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 솔직히 큰 기대 안했는데, 상당히 괜찮네요.”
“그러게 말야. 간만에 맛있게 먹은 거 같아,”
유미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식당을 나섰다.
과연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휴양지. 테마파크 내에 있는 식당조차 일반 식당과는 격이 달랐다.
빵빵하게 차오른 배만큼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얼굴이 헤실헤실 풀린 유미나가 잠시 포만감을 만끽하는 사이,
“잠시만요, 미나 양?”
“응? 왜 그러는...!”
“입술에 뭐가 묻으셨네요.”
어느새 다가온 주시윤이 손을 들어 유미나의 입술을 슥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유미나의 얼굴이 펑 하고 붉어졌다.
미처 반응할 때를 놓쳤다. 유미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시윤은 무심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유미나가 떨리는 눈으로 주시윤을 쳐다봤다. 항상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그였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건 말로 하면 되잖아!”
“하하, 실례했네요. 저도 모르게 그만.”
부끄러워하던 유미나가 진정된 걸 확인한 주시윤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미나 양. 혹시 에어소프트 게임이라고 아세요?”
“에어소프트 게임? 그게 뭔데?”
“가스총이나 공기총으로 페인트볼을 쏘면서 맞추는 게임이요. 서바이벌 게임이라고 하면 아실려나요?”
“아... 서바이벌 게임. 알지. 근데 그건 왜?
“저기에 마침 경기장이 있네요. 한 번 해보지 않으실래요?”
그 말대로였다. 이 거대한 테마파크 한 곳에는 에어소프트 경기장도 마련되어 있던 것이다. 비록 구색만 맞춘 소규모 경기장이었지만 어차피 둘만 들어갈 거라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총 쏘는 거라면 평소에도 질리도록 하는 일인데, 여기까지 와서 비슷한 걸 하고 싶진 않았다.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총은 평소에도 쏘잖아? 여기까지 와서 저런 걸 해야 돼?”
“이럴 때 아니면 직장상사로서 언제 모범을 보이겠어요? 제가 미나 양보다 사격실력이 뛰어나단 걸 증명해 보이죠.”
주시윤은 이미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거 같았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유미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만 밥먹고 난 뒤에 바로 운동하면 배 아프단 말야. 소화도 잘 안되고.”
“에이, 카운터한테 그런 게 어딨어요? 혹시 미나 양,
쫄?“
쫄리냐고? 하. 어이가 없어서.
그딴 허접한 도발에 누가 걸린다고.
“...기왕 할 거면 소원도 걸지?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역시 게임하는 법을 아시네요. 보상이 있어야 승부욕이 불타는 법이죠.”
* * * *
“아아아아아아아! 이건 반칙이지!”
“하하. 불만 있으시면 미나양도 검술 연습하세요.”
게임은 중반까진 비등하게 흘러갔다. 유미나가 명중시킨 페인트볼은 5개. 주시윤이 명중시킨 페인트볼은 6개.
타앙! 탕!
-철컥.
그러던 중 기세를 잡고 사격하던 유미나의 탄창이 텅 비었다. 총성을 들으며 사격 횟수를 가늠하던 주시윤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4개의 볼을 명중시킨 주시윤. 스코어가 5 대 10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미나가 이를 갈며 재장전을 끝마친 순간 한창 사격 중이던 주시윤의 공기총에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능고장이 일어났다. 당황한 주시윤이 노리쇠를 당겨 보지만 이미 노리쇠 내부에서 페인트볼이 터져 사용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절호의 순간. 기회를 잡은 유미나가 엄폐물에서 나와 가늠쇠를 조준했다. 남은 페인트볼은 7개. 전부 맞춘다면 12 대 10으로 승리하는 상황.
유미나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어이쿠!”
주시윤이 총을 휘둘렀다.
“아니, 애초에 사격실력이 뛰어난 걸 보여주겠다며!”
“그 전에 직장상사로서 모범을 보여주겠다고 했었죠. 사격실력 또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한 부분일 뿐이랍니다. 하하하.”
“아아아아아 진짜아아! 짜증나!”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죠? 소원은.. 보자. 일단 좀 쉬면서 생각해보죠.”
