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 피곤하다."

"또 어딜 다녀와서 그렇게 지친 겁니까 휴먼."

"응? 아아, 비어있는 벽이 있길래 내 예술혼을 좀 태우고 왔지. 기가 막히게 나왔는데 호라이즌 너도 나중에 같이 보러 안 갈래?"

"휴먼이 예술혼을 불태웠다고 하니 오히려 더 불안하군요. 게다가 빈 벽에 그 정신 사나운 칠을 하는 데 허가는 받았습니까?"

"아, 아니... 그, 근데 주인 있는 벽은 아닐 거야! 칠하는데 아무도 뭐라고 안 했단 말이야."

스프레이를 어찌나 뿌려댔는지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레이첼을 보며 호라이즌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그런 제스처를 취하자 윽 하고 찔린 레이첼은 손을 마구내저었다.

"ㅇ, 야! 어, 언니가 좀 그럴 수도 있지, 왜 그걸 가지고 그렇게 한숨을 쉬고 그래?"

"저는 한숨을 쉰 게 아니라 휴먼들이라면 이런 상황에 했을 행동을 따라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휴먼이 왜 저의 언니가 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군요."

"호, 호라이즌. 혹시 화났어...?"

"..."

의자에 앉아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던 호라이즌은 그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허를 찔린듯한 표정이라고  표현할만한 얼굴을 한 그녀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치우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휴먼이 하루종일 뭘 하다 새벽에 들어오든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보다 스프레이 냄새 때문에 후각장치가 고장날 지경입니다. 얼른 가서 씻기나 하십시오 휴먼."

"그, 그렇게 냄새가 많이 나?"

자신의 옷에 코를 대고 몇 번 킁킁대던 레이첼은 서류로 시선을 주고 있는 호라이즌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보였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방을 나선 레이첼은 곧바로 샤워실이 있는 방으로 갔다.

"...하아."

그리고 홀로 남겨진 호라이즌은 아까와 비슷한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비논리적인 사고로 행동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까.

의미없이 바라보고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린 호라이즌은 레이첼의 사진이 덧붙어져있는 앨범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해맑게 웃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엄지로 살짝 문지른 호라이즌은 기억장치에서 몰려오려 하는 기억들을 차단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하루종일 자리를 비운 레이첼에게 서운하긴 했지만 호라이즌은 방금 한 행동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과 그게 너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신ㅡ기계ㅡ답지 않게 반응해버린 것까지 더해 후회가 몰려온 그녀는 레이첼이 좋아할만한 것이 방에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눈치였습니다."

방으로 들어올 때 레이첼이 배를 감싸며 윽 하던 걸 떠올린 호라이즌은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오므라이스를 꺼내 전자레인지로 가져갔다.

"..."

가끔 가곤 하는 카페의 말동무가 좋아하는 음식을 레이첼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 저녁 내내 기다렸던 것을 떠올린 호라이즌은 그녀를 기다리는동안 쌓였던 서운한 감정이 다시 몰려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걸 보고 좋아해할 레이첼의 얼굴을 떠올리며 전자레인지의 타이머를 돌린 호라이즌은 찬장에 있는 접시와 숟가락을 꺼내 책상 앞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어린이용이어서 조금 작긴 하지만 마른 체형인 레이첼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할 거라 생각한 호라이즌은 다시 의자로 돌아가 문을 바라보았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기를 5분. 10분. 30분.

시계를 보고 있지 않아도 시간을 알 수 있는 호라이즌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시계를 향해 돌아갔다.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도 휴먼이 샤워를 마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평소 레이첼의 샤워시간을 아는 호라이즌은 이상을 눈치채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서 문을 여는 짧은 시간에 호라이즌의 머릿속에는 이상하게 그녀가 다친 모습이 계속 재생되었다.

