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9296232
"얘 좀 봐, 아주 곤히 자네."
"귀, 귀엽다."
"뭐 먹는 꿈 꾸고 있을까?"
"멧돼지, 다 너 같은 줄 알아?"
'다 들리거든요?'
크리스는 귀가 밝았다. 언제 잠들었는진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별안간 4명의 여자 목소리가 자신을
에워싸서 일어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네명의 시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굴러온 돌을 향한 박힌 돌들의 열렬한 관심에,
크리스는 온 몸이 따끔따끔한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고 있었다.
"안 자지?"
"으히이이익?!"
남들보다 귀가 밝은 만큼, 귀가 예민한 크리스의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서윤의 낮고 싸늘한 목소리와 숨결은 그녀를 소름끼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하하, 귀여워. 자지란 말에 깜짝 놀란거 아니야?"
"헉, 허억..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후후, 어리게 생겼으면서 발랑까졌네."
크리스는 얼굴이 빨개져선 서윤을 향해 너무하단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그녀의 짓궂은 장난 덕에 눈을 뜰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는 크리스에게 여자 넷의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그럼 차례대로 우리 소대원 자기소개가 있겠습니다, 와아~"
서윤이 박수를 치자 다른 소대원도 따라 쳤고, 크리스는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마지못해 박수치는 시늉을 했다.
리더인 서윤의 주도하에, 알트소대와 크리스는 대충 자기소개와
통성명을 마쳤다.
이래 봬도 크리스는 나름 몇번이나 사선을 넘은 군인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인물들을 잘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죽고싶어서 환장한 사람 옆에 있으면 죽기 마련이고,
이용하기 쉬운 사람옆에 있으면 떡고물이 떨어지는 법이다.
그녀는 빠르게 알트소대원들의 면면을 스캔했다.
역시 정식 태스크포스에 소속된 소대답게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리더 서윤, 아까부터 크리스를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왜 하필 자신을 핑거링의 달인이라고 소개 했을까? 게다가 가슴이 크다.
소빈, 소심해보이지만 베테랑 군인 크리스의 직감은 계속해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 여자에게 잘 못 보이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게다가 가슴이 크다.
유진, 말보다 행동이 앞설 것 같은 행동파의 느낌을 주는, 성실한데
멍청한 부사관 같은 여자다. 옆에 있으면 고생길이 훤할 것 같다는
뜻이다. 게다가 가슴이 크다. 그리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로니아가 아닌 다른 나라들은 다들 이렇게 훌륭한 영양상태덕에
풍만한 발육을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니아, 이게 나라냐..
샤오린, 틱틱거리고 사나워보이는 인상이지만...
크리스는 왠지 모르게 그녀가 제일 맘에 들었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드디어 시선을 둘 곳을 찾았다고 생각한 크리스였다.
크리스와 눈을 마주친 샤오린이 살짝 지어보인 미소에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크리스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들은 서로 자신보다 작(다고 판단되는)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 기뻤다.
"자, 자. 그럼 오늘 새롭게 팀에 합류한 귀염둥이를 위해 회식이나
할까 얘들아?"
"회식! 좋지!"
"메뉴는 그, 그거야?"
"그거..라뇨?"
크리스는 일사불란하게 추진되는 회식이야기에 긴장 반, 기대 반이었다.
맛있는 것을 먹기 힘들었던 그로니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아니, 회식이 친해지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해지기도 전에,
이미 친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뭘 먹는다는 건 배려가
부족한게 아닌가? 크리스는 벌써부터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거' 라는건 또 뭘까?
"소빈아, 장보고 올게 고기 삶아 놔. 크리스 땅은 편히 앉아있고."
"따, 땅이라니.."
서윤은 크리스의 머리를 마구 헝클고는 홱 나갔다.
어쩐지 크리스는 벌써 서윤의 애착인형이 되어버린 듯 했다.
"어지간히 대장의 맘에 든 모양이네."
샤오린이 크리스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 거유 소대의 유일한
양심, 크리스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샤오린.. 씨."
"린이라고 불러도 돼."
샤오린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소대의 막내였기에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크리스가 동생처럼 보여 기분이 좋았다. 물론 있으나
마나한 타이니쁘띠가슴도 플러스 요소였다. 옆에 있으면 자신감이
붙는 기분이었다.
"린 씨, 회식있잖아요, '그거' 가 뭐에요?"
"아, '그거'.. 음."
그때 샤오린의 얼굴에서 크리스는, 분명 불길한 어두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을까, 부엌에서 고소한 삶은 돼지고기 냄새가
풍겼다. 그러고보니 꽤 오랜 시간 공복이었던 것 같다.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도는 데 왜 샤오린은 크리스에게 어두운
표정을 보였을까, 비건이기라도 한 걸까? 그제서야 그 빈약한
발육이 설명이 되는 듯 했다. 그동안 크리스는 그로니아의 열악한
환경탓에 다이너마이트 보디(진) 을 강제로 억눌려왔지만, 이곳에선
다르다. 알트소대의 가슴은 먼저 뛰기 시작한 경주견일 뿐,
고고하게 관망하던 치타, 크리스는 그저 웃음지을 따름이었다.
