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miette handmade (threeandaview.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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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제, 눈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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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예기치 못하게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 슬픔에 남은 이의 삶이 잠기지 않게 하소서.


혼자되어 흘린 눈물이 목 밑까지 차올라도,


거기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헤엄쳐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소서."


- 김명희, '오월의 청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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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걸까.


얼마나 많이 먹혀왔을까.


루프가 반복될수록 주시윤의 눈은 푸른 빛을 잃어가다 못해 완전히 탁한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이젠 숫자를 세는 것조차 포기한 채, 주시윤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다시피 했다.


길이 있어도 걷지 않았다. 길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 미궁의 구조는 되살아날 때마다 바뀌어서 의미가 없다.


소름 끼치는 방울 소리가 들려와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카구라 가면을 쓴 괴물이 자신을 덮치려 하면 저항 없이 당해줬다. 뜯어먹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주시윤은 저항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죽어봤자, 이 질리다 못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미로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까.


결과는 정해져 있다.


자신은 무엇을 해도 이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은 무엇을 해도 스승인 힐데를 상처입히고 져버렸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은 그 무엇을 해도, 부모님을 이 두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업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춰져 있던 장막 너머의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대가는 무겁다는 개념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으로 다가왔다.


주시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탈출 시도? 세는 걸 포기할 만큼 질리게 해봤다. 그러니 자신의 저주받은 출생의 근원 같은 것도 알게 됐지.


마음의 문제인가 하여 몇 번이나 자기암시를 걸기도 해봤다. 일체유심조라 하여,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한 고승의 말도 있지 않는가.


결과는? 보란 듯이 실패했다.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몸을 비틀며 노력할수록 더 끔찍한 진실들이 주시윤의 목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가문 전체가 뱀의 몸을 만들기 위한 생산 공정과도 같은 것이었고, 가문의 모든 사람은 그 부품에 불과했다니. 농담도 유분수지.


그 모든 것을 알고 나니,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주시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주시윤은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허탈했다. 머릿속에 물이 들어차 쓸어 내려가듯 공허함이 감돌았다.


고작 이 따위 진실을 알기 위해서 스승님을 저버리고 루시아를 따라왔단 말이야?


이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스승님께 의절 선언까지 한다니 제정신이야?


납득할 수가 없어서, 너무 한심해서, 주시윤은 거리낌 없이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미친 새끼.


너 같은 건 평생 여기서 고통받아야 해.



"....."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속죄라도 하려는 듯 몸을 아무렇게나 다뤘다.


어차피 죽어도 부활하고, 나 같은 건 이렇게 고통받는 것이 맞으니까.


죽고, 깨어나고, 다시 죽고, 그 모든 순간을 끝도 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눈물 한 방울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허. 배은망덕한 새끼. 부모를 죽이고, 스승이자 은인의 마음에 대못을 꽂은 주제에 울지도 않네.


절망의 수렁에 몸을 맡기니 늪이 주시윤의 마음을 감싸 안아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나 같은 건 이대로 스러져 없어졌으면 좋을 것을.


어차피 뱀에게 이용당할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을.


그게 사실이라고. 주시윤은 정말 그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죽게 했고, 상처입혔고, 이제 그 자신도 사형대에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주시윤이라는 한 사람의 실존이, 마치 마지막으로 무너져내리는 건물의 외벽처럼 무너졌다.



"......"



사실은, 주시윤도 한 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힐데는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게 나라고, 불만이 있다면 덤비라고 말은 험하게 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속죄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부모님을 잃고 힐데와 단둘이 살 시절의 일이었다.


힐데는 주시윤이 잠든 늦은 밤에 방구석에 들어가 홀로 술을 마셔대곤 했다.


하루는 몰래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술을 마시는 힐데를 몰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작게 열린 문의 틈바구니 너머로 보이는 것은 작디작은 앉은뱅이책상에 안주 하나 없는 조촐한 술상.


마시는 사람조차 없는데 건너편에는 술이 따라져 있는 술잔이 두 개.


회한과 상실감에 찌든 눈을 하고 힐데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술방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 한줄기가 턱선을 타고 흘렀다.


거나하게 취한 것인지, 취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 힐데는 누군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짖으며 미안하다고 연거푸 되뇌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연화야, 한아, 정말, 정말 미안해. 하고.


들을 사람 없는 사과가 눈물에 젖은 채 적막한 방을 을씨년스럽게 울려댔다.