벤치에 앉은 주시윤은 아까부터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지만, 오늘따라 저 얼굴에 딱밤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다. 유미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눌러 참았다.
“소원이라... 하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한 개로는 부족할 거 같은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스무 가지 정도 걸고 할 걸 그랬어요.”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흐음. 분명히 이긴 사람이 진 사람한테 뭐든지 시킬 수 있다고 하셨죠? 뭐든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말 한적 없거든?”
“하하, 그랬나요? 아쉽게 됐네요. 그러면.. 제 어깨 좀 주물러주세요.”
“..어깨? 겨우 그런 걸로 되겠어?”
“뭐, 불만이시면 다른 걸로 하죠. 예를 들면 회사에서 강아지 머리띠를 쓰고..”
“아냐아냐! 그걸로 할게! 어깨 주물러주면 되지?!”
급하게 일어난 유미나가 주시윤의 등 뒤에 섰다. 손을 들어 어깨를 잡으니 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느껴졌다.
“으음- 조금 더 세게요.”
“알았어...”
“아~ 좋아요. 딱 그정도 세기로 부탁드립니다.”
“...다음엔 꼭 내가 이길거야.”
“C급 카운터인 미나 양이 저를 이기겠다고요? 관리국 공인 B급 카운터인 저를? 하하. 분발하셔야겠는데요.”
“....진짜 짜증나!”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던 유미나의 눈에 주시윤의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구원 기사단에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이후부터 쭉 착용하던 염주를 닮은 귀걸이. 그때를 생각하니 조금은 선배에게 고마워지는 느낌이다.
“미나 양. 힘이 약해지셨는데요? 역시 C급 카운터라 안마 실력도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건가요?”
취소. 역시 재수 없어.
이를 갈며 안마하던 유미나의 눈이 슬쩍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목덜미. 굳은 날개 근육. 그리고 넓은 등. 손안에 만져지는 근육은 돌처럼 단단했다.
그러고 보면 선배도 제법 근육이 있었지. 저번에 셔츠 너머로 봤던...
‘으아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잔뜩 준 모양이다. 주시윤이 몸을 비틀며 뒤를 돌아보려 하고 있었다.
“미나 양? 조금 아픈데요? 슬슬 그만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앞에 봐! 뒤돌지 말고, 앞에 보라니까!”
“아아아아! 아파요, 살살! 악! 쥐어뜯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빨갛게 부어오른 어깨가 방금 전의 참상을 짐작케 했다.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고르던 유미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선배...”
“...다음부턴 안마는 절대 안 시킬 겁니다.”
유미나는 잠시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저주했다.
야 이 등신아. 어쩌자고 그런 거야.
주시윤이 화난 거 같지는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빨개진 얼굴로 주시윤의 눈치를 살피던 그때.
“오늘은 추락하는 함선 같은 건 없네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생뚱맞다고 생각하리라.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이라 여길 테지.
하지만 유미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사실 잊기가 더 힘든 일이기도 했다.
“그날이 말도 안 되는 거지. 설마 기대했어?”
“그럴 리가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아직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걸.
그 말대로였다.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인류를 지키려 했던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를 막고, 그 수장과 싸워 이기고, 아카데미에 가고, 부활한 적과 싸워 이기고, 시윤 선배가 납치당하고, 이상한 중세 도시 같은 곳에 쳐들어가고, 그리고, 그리고...
“시간 정말 안가네.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안 가는 거 같아.”
“동감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만큼 천천히 가는 기분이에요.”
“그래? 난 군대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하하, 사실 저도 가본 적 없답니다.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까요.”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주시윤의 자학 같은 농담 때문은 아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주시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어요. 허신이라니, 갑자기 그런 게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누가 알았겠어. 그런 게 존재할 거라고. 선배도 덕분에 죽을 뻔했잖아.”
“하하. 그래도 살았잖아요. 누군가가 도와주셔서. 다음에 만나면 꼭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는데요.”
유미나는 속으로 평생 감사 인사를 드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신을 손짓만으로 죽이는 녀석이다. 되도록이면 아예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
“...다음에 볼 기회가 있겠지.”
“그렇겠죠? 아무튼, 수고 많으셨어요. 허신을 잡은 것도 미나 양이니까요.”
