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사람도 없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호라이즌 

투자기금의 사무실.

로봇, 호라이즌은 가만히 앉아 그녀의 하이테크 연산 처리장치로도 

해결하지 못한 버그와 씨름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해결되는 일이었다면 여태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터.

또 푸쉬익-하는 냉각기 기동음만이 사무실을 메울 뿐이었다.


쾅!

별안간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고, 레이첼이 흠뻑 젖은 채

들어와 강아지마냥 온 몸을 흔들며 물기를 털어냈다.


"뭡니까, 레이첼. 조용하게 좀 들어오십시오. 문짝 부숴지면 짤없이

감봉입니다."

"하! 지금 나 엄청 화났거든?"

"그렇군요."

"야! 이유라도 물어봐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 언니가 너를 그렇게 

매정하게 키웠니?"


태클걸고싶은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지만, 더 귀찮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호라이즌은 정말 내키지 않는 투로 이유를 물었다.


"믐느끄."

"으으.. 엎드려 절 받는 거 같지만... 밖에 비가 아주 쏟아지는데!

왜 전화 안 받았어! 어디 나간 줄 알았잖아!"


전화라.

호라이즌은 메모리를 더듬어보았다.

아마 그녀가 한창 디버깅에 몰두하고 있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던 모양이다. 


".. 지금 비가 옵니까?"

"그렇다니까? 봐, 나 홀딱 젖은거! 어, 근데 이렇게 젖으니까

나 좀 섹시하지 않아?"


레이첼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별안간 분주해진 호라이즌.

레이첼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털레털레 수건을 집어들고는 

물기를 털어냈다. 


"왜, 빨래라도 널었어?"

"그런 건 아닙니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는데. 역시

휴먼들의 일기예보 형편없군요."

"맞아, 그래서 편의점만 땡 잡았지. 다들 우산이 없었다니깐."


호라이즌은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으잉? 어디 가게?"

"마크도 우산이 없을 겁니다."


레이첼은 대번에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마크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상하리만치 주변에 여자가 많은 오타쿠 수염 아저씨.

호라이즌이 어째서 그런 남자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좋다는데 억지로 그것을 

떼어낼 정도로 레이첼은 모질지 못했다. 어쩌면 마크에게 갖는

비호감은 그녀의 친구, 호라이즌을 뺏기는 것 같은 질투에서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보부 요원이시라며? 정확한 날씨에 대한 정보정도는 이미

접수하시지 않았을까?"

"마크는 그렇게 완벽한 휴먼이 아닙니다."


흔치 않은 광경인 안절부절하는 호라이즌의 모습을 보면서도

레이첼의 언짢음은 커져만 갔다. 그 아재가 뭐가 그리 좋다고.


"그래서, 우산 들고 마중이라도 가게?"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우산을 집어 들던 호라이즌은 다시 멈칫, 하고 동작을 멈췄다.

뭐지, 연료라도 다 됐나. 레이첼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의 호라이즌이 눈에 띄었다.


"...왜 그래? 고장이라도 났어?"

"본 기체는 자가 수복능력도 갖추고 있는 하이테크 모델입니다.

다만... 아직 버그 수정이 안 돼서."

"버그?"

"자꾸 마크 관련 생각만 납니다."


레이첼은 가감없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살다살다 호라이즌에게서 저런 말이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욱... 혹시 머리는 자가수복 안 돼?"

"농담이 아닙니다. 해결하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뭔데?"

"마크는 저한테 자꾸 멋지다고만 합니다."


마크가 태양처럼 환한 표정으로 호라이즌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멋지다! 최고다! 하는 그림이 레이첼의 뇌내에 자동으로 재생됐다.

그 양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지. 하고 납득하는 레이첼.


"너는 그 아저씨 로망의 집약체잖아. 늘 듣던 말인데 갑자기 왜?"

"이제 멋지다는 말은 그만 듣고 싶습니다."


호라이즌이 살짝 망설이는 투로 말을 이었다.


"..예쁘다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우웩."


호라이즌이 레이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무르그 실루엣으로 하늘을 날아서 슈퍼히어로 랜딩으로 

등장해주면 그 아저씨 껌뻑 죽을걸?"

"싫습니다. 그러면 마크가 또 멋지다고 할겁니다."


아무래도 호라이즌은 진짜로 그에게 '예쁘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 보였다.


"으으. 정말로 도와주고 싶지 않지만.."


레이첼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쩔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동생의 연애를 돕는것이 언니의 역할인것을.


"따라와, 일단 그 놈의 스카쟌부터 좀 벗고!"


호라이즌의 손목을 잡고 옷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레이첼은,

일단 영 패션센스가 꽝인 호라이즌의 옷을 벗겨냈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말아요."

"지금 뭐 따라 한 거야?"

"옛날에 봐 뒀던 성교육 영상에서 발췌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좀

강력한 거부의사를 표명한 것 같습니까?"

"...뭘 봤는진 모르겠지만 쓰레기같은 성교육이네. 이거 입어봐."


호라이즌은 레이첼이 건넨 옷가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뭐, 왜?"

"레이첼의 패션센스는 좀.."

"야,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거든?"

"레이첼 식으로 입었다가는 예쁘다 말고 야하다 라는 말을 들을

확률이 87%이상으로 계산 됩니다."

