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역시 호라이즌의 사무실에 출근도장을 찍으러 온 마크는
어제와는 다르게 꽤나 싸늘해진 레이첼의 눈빛과 태도에 적잖은
당혹감을 느꼈다.
어제 민트초코관련해서 진상피울때 거들어주지 않아서 배신감이라도 느낀걸까.
"마크, 오늘은 특별 메뉴가 있습니다."
"호오, 뭐지?"
레이첼이 가져온 컵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은 마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호라이즌은 그런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별것 아닌 것으로, 저렇게나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런 그를 보는 그녀를 보는 레이첼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호라이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방해할 생각은
접었지만, 여전히 어제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던 탓이었다.
"너무 감동일세, 네크로노미코코아를 준비해주다니!"
"딱히 당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레이첼이 예전에 사달라고
조른 적도 있고."
"하하, 어쨌든 내가 캐스팅보트였다는 말이지? 레이첼,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고마워할 생각도 없었거든요, 아저씨."
레이첼이 토일렛 이슈로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이 기회였다.
마크는 호라이즌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날 대하는 레이첼의 태도가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음, 어제 마크의 됨됨이를 알아 보겠다고 당신의 뒤를 밟는다는
말은 했습니다만."
"그건 나도 눈치챘네. 평소처럼 성실하게 일했을 뿐인데 대체
어디서 내 이미지가 나빠진건지 알 수가 없어."
레이첼이 돌아와서 더 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호라이즌은 마크를 향해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보였다.
"걱정하지마십시오. 별 일 아닐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뭐야? 나 없을 때 무슨 얘기했어 둘이?"
호라이즌과 마크가 짜기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키는 통에, 레이첼은
답답해하면서도 방법이 없어 평평한 가슴만 칠 뿐이었다.
"호라이즌, 혹시 내일 일정 있나?"
"내일이라면.. 딱히 없습니다. 있어도 레이첼 시키면 됩니다."
"야! 나 지금 바로 옆에 있거든?"
"유능한 레이첼이라면 혼자 할 수 있을 겁니다."
"흐,흥. 그런다고 기분 좋아지지 않는데."
마크와 호라이즌은 동시에 '쉽다'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그녀의 기분을 망치려고 하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입니까?"
"같이 가볼 곳이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여기서 뵙죠."
***
마크의 출발시간도 아슬아슬한 만큼, 튀어나가는 속도도 빨라졌다.
레이첼은 또 그 다이너마이트 메이드 만나러 가는구나 싶은 생각에
그를 고깝게 여기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레이첼, 방금 화장실을 사용하고서도 또 배설을 하고 싶습니까?
불편한 표정입니다."
"아,아니야! 단어를 좀 조신하게 사용해! 너 나 놀릴때만 기계가
쓸 법한 어휘쓰는거 모를 줄 알고?"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요.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레이첼은 망설였다. 그녀가 척 보기에도 호라이즌은 내일 있을
마크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호라이즌의 행복을 바란다고
생각한 주제에 그녀의 기대를 깨는 발언을 하는 게 진정 그녀를
위하는 길일까? 레이첼은 결국,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호라이즌, 있잖아. 남자랑 만나서 놀 때는 조심해야 해. 알지?"
"예, 예. 압니다."
호라이즌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고 레이첼은 발끈했다.
언니가 걱정해서 말해줘도..!
"아니, 남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레이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아니 어지간한 모든 인류보다 더 강력하니까요."
호라이즌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죽을뻔 했던 레이첼을 구하러 들어온 것도 호라이즌이었으니까.
호라이즌은 레이첼이 그녀의 몸이 아니라 마음을 걱정한다는 것을
몰라주고 있었다.
"레이첼,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마크를 연애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저씨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본적도 없군요. 허를 찔렸습니다.
하긴 본 소체는 휴먼 남성들에게 꽤나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레이첼은 목구멍에 마크의 진짜 정체에 대한 이야기가 걸렸지만,
결국 말하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연애상담은, 조언대로
안 하고 결국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국룰이니까.
그리고 대망의 아침이 밝았다.
호라이즌은 늘 그렇듯 붉은 스카잔과 아이보리색 블라우스,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 그러고 나가게?"
"네. 문제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수금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건 아니지.."
레이첼은 한숨을 쉬며 동생의 코디를 도와주었다.