영특한 주시윤은 그 상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잔이 두 개인 이유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것.


술을 마시는 이유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


솔직히 주시윤은 힐데가 자신의 부모님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인제와서 왜 후회하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도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네 부모님을 죽였다'며 냉혹하게 내뱉는 그녀가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힐데가 부모님을 죽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녔던 이유였다.


그녀를 계속 따라다닐 수 있다면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시간이 흐르고 성장해가면서, 주시윤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힐데는 주시윤에게만큼은 유달리 서툰 모습을 보여줬다.


사람을 죽이는 냉혈한의 모습 뒤에는 서툰 보호자이자 엄한 스승이라는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다. 물론 그 동기가 부모의 목숨을 빚진 것이라는 점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주시윤의 생각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힐데가 쌓아올린 마음의 벽은 굉장히 높고 단단했다. 그녀는 자신의 벽 너머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자 했던 주시윤의 바람이 이뤄지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주시윤은 그 나름대로 힐데를 용서할 이유를 찾아 헤매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이유를 찾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같이 살아온 삶으로부터의 경험으로 알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 벽의 차가움에 질려서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해버린 것일지도.


가문 전체의 존재가 뱀의 힘을 되찾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알았다면, 자신이 힐데였더라도 그것을 필사적으로 숨겼을 테니까.


진실을 알아버린 이제는 당신이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아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다투면서 얼마나 아파했을지 아는데,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을지 아는데.


너무 늦었네요.


스승님.


인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봐야 무엇 하겠는가?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주시윤은 눈을 떴다. 항상 그랬듯 다르면서 같은 미궁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이번에는 확실히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



눈앞에는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품이자, 자신이 항상 붕대로 감아 뒀던 검붉은 장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이 검이 왜 여기에 있지? 분명 어떠한 무장도 갖지 못한 채 미궁에 떨어졌을 텐데.


이젠 하도 미궁을 헤매다 보니 헛것이라도 보이는 걸까.


평소의 주시윤이라면 의심하고 면밀히 살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이미 자포자기한 신세이다.


이 이상 무슨 일이 더 다가오더라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주시윤을 지배했다.


주시윤은 헛웃음을 지은 채 거리낌 없이 검을 잡았다.














시윤아.










"-?!??"



눈을 한번 감았다 뜬 것처럼,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세계가 일변했다.


검을 잡음과 동시에 다 쓰러져가던 일본식 저택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백지 같은 공간만이 주시윤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하여 주시윤은 혼란스러운 듯 좌우를 연신 돌아보았다.



"저건.....?"



사방을 둘러보다 말고 주시윤은 공터처럼 광활하게 뻗어 있는 하얀 공간의 저 너머에 문을 하나 발견했다.


문의 생김새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문에는 눈에 익은 걸쇠가 달려 있었고, 문의 앞에는 어린이의 방문에나 걸어둘 법한 팻말이 걸려 있었다.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려, 주시윤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눈 부신 불빛이 주시윤의 눈을 덮었다.













빛에 익숙해지자 익숙한 풍경이 주시윤의 눈을 반겼다.


소박하지만 따스한 분위기의 집 안이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거실 바닥의 티끌들을 잡아서 마치 빛의 숨결처럼 반짝였다.


부엌에는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식탁에는 수저와 물컵이 세 개씩 놓여 있었다.


어느 가정집에서나 볼 법한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주시윤은 그 하나하나의 시상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냐면 여긴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었으니까.



"시윤아."


 

누구지? 화들짝 놀라며 주시윤은 고개를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렸다.


들려온 것은 맑은 톤을 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미궁에 빠져 있어서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동시에, 이 미궁에 가둬놓고 자신을 농락하던 뱀의 흉계는 아닐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시윤아."



이번엔 중후한 느낌의 남성의 목소리가 자신을 한번 더 불렀다.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의심이 싹튼 채였지만, 본능적으로 주시윤은 목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에겐 의심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씩 있다.


누군가는 사랑 앞에서, 누군가는 신 앞에서, 누군가는 가족 앞에서, 의심보다 본능이 앞선다.


부모님을 잃고,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있던 주시윤에게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쉽사리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둘러 거실을 지나쳐 걸어 들어가니 왼쪽과 오른쪽에 방문이 보였다. 기억이 맞다면 부모님의 방은 여기서 오른쪽이었다.



""시윤아.""



다시 한 번,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시윤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부모님의 방 문을 열었다.