"이 패알못 로봇이..! 잔말 말고 입어! 이건 그런 스타일 아니니까."


호라이즌은 레이첼이 건네준 옷을 받아 든 후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풍만하지 않은 프레임의 단점을 희석시키는 하늘하늘한

흰색 블라우스, 다리를 길어보이게 만드는 검은색 A라인 스커트를

입은 호라이즌은, 빈말 없이 예뻐보였다. 

레이첼은 내심 감탄하며 제멋대로 뻗친 호라이즌의 머리를 빗질해

주었다.


"흠, 레이첼의 평소 센스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법 얌전해 보이는 옷을 추천해주셨군요."

"나라고 다 요란한 옷만 갖고 있는 건 아니라구. 감사인사는?"

"... 월급 감봉한 거 취소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이첼."


레이첼은 배시시 웃으며 아끼는 미니 숄더백을 호라이즌에게 걸어주었다.


"굳이 이런거까진..."

"어허, 얘가 진짜 뭘 모르네. 그냥 단정해보이는 옷차림에 포인트를

주는 거라고 이게. 패션은 언니만 믿어."


호라이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니 옷을 훔쳐 입은 듯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제법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이 보였다.


"나쁘지 않군요."

"이제 아저씨 홀딱 젖기 전에 우산 갖다주고 와. 슬슬 퇴근 시간

아니야?"

"알겠습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레이첼."

"어? 뭐야, 외박할 것 같이 말하니 왜?"

"기분 탓입니다. 그럼."


레이첼은 우산 두개를 챙겨든 호라이즌의 손목을 제빨리 낚아챘다.


"우산은 하나만 들고가."

"어째서죠?"

"그래야 하나 가지고 같이 쓰지."

"비효율적입니다."

"원래 연애는 효율 따지는 거 아니야."


호라이즌은 뭐라고 따지려다 입을 다물었다. 더 실랑이했다가는

진짜로 마크가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살지도 모른다.

호라이즌은 레이첼에게 빌린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마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입술을 깨물며 너무 사람 좋은 자신을 원망했다.


***


마크 핀리는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빗물로 샤워하고 있었다. 어릴 땐 내리는 빗속에서

뛰놀며 물 웅덩이를 찰박거리기만 해도 재밌었는데, 지금은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걸 보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전화해도 우산을 들고 데리러 나와 줄 가족도 없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던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소나기이길 바라며 그는 비가 그치는 것을

기다려보기로 작정했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조금씩 홀짝이며 빗소리와 함께

바깥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운치가 있었지만, 시곗바늘이 돌아감에

따라 조급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야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오른쪽 주머니, 사적인 용도의 핸드폰.


"네, 마크입니다."

"우산, 있습니까?"


호라이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조바심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진다.

이래서 자신은 현장을 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표정관리를 못 하는

요원이라니, 쓸모가 없지.


"애석하게도, 그치는 걸 기다리는 신세라네. 회사에 갇혀서 말야."

"1분드리겠습니다. 내려오십시오."


호라이즌은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혐오한다.

마크는 책상 정리도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뛰어내려갔다.

사실 그녀가 시간약속을 싫어하니까 서두른다, 라는 건 그 나름의

핑계일지도 몰랐다. 마크는 그냥 1초라도 더 빨리 호라이즌을

보고 싶었다.


"헉, 헉. 안 늦었지?"

"아슬아슬했지만, 참작가능한 정도입니다."


무릎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르던 마크는 그제서야 호라이즌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오늘의 호라이즌은 '멋지지' 않았다.

(그림 출처 https://arca.live/b/counterside/49378559)

"호라이즌, 자네..."

"오늘만큼은, 외모 품평을 허가합니다."

".. 예쁘군. 정말이야."

"우산 가져다줬다고 아첨하는 거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하하.. 그럴리가 있나. 난 거짓말을 잘 못해. 그래서 사무직만 하는 거지."


호라이즌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그윽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로봇이 있을까? 

더 이상 마크에게 그녀는 단순한 로망이 아니게 되었다. 


"제가 변심하기 전에 우산 밑으로 들어오십시오."

"..우산은 하나 뿐인가?"

"불만 있습니까?"

"그럴리가! 자네답지 않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네."


마크는 호라이즌의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물리적인

키 차이가 그 둘 사이의 낭만을 방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잠시 무례를 허락해주겠나?"


마크는 호라이즌의 젖은 어깨를 감싸며 좀 더 바짝 붙게 만들면서

그녀쪽으로 우산을 좀 더 기울였다.

여신님을 젖게 만들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호라이즌의 보폭에 맞추다 보니, 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늘어졌지만

그는 즐거웠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는 퇴근길은, 행복이었다.


"예쁘군."

"야경이 말입니까?"

"...야경은 배경일 뿐이지."


호라이즌은 더 캐묻지 않았고, 마크도 설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바짝 달라붙은 덕에 어차피 그의 심장박동이 호라이즌의 프레임을

울리고 있었고 그 의미를 그녀가 모를리가 없었다.

호라이즌과 레이첼의 우산 하나 대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비가 그친지 꽤 오래되었지만, 마크와 호라이즌은 그것조차

모르고 하나의 우산 아래 꼭 달라 붙은 채 별과 달이 뜬 밤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