그때, 장을 보러 갔던 서윤이 요란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서윤이 돌아오자마자, 고소하게 입맛을 돌게 하던 고기
냄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이상야릇한 톡 쏘는 냄새가
크리스의 후각을 마구 유린하기 시작했다.
"큭, 이게 무슨..?"
재빨리 샤오린을 바라본 크리스는 내가 말했잖아,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초연한 얼굴의 그녀만 보일 뿐이었다.
"크리스 땅, 오래 기다렸지? 이제 맛있는거 먹자?"
크리스의 탱탱한 볼을 가볍게 꼬집는 서윤의 손에서도 예의 그
자극적이고 강렬한 냄새가 배어나왔다. 만성비염환자일지라도
코가 뻥 뚫릴, 어쩌면 뇌까지 직통으로 뚫어버릴 냄새가.
소빈과 유진은 분주하게 상을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수육이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지만 이미 상의 주인은 고기가 아니었다.
크리스의 후각은 서윤이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속 무언가에게
마비되어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역시 회식은 알싸하게 삭힌 홍어 삼합아니겠어?"
"키아, 이 맛을 잊을 수가 없당께!"
소심해보이던 소빈도 이제야 말문이 트인 듯한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표준어에 서투를 뿐이었나보다.
'홍어' 라고 불린 그것과 고기, 불그죽죽한 무언가를 함께 싸먹는
그녀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샤오린과 크리스만 빼고.
크리스는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코를 찡그리며 돼지고기만
몇 점 집어먹다 배부르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아야, 뺄 필요 없어야. 맘껏 먹어도 된당께."
"아, 진짜 괜찮아요. 잘.. 먹었습니다."
말을 하나도 더듬지 않으며 소빈은 구수하게 크리스를 만류했지만,
크리스는 한시바삐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본능적으로 식탁에서 멀리 떨어졌지만, 그녀를 어질어질하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냄새는 여전히 공기중을 떠돌아다녔다.
크리스는 자신의 카운터능력이 후각이 아니라 청각임에 내심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저 잠시 밖에서 운동좀.."
"먹자마자 운동하는거야? 하하, 완전 내 스타일인데! 좋아, 이따 같이
동네 100바퀴만 같이 뛰자고!"
크리스는 입에 음식을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자신의 등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치는 유진에게서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폐부깊이 들이마셨다. 매연? 미세먼지? 적어도 마셨다고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으니, 신선하고 맑은 게 아닐까.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후각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대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기분이라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크리스는
그대로 녹아 내리듯 쭈구려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샤... 린 씨."
샤오린은 짧은 치마를 정리하며 크리스 옆 자리에 앉았다.
역시 크리스의 사람보는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가슴은 마음의
크기와 반비례하는게 맞나보다. 샤오린만이 크리스를 챙겨주었다.
"대장 나라의 전통 음식이라는데, 좀 그렇지?"
"아하하.. 제가 깡촌 출신이라 적응이 잘 안 되네요."
"나도 아직 적응 못 했어. 아마 평생 못할지도.. 배고프겠다."
"아니에요. 제가 입이 짧아서.."
꼬르륵.
아주 만화같은 상황에 만화같은 소리로 허기짐을 드러내는
얄궂은 크리스의 위장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킥, 괜찮아. 나도 배고프니까. 우리끼리 뭐라도 좀 먹을까?"
"네,네!"
눈을 반짝이는 크리스는 정말이지 귀엽게 보였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샤오린은 언니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음식을
내오기 위해 숙소로 들어갔다.
뭘 먹게 될까?
크리스가 귀를 기울이자, 분주히 무언가 찾고 있는 샤오린의
발소리와, 전쟁통같은 식탁위에서도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세명의 소녀들의 담소가 들려왔다.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또 나름
다정해보였다. 알트소대에 배정받은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자, 받아 크리스."
"아, 린 씨..."
무언가 잘 못 됐다.
샤오린이 웃는 얼굴로 내민 것에선, 차라리 아까의 그 '홍어'가
사무칠 정도로 그리워지는 냄새가 났다. 아니, 이것은 이미
냄새의 범주를 넘어서서 거의 오라에 가까웠다. 먹으면 죽는다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살기에 가까운 오라.
"이건 우리 나라 전통 음식이야. 취두부라고.."
이 나라고 저 나라고 전통음식이 왜 다 이모양인걸까?
크리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루이제 씨가 거친 밀가루로
만들어 주던 블린이 그리워졌다. 오늘도 속으로 목놓아 외쳐본다.
그로니아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