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진한 기운이 포진해 있던 방의 적막을 깬 것은 나도 잘 알던 사람이었다.
고귀함을 뽐내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 제시카 그린.
게임 내에서도 나름 예쁜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서 1레벨로 남겨둔 기억이 있다.
"너희 지금 뭐, 뭐 하는 거야?"
제시카는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비닐봉지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방금 난 소리의 정체가 저것이었나. 내용물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추리를 할 시간이 아니었다.
되도 않는 오해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 뭔가 오해를..."
제시카가 뭐라 말을 하기 전, 빠르게 반박하려 들 때였다.
차마 내리지 못한 내 손과 초콜릿을 오르카가 기습적으로 물고는 우물거렸다.
"마히어..."
맛있다는 뜻일까. 이제는 익숙해진 오르카의 기행을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생각했다가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손가락을 우물거리는 혀와 이빨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나는 혹시 이대로 입을 다물어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마시멜로 꼬치에 초콜릿을 녹여 올린 마시멜로-초콜릿 꼬치를 먹을 때 오르카는 꼬치까지 씹어 먹은 전적이 있었다. 물론, 곧바로 빼긴 했지만, 잘린 내 손가락을 돌려받는다고 붙는 것은 아니니 주의해야 했다.
오르카가 내 손가락을 핧으며 다소 이질적인 소리가 형성되었다.
제시카는 그걸 다른 쪽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연속된 충격에 잠시 잇고 있었지만, 나는 환자였다.
그것도 방금 깨어난.
그런 불우한 이웃을 쓰레기 보듯이 째려보는 제시카의 눈빛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르카와 제시카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노란 머리에 붉은 얼굴. 제시카는 마치 피자 같았다.
나는 도저히 저 피자를 설득 시킬 자신이 없었다.
"저..."
그러나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망상에 살이 붙여져 기정사실이 되어 버리니까.
"가, 가까이 오지 마!"
뭐, 저쪽은 이미 사실로 확정 지어 버린 모양이지만.
제사카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나는 문을 바라보는 위치로 침대에 앉아 있었고, 오르카는 초콜릿을 받아먹으며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따라서 문을 열고 들어온 제시카는 그런 광경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거기에다 오르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더해졌으니, 누구든 이걸 보고 그런 상황이라 생각하겠지.
다만 보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영역이었다.
이 세계는 자기 눈조차도 의심해야 하는, 그런 세계였으니 말이다.
제시카는 그런 점에 있어서 서투르다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목숨이 한 뼘 차이로 오고 가는 용병 바닥의 대부분은 압도적인 무력이 아니라면, 신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지력이 아니라면 그냥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는 게 살아 돌아갈 확률을 높여주었으니까.
대인관계에 서툰 사람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당장 오르카만으로 처절하게 실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제시카와 관계를 만들어야 했다.
오르카가 소녀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 주역중 하나가 바로 제시카 였으니 말이다.
더 이상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르카로부터 축축해진 손을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꺄아악!!!"
그냥 일어선 것뿐인데, 제시카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질러댔다.
조금 전보다 훨씬은 더 큰 소리로.
"하..."
나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시카의 촌극은 괴성에 놀라 달려온 일행들에 의해 겨우 진압되었다.
오해를 푸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여 성공하긴 했지만, 그녀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
.
.
이제는 익숙해진 폐아파트에 어느 방. 아직 해가 밝게 떠 있음에도 우리는 모닥불을 피우곤 둥글게 앉아 있었다. 불을 피워야만 마시멜로를 맛있게 구울 수 있었다.
타닥, 타오르는 마시멜로 꼬치를 하나 쥐어 입에 넣었다.
살짝 오래 구웠을까, 탄내가 먼저 입 안을 휘감았다.
다음은 보드라운 겉살이 침과 만나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움찔거리는 목울대 그러곤 뒤늦게 올라오는 달콤한 맛.
어째서 오르카가 초콜릿과 마시멜로에 환장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하핫! 오해도 그런 오해를 하다니. 이 형씨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갈색 피부에 굴곡진 근육이 인상적인 대머리.
그러니까 '찰리 록우드가' 웃으며 말했다.
찰리 역시 게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었다. 성능은 그럭저럭에 남자 캐릭터 라는 특이점 때문에 1레벨로 남겨둔 기억이 있다.
"침튄다 찰리. 그나저나 제시카 이번에는 네가 심했다. "
어두운 인상의 남자 '에디 피셔' 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르카와 닮은 다크써클에 다소 피곤한 듯한 눈동자. 얼핏 봐서는 알기 어렵지만, 몸 곳곳에 새겨진 영광의 훈장들이 그가 상당한 베테랑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뭐? 내가 뭘!"
자신을 탓하는 두 남자의 말에 제시카는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날카로운 괴성이 귓가를 찔러댔다. 지치지도 않는지 또 시작이었다.
요즘 용병들은 소리 지르는 훈련이라도 받는 건가.
"..시끄러워..."
오르카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침의 모습은 어딜 간 건지 평소의 싸늘한 오르카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제시카와 찰리, 에디 그리고 오르카까지 카운터사이드의 스토리 중 명작이라 하면 빠지지 않는 '오르카 외전' 의 주역들이 모두 모였다.
내가 끼어들어서 원작처럼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으면 어떡할까 걱정했지만, 어찌저찌 원작의 흐름에 탑승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이들에게 빌붙으면서 원작을 망치지 않는 것.
세계의 멸망이 단순한 개념이 된 세상에서, 원작을 이탈한다면 어떤 나비효과가 되어 미래를 바꿀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나는 능력도, 뭣도 없으니까.
그래서 게임 속 주요 인물들과 친분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자네...오르카에 대해 알고 있나?"
한 번의 회담을 끝낸 후 자리를 정리하던 나에게 에디가 다가와 건넨 말. 내 쓸모를 입증할 좋은 기회였다.
에디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저는 오르카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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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페도가 아닙니다.
본 작품 내에 모든 등장인물은 성인입니다.
따라서 오르카는 미성년자가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