빌딩에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자신이 진즉에 눈치를 챘겠지만, 자신 때문에 과거 레이첼이 심하게 다쳤던 기억이 있는 호라이즌은 비논리적이지만 그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오는 초조함 때문이었을까, 방을 나올 때까지만해도 빠르게 걷는 정도의 속도였던 호라이즌은 복도에서는 전력으로 달려 단숨에 샤워실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노크를 해볼법도 하지만 몸으로 문을 들이받아 부숴버린 그녀는 곧장 유리로 돼있는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레이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샤워실에는 레이첼 혼자만이 있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레이첼이 힘없이 벽에 쓰러진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물을 끌 정신도 없이 옷을 입은 채 안으로 달려들어간 호라이즌은 레이첼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의식을 잃어 힘이 없는 레이첼의 몸에 있는 물을 닦아줄 새도 없이 바닥에 눕힌 호라이즌은 학습돼있는 응급처치를 시행했다.

정확하고 빠른 동작에 레이첼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고, 곧이어 안 떠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던 눈꺼풀이 올라가며 빛을 잃은 눈이 보였다.

"호라...이즌...?"

"레이첼! 괜찮습니까?"

"나, 샤워하다가 어지러워서..."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금방 옮겨드릴테니 잠시만 누워있으십시오."

옷에서 물을 잔뜩 흘리며 샤워실 안으로 간 호라이즌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레이첼을 다시 안아올렸다.

두 손으로 레이첼을 바쳐주느라 손이 없어 발으로 수건을 공중에 띄운 그녀는 몸이 보이지 않게 대충 덮어주고선 곧장 방을 나섰다.

"레이첼, 왜 거기에 넘어져있던 겁니까?"

"..."

그 사이 다시 의식을 잃었는지 힘없이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레이첼을 내려다본 호라이즌은 빠르게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탈진 증세 정도인 것에 안심한 호라이즌은 사무실로 돌아가 소파 위에 레이첼을 눕혀주었다.

침대에 눕혀주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곳이 없어 일단은 소파를 선택한 호라이즌은 수건으로 레이첼의 몸을 닦아준 뒤 다시 샤워실 앞으로 돌아가 그녀의 옷을 가져왔다.

"..."

땀이 잔뜩 나있어 도로 입히면 오히려 안 좋을 것 같은 옷의 상태에 호라이즌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레이첼에게 덮어주고선 휴 하고 숨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에 문으로 간 그녀는 방을 나가 새벽의 손님을 맞아주었다.

"이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습니다, 휴먼."

"허억..허억.. 그렇게 다급하게 부른 것 치곤 여유있는 모습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닙니다. 지금은 여유있는 척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

그녀답지 않게 침착하지 못 한 표정과 말에 헐레벌떡 달려온 손님, 핀리는 호흡을 가다듬고서 차분하게 물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휴대폰이서 불이날 뻔 했어. 그래서, 내 핸드폰을 그렇게 시끄럽게 울린 이유는 뭐지?"

"제 친구가 쓰러졌습니다."

짧은 말은 언제나의 호라이즌의 목소리처럼 무감정했지만 핀리는 그 안에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것을 느꼈다.

기계에게 감정이 있다는 표현은 이상지만, 핀리가 느낀 것은 분명 그런 종류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상황이 심각하다 생각한 핀리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 레이첼이라는 소녀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의학 쪽으로 지식은 없지만 간단하게라면 봐줄 수 있으니 안내해주게."

"기다리십시오. 레이첼은 지금 알몸 상태입니다."

절대로 따라들어오지 말라는듯 강한 눈빛으로 핀리를 바라본 호라이즌은 잠시 후 손을 털며 나와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럼 잠깐 실례하지."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핀리는 소파에 누워있는 분홍머리의 소녀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머리만 보이도록 커다란 수건으로 둘둘 감겨 그 위에 외투를 올린 것이 마치 번데기 같다고 생각한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레이첼의 안색을 살폈다.

"이건... 그냥 피곤해서 정신을 잃은 거군."

"맞습니다. 진단 결과 간병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된다는 처방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잖나?"

"저는 여러 방면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기계지만..."

거기서 말을 멈춘 호라이즌은 레이첼의 반대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서 말을 이었다.

"간병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

당황스러움에 말을 잃긴 했지만 다행히 이 작은 소녀가 슬픔에 빠질 일은 아닌 것에 속으로 안심한 핀리는 선글라스를 고쳐쓰며 자신이 생각하기엔 안심이 되고 멋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 핀리를 부른 게 적절한 행동이었다는 걸 미리 말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