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술맛이 좋군.
음? 갑자기 웬 술이냐고?
글쎄, 가끔은 취하고 싶은 날도 있는 거 아니겠나?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나도 낙은 있어야지.
어차피 자네도 한가하지 않은가. 잠깐 내 말동무나 되어주면 고맙겠군.
오늘 류드밀라를 만났네.
전혀 바뀌지 않았더군. 실상은 누구보다 많이 변했겠지만.
아니, 변했다는 말은 어폐가 있나?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이 첫 만남이었으니 말이야.
그래도 그녀의 의지는 그대로였네.
이면세계에서 홀로 대원들을 지키다, 최후엔 침식체가 되어버린 지금도 말일세.
그때 문득 의문이 들더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원래는 당연히 제거할 생각이었네. 고위 침식체는 마왕의 하수인에 가까워.
지금은 멀쩡하더라도 클리포트 게임이 시작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되는 셈이지.
그런데, 내가 거기서 류드밀라를 죽이면 나는 류드밀라가 원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이는 건가?
전대원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아직 류드밀라라고 생각하는데? 단지 그 외의 구성요소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나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남을 심판하려 드는 거지?
눈앞의 류드밀라가 가짜라서 죽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참을 수 없었네.
그래서 마지막에 제안을 하나 했지. 대원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있느냐고.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대꾸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네. 결국 메이즈 전대는 살아남았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알렉스에게 류드밀라 잘 챙겨주라고 말해야겠군.
주제를 바꾸지. 요새 회사는 잘 커가고 있어.
아직까지 모든 게 순조로워. 도박을 건 보람이 있는 거 같아 다행이야.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요새 여사원들이 너무 달라붙는 거 같아. 이번 세계에선 특히 그러는군.
하하하, 나도 알아. 배부른 소리인 거.
그렇지만 나는 진지하다네.
자네는 상상할 수 있겠나? 동일한 사람이 수백 번 죽는 모습을.
...사원들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얼굴이나 이름이 아니야.
지난 삶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었던 모습이지.
핏물이 된 이수연, 갈려 죽은 주시윤, 하반신만 남은 나유빈, 형체도 남기지 못한 유미나...
차원을 이동할 때마다 정신 오염을 씻어 내리는 데도 점점 미쳐가는 게 느껴져.
다른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토악질이 나올 거 같은 기분이야.
그런 의미에서 자네한테 참 고마워. 그야 자네는 로봇이잖나? 팔다리나 내장 조각보단 회로기판이나 스프링이 훨씬 낫지.
....쓸데없는 말이었군. 벌써 취한 건가.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하지. 혼잣말 들어줘서 고맙네.
그럼 내일 만나세. 머신갑, 내 가장 오래된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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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 문학 쓰던 중 잘 안 써져서 끄적여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