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도 간간이 손님이 찾아왔고, 비는 시간마다 상품 관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계는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슬슬 문 닫을 준비 해야겠네.“

 

비가 내렸으니 가게 앞을 청소해두지 않으면 내일 아침엔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다.

 

빗자루를 챙겨서 문을 열고 나가는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채 피할 틈도 없이 부딪쳤다.

 

엄마야!“

 

이런, 미안하네. 다치진 않았나?“

 

사내가 중후한 목소리로 사과해왔다.

 

,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빈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사내를 바라봤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30대 사내였다.

 

눈높이가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것이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한껏 들어올려야 할 정도였다.

 

키도 훤칠하고 비율도 좋은 게 꼭 모델 같다.

 

사내가 오른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꽃을 좀 둘러보려 했는데. 혹시 벌써 장사가 끝난 건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니 오른손에 들고 있는 빗자루가 보였다.

 

아뇨! 아직 영업 중이에요. 퇴근하기 전에 가게 앞 좀 정리해두려고 해서. 들어오세요.“

 

그거 다행이군.“

 

사내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문틀 낮으니까 조심하세요.

 

!“

 

이 사람, 보기와는 달리 허당 인가?

 

가게 앞 진흙과 흙탕물 웅덩이를 빗자루로 쓸어내며 안쪽을 흘끔거리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게를 오가며 꽃을 구경하는 사내가 보였다.

 

어느 화분 앞에서는 잠깐 멈춰있기도 하고, 또 다른 화초는 시선만 주기도 하며 돌아다녔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사내는 이윽고 작은 분재용 화분 앞에 멈춰섰다.

 

쪽동백나무 묘목이 심겨 있는 화분이었다.

 

사내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들어가자 종소리에 사내가 돌아본다.

 

, 이제 문 닫을 시간인가? 나 때문에 퇴근이 늦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군.“

 

괜찮아요. 어차피 집도 가까워서요. 동백나무 좋아하시나 봐요?“

 

이 묘목이 동백나무인가? 이름은 모르는데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서.“

 

아무리 봐도 30대인데 말투가 묘하게 나이 든 사람 같았다.

 

사실은 동안일 뿐이고 겉보기완 달리 나이가 많은 걸까.

 

쪽동백나무라고 하는 종인데, 늦은 봄이나 여름 초입에 꽃을 피우는 나무에요. 하얀 꽃이 정말 예쁘죠. 꽃말은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서라는데, 참 로맨틱하지 않아요?“

 

추억이라, 낭만적이군.“

 

사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몸을 돌렸다.

 

늦어져서 미안하네.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배달주문 하나 하지.“

 

, . 어떤 걸 주문하시겠어요?“

 

사내가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이 주소로, 내일 아침 여기 있는 꽃 전부 보내주게.“

 

”...전부요?“

 

 

 

좋은 아침입니다, 부사장님.“

 

왼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며 사무실에 들어가자 이미 출근해있던 김하나가 이수연에게 인사해왔다.

 

. 좋은 아침이에요, 하나 씨.“

 

사무실 곳곳에 놓인 화분 때문인지 평소보다 공간이 조금 좁아 보였다.

 

웬 화분이죠? 하나 씨가 주문했나요? 건물 앞에도 화환이 잔뜩 있던데.“

 

아니요, 사장님이 시키셨다는데요. 아침부터 심부름센터 사람들이 와서 잔뜩 늘어놓고 가더라고요.“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사장실 문 앞에 서서 이수연이 가볍게 노크한다.

 

사장님, 이수연입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대로 열고 들어갔다.

 

자율 기동 모드로 전환되어있는 머신 갑이 센서를 빛내며 기계음을 출력했다.

 

돈을, 벌어, 와라. . . . .“

 

짜증 나게 이딴 건 왜 입력을 해둔 거야.“

 

사장실 한쪽 벽면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책장 옆 벽면이 열리고 통로가 드러났다.

 

짧은 복도를 지나 차원 함선의 장갑을 가져다 만든 문을 두드린다.

 

관리자님, 이수연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코핀 컴퍼니 최고 보안등급의 비밀 공간은 화분과 화초, 화환으로 가득 들어차 사람 한 명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다.

 

그 콘크리트 바닥의 꽃밭에서 태연히 인사를 건네는 남자.

 

어떤가? 방이 너무 살풍경해서 좀 꾸며봤네만.“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꽃을 이렇게나 많이 들여놓으신 겁니까? 화훼공부라도 하시려고요?“

 

딱히 이제 와 새로 배울 것 있나. 이미 알고 있는데.“

 

뭔지도 모를 묘목이 심겨 있는 화분 앞에 서서 가지를 정리하는 손길이 능숙하기 그지없다.

 

이수연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좀 과하신 것 아닌가요? 그 괴상한 깡통 동상과 화보 집 만으론 부족하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건 취미가 아니라 철없는 졸부라는 위장 신분을 위한 메소드 연기라고 이미 말했잖나.“

 

그래서 이건 진짜 취미라는 거군요. 나이도 많으신 분이 뭘 이제와서.“

 

관리자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래 산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세.“

 

갑자기 무슨 얘기죠?“

 

”100, 1000년이 지나도 자네가 지금 이 순간을 살며 느낀 감정들이 그대로 남아있겠나? 거기서 더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또 어떻고? 살면서 쌓아온 모든 인연과 추억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걸 수없이 반복하면서 앞으로 또 살아갈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란 참 어려운 일이야. 넓고 깊은 바다의 입장에서, 한 잔의 물이 어떤 의미가 있겠나.“

 

가지를 다 정리했는지 옆에 있는 다른 화분으로 옮겨가며 관리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일부러라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네. 누군가에겐 그것이 복수이고, 또 누군가에겐 애착이며, 고통이자 의무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관리자님에겐 그 무언가가 취미이고요?“

 

어떨 것 같나?“

 

돌아보는 관리자의 입가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혀있었다.

 

이수연은 그를 잠시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관리자님께는 지금 이 순간도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까? 저와 제 사원들은, 옛 동료들은, 시간이 지나면 희석될 한 잔의 물일 뿐인가요?“

 

글쎄 자네에겐 아쉽지만 그건 확인하긴 어렵겠군. 전에도 말했듯 더는 다음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축배든 고배든, 이번엔 나 역시 자네들과 함께 들 처지이지.“

 

침묵이 위치한 방 안.

 

천천히, 이수연이 체념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그만하겠습니다. 더 캐물어봤자 대답해주실 리도 없을 테니까요.“

 

하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게. 때가 되면 자네에게도 다 말해 줄 테니까.“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는 이수연의 눈길이 바닥에 놓인 한 화분에 닿았다.

 

이거 예쁘군요. 하나 가져가도 되겠죠?“

 

푸른 장미라, 보는 눈이 있군. 꽃말은 기적이라네.“

 

”...하필이면 재수 없게.“

 



통로로 걸어가며 이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 관리자님께서 뭘 하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회사 공금으로 하시는 것도 아닌데요. 엄한 데 열을 냈네요.“

 

”...크흠.“

 

뭔가 반응이 미묘하다.

 

”...관리자님? 영수증 어디 있습니까?“

 

, 그러고 보니 자네의 리액티브 소드, 출력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마침 개량이 끝났는데.“

 

영수증 어디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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