오랜 반복과 단절로 인해 죽어버렸을 가슴이, 마음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래. 기억났다. 잊어버리는 것이 이상하다.


이 정겨운 목소리. 따스한 음감.



".....!!!"


"아들. 잘 잤니?"


"일어났어, 시윤아?"



주시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가장 원했지만 기억해낼 수 없었던 바로 그 기억.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돌아가셨을 자신의 부모, 주한과 연화였다.



"어머...니... 아버지....?"



인지를 한참 뛰어넘은 광경에 주시윤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그리움과 정보를 처리하는 이성이 충돌하여 사고에 잡음을 일으킨다.


싱긋 웃으며 주한과 연화는 침대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주시윤에게로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주시윤은 소리쳤다. 날카로운 거절이었지만 한편으론 눈물을 담아 애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울렁였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는지, 주한은 살짝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골랐다.



"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날, 날 속이려 하는거죠? 여긴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미궁이고, 전 여기서 도망치려고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었어요. 그런 제가 당신들이 진짜 어머니, 아버지인지, 뱀이 보낸 부하들인지, 어떻게 믿죠?! 어떻게 믿냐고요!!"


"아들... 그, 지금 좀 많이 과열된 것 같은데 일단 진정을 하고...."


"몇백 번을 죽어야 했어요. 모든 추악한 진실들을 마주하고,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존재인지 깨달아가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었다 깨어나길 반복했다고요!!!


그런 내게 인제 와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죠? 뱀이 준비한 환상이라도 되는 겁니까? 끝까지 마음을 짓밟아놓고 제일 약해졌을 때 드디어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입니까? 제가 뱀이었다면 그랬을 텐데요! 그 자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당신들이 정말 내 아버지, 어머니일 리가 없어. 두 분은 이미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이 내 손으로, 내가!!!"



내가 죽이는 것을 봤으니까.



"내가.... 내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주시윤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무릎을 꿇은 채 그는 두 손을 시야에 가득 담고 덜덜 떨었다. 당장 지금도 부모님의 선혈이 손에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주시윤을 진정시키려고 팔을 뻗기만 할 뿐, 주한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보는 주한의 눈에도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뭐라고 말을 건네고 싶어도 미어지는 가슴의 고통이 그것을 방해했다.


훌쩍이는 소리, 애달프게 떨리는 숨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침묵을 깬 것은 연화의 목소리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



주시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 일곱 글자. 대단한 말도 아닌 그저 일곱 글자에 불과한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마음이 마치 울컥울컥 피를 쏟는 것처럼 아파왔다.



"어떻게, 그게 어떻게 제 잘못이 아닌데요....?"


"네 잘못이 아니야. 시윤아."


"그걸 어떻게 판단할 수 있냐고요!! 말 한마디 건넨다고 해서 제가 엄ㅁ, 당신들을... 당신들에게 했던 기억이 사라지기라도 하나요? 그런다고 해서, 제가 했던 행동이 지워지진 않는다고요.....!!"


"시윤아."


"그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마!!!!!!!"



한 섞인 주시윤의 절규가 방을 가득 울렸다. 이상할 정도로 아파오는 가슴을 움켜쥔 채 주시윤은 숨을 마구 몰아쉬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났다는 감동과 더불어 양심의 가책이 주시윤을 옥죄었다.


뱀이 보여준 기억에서 부모님을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인제 와서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자격으로 부모님을 뵙겠는가?


위로받을 자격 같은 건 내겐 없을 텐데.


연화는 무릎을 꿇고 있는 주시윤을 향해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이 어깨 위로 느껴져 주시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어떤 마음을 갖고 뱀과 대면했는지 알아. 넌 그저 아주 잠깐, 약해졌을 뿐이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앞에 잠시 흔들렸던 것뿐이야."


"그만...."


"네 잘못도, 우리 잘못도 아니야. 시윤아.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예상은 가지만, 그날의 진실에 대해서 놈이 곧이곧대로 알려줄 리가 없잖니?"


"그만.... 그만해요...."


"더 이상 거짓된 기억을 받아들이지 마. 시윤아. 네 자신을 미워하지 마."



불규칙해졌던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갔다. 그저 서로 껴안고 있을 뿐인데, 마치 푹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몸이 편안해졌다.


연화의 말투는 한없이 다정했다. 연화의 말이 들려올 때마다 주시윤의 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눈물이 샘솟아 흘렀다.