호라이즌은 옷이 없었다. 다 리타와 대시의 옷이었다.
리타의 옷은 그녀가 입기엔 너무 성숙해보였고, 대시의 옷은
조금 수수했다. 하는 수 없이 레이첼은 자신의 옷장을 열었다.
그녀는 한참 옷장을 뒤지다가, 프릴이 하늘하늘한 파스텔 톤
원피스를 건넸다. 가슴 밑 부분엔 벨트로 하체를 길어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는 팬시한 디자인이었다.
"자, 이거 입어봐."
"레이첼 옷 아닙니까?"
"응, 내꺼야. 깨끗이 입고 돌려줘. 나름 아끼는 원피스니까."
"맨날 발랑까지게 입고 다녀서 이런 옷 없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 발랑... 됐다. 옷 불편한 덴 없어?"
호라이즌은 시험삼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고개를 저었다.
"흉부 파츠부분이 살짝 끼는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야!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긴데!"
"일단 고맙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럼 일 성실하게 하십시오."
시간약속을 어기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호라이즌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레이첼은 주섬주섬 옷가지를 정리했다.
호라이즌이 늘상 입고 다니는 가족의 옷도 소중하게 개어두었다.
가족들의 옷 아니면 안 입겠다던 호라이즌이 자신의 옷을 군소리
없이 입은 것은, 그저 마크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레이첼이 어엿한 그녀의 가족이 되었다는 뜻일까.
레이첼은 그 둘 중 무엇이든 호라이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언니들'의 마음이었다.
***
호라이즌이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마크와 마주쳤다.
마크가 시간약속을 안 지키는 상대는 리코리스 뿐이었기때문에
그가 늦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도 호라이즌이 마크를 높게사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크는 인사도 없이 호라이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라이즌은 자신의 옷이 평소와 다르기에 그러한 정적이 평소보다
더욱 어색했다.
"오늘, 평소와 조금 다르군."
"...이 의상 말입니까? 레이첼의 옷입니다. 저와는 좀 안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아니, 왜 평소에 이렇게 입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갈정도로 아름답네."
"칭찬이 너무 후한 것 아닙니까?"
"글쎄, 내 칭찬이 후한 상대는 한 명 뿐이란걸 증명할 수 없어 아쉽군."
호라이즌은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여태 겪어본 적 없던
감각이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정의내릴수도 없었다.
"그래서 저를 어디로 데려갈 작정이죠."
"응? 딱히 특별한 덴 없네."
"...절 속였군요. 남자는 위험하다던 레이첼을 이렇게 빨리 재평가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속이다니. 그저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마땅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야."
"시간은 매일 아침 같이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마크는 자연스럽게 호라이즌의 손을 잡았다.
호라이즌은 굳이 손을 빼내진 않았다. 휴먼의 따스한 체온은
그녀도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내 정신 좀 봐, '단 둘이'라는 말을 빼먹었군."
마크가 호라이즌의 손을 꼭 쥔 채 앞장섰다. 호라이즌은 마지못해
그의 걸음에 발맞춰 걸었다.
"그래서 어딜 가는 겁니까? 합당한 설명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안 나왔으면 그 사무실에서 무게잡는 시늉만
했을 거 아닌가? 이렇게 광합성도 좀 하고.."
"저는 식물이 아닙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마크와 호라이즌은 꽤나 오래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어디 한 군데 멈춰 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호라이즌이 지칠 일은 물론 없었지만, 매사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로서 이런 비효울적인 동선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크가 잠시 벤치에 앉자, 호라이즌은 따지듯이 물었다.
"이렇게 걷는 목적이 뭡니까?"
"아, 미안하네. 목적이 사실 두가지가 있었는데, 한 가지가
달성되어버려서 그만 너무 오래 걸었군."
"그래도 목적이 있었다니 다행이군요. 설명을 요구합니다."
"첫 번째 목적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 당신과 걷다 보니 저절로
달성되더군. 그리고 두번째 목적은,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
호라이즌은 어이가 없었다. 휴먼은 이렇게 손 잡고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얼마나 작은 배포란 말인가.
"저는 그런 사소한 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저도 나름대로 행복합니다. 레이첼과 지지고 볶고..."
"그러면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나?"
호라이즌은 혼란스러웠다.
이 휴먼은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것일까.
레이첼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호라이즌은 멈칫했다.
