것이 무엇일까.


의문을 품은 서윤이 조용히 이수연이 걸쳐 앉은 책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서윤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마치 그녀가 읽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서류를 읽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사장이 사라지기 1주일 전까지의 행방을 정리해놓은 목록이었다.


상점, 사원 기숙사, 공방, 카페 스트레가... 그 종이는 그가 갔던 모든 곳들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서윤은 종이에서 눈을 돌리고 이수연을 빤히 쳐다봤다.


눈밑에까지 진하게 자국을 남긴 다크서클과 화장으로도 지우지 못한 군데군데 남아있는 피부 트러블.


그녀의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자 서윤도 그제서야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이 여자도 진심이었구나.


모든 원인이 그녀에게 있을 거라 그녀를 의심했던 자신을 탓하며 서윤은 조심스레 서류를 다시 내밀었지만 이수연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저 서윤을 뚫어지도록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에게 아직 볼 것이 남아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제서야 서윤은 종이 뭉치를 다시 집어들고 몇 장를 휘저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류 뭉치의 마지막 페이지 즈음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몇 가지의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설...?" 서윤이 말했다.


"그래요, 가설." 기다렸다는 듯 이수연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조사한 정보를 토대로 몇 가지의 가설을 세워놨었어요. 그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가설들을."


가설이라.


서윤 또한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결국 그녀의 허무맹랑한 망상에 불과했을 뿐. 제대로 된 가설로서 성립할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이는 직원들도 마찬가지. 3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내용들이 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의 전부였다.


하지만 부사장은 달랐다. 철저한 조사와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가설이란, 어쩌면 진실과도 유사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법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녀의 부사장이 세웠다는 가설에 다소 호기심에 동했다.


"그 가설이 뭔지...들어나 볼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납치."


처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직원들 사이의 소문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하하...납치라니요?" 서윤이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리플레이서 사태나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겪으며 우리 코핀 컴퍼니는 나름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적들을 만들기도 했죠. 평의회라던지,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


"..."


"단순히 그뿐이 아닙니다. 델타세븐과 같은 비밀 조직에서도 우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듯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어요. 머리가 좋은 서윤양이라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겠죠?"


"칭찬해주시니 쑥스럽긴한데...혹시 그들이 회사에 잠입해 사장님을 납치했다고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말도 안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서윤이 그녀의 말을 웃어넘겼다.


"맞아요. 그래서 저도 이 가설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음 가설에....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지요."


"다음 가설이요?"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는 이수연을 보며 서윤이 질문했다.


"두 번째 가설은...도피."


순간 서윤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 또한 직원들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와 다를게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정확히는 포기,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이수연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서윤은 웃음기가 가득하던 눈을 거두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포기...라고요?"


"서윤양은 혹시 사장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잘...모르겠네요..."


이수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서윤은 그저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구 관리국의 관리자."


"...!"


전설과도 같은 구 관리국과 그들을 통제하는 관리자. 

옛날옛적 전해진 동화의 등장인물과도 같은 이름의 등장에 서윤의 동공이 둥그렇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수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현 관리국의 0호 관리자이자, 수많은 세계의 멸망을 지켜본 산 증인."


"..."


"서윤양은 그가 여기까지 오면서 몇 개나 되는 세계의 멸망을 지켜봤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리고 몇 개나 되는 세계에서 도망쳐왔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잠시만요, 부사장님..."


급격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서윤이 부사장을 제지하려했지만, 그녀의 가쁜 호흡은 끊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세계가 멸망에 치닫았을 때, 혹은 그 세계에서 가능성을 느끼지 못했을 때, 다른 세계로 도주할 방책을 항시 마련하고 있죠. 마치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도주할 방책을."


"지금 그 말씀은...?"


무언가 섬뜩한 기분이 느껴졌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섬짓한 기분.


그 섬뜩함이 가리키는 방향이 어디였는지, 서윤은 이미 알고있었지만 구태여 그를 인식하려고 하진 않았다.


"제 생각에 그는 아마 우리에게서 가능성을 느끼지 못했나보군요."


그럼에도 이수연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제발.


가만히 말을 듣던 서윤은 뒤에 이어질 말이 그녀의 예상과는 틀리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마 사장님께선 우리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윤이 예상했던 말과 한치의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


"이번에는 버리지 않겠다 약속했으면서..."


눈앞에서 이수연이 손톱을 까드득 물어뜯는 것도 무시한 채로 서윤은 조용히 공상에 잠겼다.





라일락과 같이 향기로운 꽃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향을 흩뿌리며 동물, 곤충,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주변의 모든 생물을 유혹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장의 모습은 그러한 라일락의 향기와 같았다. 인근의 어떠한 꽃보다도 향긋한 냄새를 뿜어내며 생물의 감각을 유혹했고, 많은 벌레들을 이끌었다.


아마 자신도, 부사장도 그 향취에 넘어간 한 마리의 작은 날벌레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유혹에 이끌려 향기만큼이나 아름다울 꽃의 꽃망울을 따러 바람에 이끌려갔지만



그때, 이미 꽃은 시들어버리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