"바깥에서 네 친구가 했던 말, 기억해? 끝까지 의문을 표하고 답을 찾으라 했던 말.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하니까, 선택을 멈추지 말라던 말."



'왜 그랬는지를 듣고, 끝까지 고민하고, 다음에 나아갈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순간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더 좋은 선택을 해야 하니까.'



루시아와 나눴던 대화를 연화가 언급하자 주시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다 보고 있었어. 엄마가 네게 줬던 그 검에 네 아빠랑 내 영혼이 조금 들어가 있었거든."


".....!!"



예전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모이며 퍼즐이 완성되어갔다.


어린 자신이 힐데를 따라 나섰을 때도, 코핀에서 태스크포스 임무를 다닐 때도, 루시아가 병문안을 왔을 때도, 검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미궁 한복판에 덩그러니 꽂혀있기까지. 검붉은 빛깔의 장검은 신기할 정도로 언제나 주시윤의 곁을 지켰다.


연화는 주시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윤아. 아직 엄마랑 아빠를 믿고 있다면, 우리 손을 잡아주지 않겠어? 모든 진실을 알려줄게. 네 조상과 우리 가문의 이야기,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전부."


"....."



이것마저 거짓이라면 어떡하지? 뱀과 마주했을 때처럼 그 기억으로 인해 또 무너진다면?


망설임이 주시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 상황이 뱀이 만들어낸 것인지, 정말로 부모님이 자길 보러온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혜와 순수함은 미궁 속에서 깨어지고 부서졌다. 더 이상 주시윤은 자신의 시선으로 사실을 판단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가 옳다고 믿고 행동했던 것들이 모두 뱀이 짜놓은 판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주시윤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었다.



"시윤아. 그 소녀가 했던 말대로, 이제 진실을 마주할 때야. 다음에 나아갈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주한은 주시윤에게로 다가와서 그 손을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의 따스함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왔다.


그 순간 마치 섬광처럼, 루시아가 했던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실제로 지금껏 찾아 헤맸던 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면,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은 것이라면....


아빠인 주한의 목소리에 힘입어 천천히, 주시윤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며 연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치 빛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방 내부의 벽과 바닥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껴안고 있는 연화처럼 빛이 주시윤을 감싸안아갔다. 곧 주시윤의 시야가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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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아아아....! 이거 풀어줘요.... 아파.... 아파요.... 몸에 막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요.... 너무 아ㅍ하하^@&하$하하하하하!! 그깟 조잡한 용혈로 사용하는 속박 따위, 이 아이의 몸에는 통하지 않는다!!!! 널 조각조각내고 썰어서 죽여버리겠다!!! 너희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제물이 되어라!!!!!"



눈 앞에 나타났던 것은 뱀이 보여줬던 부모님이 죽을 당시의 기억.


연화의 검이 꽂힌 마룻바닥으로부터 솟아난 핏빛의 에너지가 밧줄의 형태로 어린 주시윤을 묶고 있었다.


기존에 봤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누구도 죽은 사람은 없었고, 힐데는 방금 도착했는지 숨을 몰아쉬며 주시윤을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시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기억이 흘러갈까봐 일부러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다른 이야기를 보게되진 않을까 싶은 좁쌀만큼의 기대도 있었지만, 뱀이 남긴 기억의 상흔이 그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녀석이 그릇으로 삼으려던건 제가 아니라 시윤이였나봐요 스승님...!"


"시윤이가 삼켜지는건 저희 힘으로 억제하곤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본래라면 이런 식의 세계침식률을 끌어올리는 징조가 관측됐을 시, 가차없이 처단해야 했다.


한순간의 망설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을 불러온다. 클리포트의 마왕이란 것들은 그런 인간의 연약함이 주는 틈을 항상 노리며 세상을 집어삼켜왔다.


따라서, 힐데는 주시윤을 즉시 죽여서 뱀의 포식을 끊어내야 했다.



".....큭...!"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검을 든 손에 망설임이 감돈다.


주한과 연화 부부의 스승으로서 아이의 탄생을 함께하고, 아이가 커오는 과정을 자주 봐왔다.


스스로 쌓아올린 인연의 끈을 다시 끊어내야 할 것을 강요받는다. 순응하기도, 발버둥치기도 해봤지만, 아직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승님. 이기적인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갈등에 잠식되어가던 힐데의 의식을 깨운 것은 주한이었다.



"시윤이의 몸을 지배하려 하는 뱀의 연결로를 저희 부부에게로 돌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뱀의 침식이 저희에게 옮겨갈거에요."