내심 리타와 대시를 그녀와 겹쳐보는 자신 때문에.
레이첼을 레이첼로 보지 못하고 리타와 대시의 대용으로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레이첼은 나름대로 호라이즌을 행복을 바랐지만 행복해진다면
리타와 대시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녀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가장 싫었다.
복수는 시원했지만 그 시원함이란 건 있던 것이 사라진 데서 오는
시원함에 가까웠다. 뻥 뚫린 빈자리는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저는... 제 가족을 제 잘못된 판단으로 잃었습니다.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녀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저 혼자 행복해지기에는..
자꾸만 그녀들이 생각납니다. 기계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잊으라고 하지 않았네. 잊어서도 안 되고."
"그럼 저는 대체 어떻게.."
"대니, 미쉘, 헌터, 제이, 마이크, 힐튼, 킴, 모리스, 샘, 스티븐...."
마크는 계속해서 사람의 이름 같은 것들을 쭉 읊었다.
".. 모두 먼저 떠나간 동료들이라네. 잊으면 안 돼. 그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속에만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요원들은 특히
그렇지. 가족애게도 비밀로 해야 할 임무도 있으니까."
호라이즌은 늘 순수하게 빛나던 선글라스 너머 마크의 눈빛이
진중해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크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휴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 그녀였다.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런 말을 했지. 슬퍼하지 말고,
먼저 간 사람들 몫까지 행복해지자고. 지켜보면서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관점도 있군요."
"난 말이지, 사실 로봇엔 관심이 딱히 없었네. 샘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야. 그 친구 완전 로봇 마니아였는데. 호라이즌 당신을
봤으면 지금의 나보더 더 환장했을걸."
"그럼 저를 보고 환장하던 당신은 거짓인 겁니까?"
"아니? 그 친구랑 친하게 지내다보니 나도 흠뻑빠져서 진심이
됐지 뭔가. 옛날 생각나는걸, 하하..."
호라이즌은 마크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시선을 향했다.
휴먼의 드라마에서 그랬다. 남자는 여자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고.
"흐음.. 추태를 보였군. 어쨌든 호라이즌, 당신이 먼저 떠나보낸
가족이 당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기억하나?"
호라이즌은 옛 추억을 영상재생장치로 뇌내 재생했다.
가족사진을 찍던 그 순간..
그녀에게는 바로 어제같은 일들이었다.
"그럼요. 기계는 잊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봤을때 우울한 호라이즌을 좋아하겠나,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호라이즌을 좋아하겠나?"
호라이즌은 떠올렸다. 무뚝뚝해도 사실은 상냥한 리타를,
어두운 세상에서 한줄기 빛처럼 피어났던 대시를.
"당신이 레이첼과 행복하게 산다고 질투할 사람들인가?"
"리타는 모르겠지만, 대시는 절대 안그럴겁니다. 사실 리타도 안그럴겁니다."
"하하, 그럼 됐군."
호라이즌은 흉부파츠 속 어딘가 살짝 풀려있던 나사가 꽉 조여진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제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첫 만남을 기억하나? 코핀컴퍼니에서 봤을 때 당신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어. 그랬다가 시무르그 실루엣일때는 밝아졌지.
그때 아,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싶었지만.. 이내 후회가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오더군. 그래서 몇가지 조사를 좀 해봤네."
"감이 좋은 휴먼이군요."
"정보부 요원 블랙버드를 무시하지 말게."
호라이즌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 비슷한 표정이 아니라 진짜 미소였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로망, 로망 하는데 정확히 그게 뭡니까?"
마크는 팔짱을 끼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쎄, 설명하기 어렵네. 뭐 쉽게 말해서, 꿈이라고 할 수 있겠군."
"꿈?"
"이루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이 모든게 다 꿈이지. 꿈은 잘 때 꾸는 것만이 꿈이 아니야."
호라이즌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떠올리고 있으면 행복해지는 것도 꿈입니까?"
"그것도 꿈이자 로망이지."
호라이즌은 다시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크의 손을 잡는 오늘, 그리고 내일, 그와 함께하는 더 먼 미래.
호라이즌은 이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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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기한을 놓쳐버렸지만 완결은 내고 싶어서 올렸슴..
기간을 잘 못 알고있어서 완성도가 떨어진게 아쉽다
그래도 쓸때 재밌개 써서 여건이 된다면 데이트하는 것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