“운이 좋았지. 나 혼자였으면 절대 못 잡았을 거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지금의 미나 양을 보면 딱 그 말이 떠오르네요. 하하, 직속 사수가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갑자기 자기 칭찬으로 방향을 튼다고?”
“농담입니다. 농담.”
황당해진 유미나는 빤히 주시윤을 쳐다보았다. 주시윤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유미나와 눈을 마주쳤다.
“앞으로도 다치지 말고 몸만 성히 돌아오세요. 미나 양이 다치면 저도 슬플 겁니다.”
급작스런 말이었다. 그래서 더 파괴력 있는 발언이었다. 유미나는 순식간에 얼굴에 피가 쏠리는 걸 느꼈다.
“...선배가 왜 슬픈데?”
“그야, 미나 양은 우리 소대의 귀염둥이 막내니까요.“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쿵 뛰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날씨가 덥게 느껴졌다. 손부채질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미쳤나 봐, 갑자기 이러는 건 반칙 아냐?
괜히 허벅지를 배배 꼬았다. 숨기지 못한 귀가 화끈거렸다.
“점점 줄이 길어지는데요. 다음엔 뭐 타러 가실래요?”
“그, 글쎄, 뭐가 좋으려나.”
“사파리 월드는 어때요? 마침 근처에 있는데.”
주시윤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챙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선배.”
“왜요?”
“혹시 말이야. 혹시, 만약에....”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유미나. 유일하게 드러난 귀는 빨개진 채 존재감을 과시 중이다.
주시윤은 기시감을 느꼈다. 어라, 이거 혹시.
“....말씀하세요.”
“으으, 그러니까... 다음에도 이렇게 단둘이서 올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
“엄마야아아아악!”
바로 옆에서 터져나온 비명에 직격당한 서윤이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안녕, 미나야. 대단한 반응이네. 내가 그렇게 반가웠어?”
“...서윤 양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알트 소대는 작전 중 아니었나요?.”
“흐흥, 미나랑 사이좋게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횐데 작전이 중요하겠어요? 다른 소대원들한테 맡겨 두고 왔으니 걱정 마세요.”
“입장권은..? 너는 입장권도 없을 거 아냐.”
“어차피 네가 가져온 이용권은 3인까지잖아? 네 이름 팔아서 들어왔지.”
“..그게 된다고요?”
“뭐,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잘 된 거 아니겠어요?”
서윤은 얼이 빠진 유미나를 보며 짖궂게 웃었다.
“그런데 우리 미나..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걸까?”
“응?! 무, 무슨 말이야? 난 잘 모르겠는데?”
“선배도 참. 생긴 거랑 다르게 야성적이셨네요. 우리 순진한 미나를 이렇게 잡아먹으려 하시다니.”
“하하... 어디서부터 보셨죠?”
“글쎄요, 미나가 선배 안마해 줄 때부터?”
“그러면 거의 다 본 거잖아...! 왜 진작 안 나오고 몰래 숨어있던 건데!”
“아하하. 깜-짝 놀래켜 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뭐야. 그런데 생각보다 더 대성공인 거 같기도 하고?
...미나야, 근데 말이지...”
양 팔로 뒤에서부터 유미나를 감싸 안은 서윤이 귓가에 속삭였다.
“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고백하는지 잘 못 들었거든. 나한테도 들려주지 않을래?”
“.....! 이게 진짜, 가만 안 둬!”
“와앗! 아하하하, 회사 동료를 때리려고 해도 되는 거야?”
“너 죽이고 오늘 사표 쓴다! 거기 서!”
웃으며 도망치는 서윤을 유미나가 맹렬하게 쫓았다. 두 카운터가 일으키는 소란에 한가롭게 길을 걷던 관광객들이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 관광지에서 현역 카운터들이 난동을 피우면 필시 네버랜드에서 회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리라. 그걸 수습하는 건 높은 확률로 자신이 될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주시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만 의외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수줍게 고백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서일까.
“....뭐.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안 그래요? 미나 양.”
쓰게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난 주시윤이 걸음을 옮겼다. 항의 메일이 고소장으로 바뀌기 전에 저 소란을 수습해야 할 테니까.
3월,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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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올렸었는데 약간 수정하고 다시 올림
봐줘서 ㄳ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