"뭐!? 이 상황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그 뒤에 스승님께서 저랑 연화를 마무리지어주세요. 그럼 시윤이는 안전할거에요."



힐데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단호한 말투로 연화와 주한에게 버럭 화를 냈다.



"미친 소리 집어치워!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게 될 너희 아이는 어찌 하겠다는 거냐! 한창 커가야 할 아이가 엄마도, 아빠도 없이 자라야 한다는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아?!"


"그래서 이기적인 부탁이라고 말씀드렸던 거에요.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뱀에게 영혼을 먹힌 인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거.


저희 선조님도, 저희 아버지도, 가문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먹혔던 거. 스승님이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그렇게 가문 사람들이 죽어왔다는 걸 안다면, 부모 없이 자라는게 어떤 지옥인지 네가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 그걸 알면서 네 아이 역시 똑같은 지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거냐!!"



누군가를 위해 똑같은 우를 범하려는 자.


우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


운명의 끝이 내린 딜레마. 어느 쪽도 정답이라 할 수 없는 두 의견이 격돌한다.



"이대로 시윤이를 영원히 뱀에게 넘겨줘 뱀을 부활시키느니, 저희 부부가 죽는 것이 이 아이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주한, 너!!!"


"이미 충분히 상의해왔고,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연화도, 저도."



불같이 화를 내는 힐데에게 주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스승님도 아시잖습니까? 클리포트의 마왕이란게 어떤 족속들인지. 두 명 분의 목숨으로 시윤이랑 세상을 동시에 구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교환이죠."


"허락 못한다. 자기 목숨을 뭘로 보는거냐!! 난 더는 누군가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아. 너희가 죽는 것 말고도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없어요 스승님. 시윤이의 영혼이 침식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요. 이대로 시간을 더 끈다면 정말로 뱀이 육신을 입어 봉인을 깨고 현실에 강림할지도 몰라요.


가장 순수한 용혈이라니 뭐니, 지금 지껄여대는 놈의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가봐요."


"그러니까 스승님. 저희 대신 시윤이를 보살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또 이런 식으로, 잃어야 한단 말인가.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였는데, 또 이렇게.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빌어먹을 대의 하에. 또 다시.


힐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맡겨진 사명은 언제나 그랬듯 선택지란 없는 길로 그녀를 이끈다.


어린 주시윤을 묶어두고 있던 용혈의 힘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주시윤의 몸을 먹어 치우려는 뱀의 발광 역시 갈수록 심해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것 뿐.


강제로 빼앗기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너희의 선택을 존중한다며 등을 떠미는 것 뿐.



"....고맙습니다. 스승님."


"잊지 않을게요. 스승님."



힐데를 향해 아련한 미소를 남기고, 연화와 주한은 자신들의 몸을 제물로 한 봉인을 작동시켰다.


어린 주시윤의 몸을 묶고 있던 핏빛의 속박이 더욱 강해진다. 공기가 점점 탁해진다. 끌고 오려는 힘과 눌러앉으려는 힘의 격돌이 공간을 찢을 듯이 진동시켰다.


연화와 주한은 각자가 가진 용혈과 공명의 힘을 이용해 뱀을 받아들일 통로를 구축하고, 어린 주시윤에게 흐르는 뱀의 침식을 자신들에게로 옮기려 했다.


애당초 뱀은 봉인당한 상태라, 다른 방향에서 일방적으로 힘을 흘려넣는 것 외의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주시윤이라는 저수지를 향해 수로를 파 내려가는 뱀보다 빠르게, 연화와 주한의 쪽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뱀과 만나버린다면 그만이다.


성공한다면 주시윤에게 뚫려있는 뱀의 길은 쓸모없게 될 터.


어린 주시윤의 주변에 감돌던 핏빛의 힘이 빛을 잃고 검게 변해갔다. 연화와 주한은 땅에 꽂힌 칼의 손잡이를 함께 잡았다.


곧 뱀의 힘이 연화와 주한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몸이 두 동강날 만큼 끔찍한 고통이 두 사람을 덮쳤다.


죽여라, 제물이 되어라 따위의 환청이 들려왔고, 온 세계가 핏빛으로 뒤덮였고, 미쳐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바닥을 뒹굴며 몸서리칠 것만 같은 고통에도 연화와 주한은 굴하지 않고 칼의 손잡이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또, 또, 또!^@ 또(%, 또 무의미!@한 저항이냐!&$!! 이 제?%물로 쓸 가치조차도 없는 폐기물들 따위가!!!! 죽(%^어!!!!!!!!!"



갑자기 주시윤의 몸을 묶고 있던 속박이 무너졌다.


정확히는, 속박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었음에도 뱀의 힘이 순간적으로 훨씬 강했던 탓에 묶여있던 몸이 풀려났다.


주시윤의 몸을 입은 뱀은 주한과 연화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위험해 연화야!!"



주한은 연화 대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뱀의 주먹을 정통으로 받아냈다.


육편이 프레스기에 짓눌리며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에게서 나올 수 없는 엄청난 괴력. 주한의 내장이 뒤틀리고 터지며 맞은 부위에 구멍이 뚫렸다.


주시윤의 몸으로 뱀은 광기서린 웃음을 지었다. 주먹질만 해도 죽어버릴 만큼 나약한 족속들이다. 생명 활동이 곧 멎으면 이 시덥잖은 속박도 무너지겠지.



"-뭣?!"


"커, 으으... 억....!!!"



그러나 뱀의 기대와는 달리 주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죽음의 기로 앞에 서 있는 순간에도, 주한은 한쪽 팔로 뱀이 점령한 주시윤의 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움직임을 봉쇄했다.


뱀은 황급히 팔을 뽑아내려 했지만 단단히 잡힌 팔은 뽑힐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지?! 주먹질 한방에 이미 육체는 죽었을 터인데, 어디서 도대체 이런 힘이 날 수가 있단 말인가?


뱀이 잠식한 주시윤의 얼굴에 사랑하는 아들의 웃음을 겹쳐본다. 핏발 선 눈으로 주한은 온 힘을 끌어모아 거세게 소리쳤다.



"우리, 아들.... 몸....에서, 꺼져라... 이.... 개자식아!!!!"



그 사이에 연화는 자신에게 내재된 용혈의 힘을 완전히 개방하여 주시윤의 머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연화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붉게 물든다. 영혼에서 영혼으로 건네지는 정언명령이 마왕의 힘의 파편에 직접 닿는다.



네가 있을 곳은 거기가 아니야.


우리에게 오거라.


원래 있어야만 했던 곳으로, 그대를 이끄노라.



"닥쳐!! 닥쳐!!! 닥쳐닥쳐>!@닥쳐닥?^#쳐닥*?%ㅊㅕ닥쳐닥%^ㅊㅣ라고!!!! 이건 ㄴㅐ꺼야!!! 내 몸ㅇㅣ야!!!! 너*#희 따위가 감ㅎㅣ 내게 이-"



오라. 오라. 나의 저주여. 나의 과업이여.


그대가 있어야 할 곳에 거하라.


우리의 몸을 산제물로 영광과 함께 받으라.


우리를 먹고, 네 꿈은 거기서 좌절될지니.



"크ㅇㅏ아*$*@아ㅇㅏ아ㅇ$*아아(%@아아!!!!!!!!! 이 버!^러지 같은 부>?&품들이!!!!!! 그런다고 내가 이 아이를 포%(기할 것 @^같으*냔 말이다아아아아!!!!!"



힘이 전이되어간다. 광란에 빠져있는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어 갔다.


탁해졌던 공기도 점점 가벼워진다. 공간을 찢어발길 기세로 휘몰아치던 힘의 파동 역시 잠잠해졌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천천히 쌓여왔던 뱀의 힘은 어린 주시윤의 몸을 완전히 뺏지 못한 채, 전부 주한과 연화에게로 흘러가고 말았다.


아직 인간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찰나. 주한과 연화는 하늘 위로 고개를 들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제3의 벽을 넘어 관객에게 말을 걸듯, 마치 저 너머에서 주시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주시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머니...!! 아버지....!!"



기억 저 너머에서 주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주한과 연화를 불렀다.


고통과 죽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분명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편안해보이는, 한없이 밝은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안 돼.....!!!"


""우리 아들. 사랑한다.""



그것이 두 사람이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



공간이 찢어질 기세로 울려댔던 힘의 공진이 멎어갔다.


뱀의 힘이 주한과 연화를 완전히 잠식하자, 어린 주시윤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죽, 어라... 피의, 추, 축제...승님... 를....."


"얼영,원한 살, 육과 멸...망을발 부맞이탁...하...라..."


"......."



뱀에게 영혼을 먹혔을 텐데도, 주한과 연화는 주시윤 쪽으로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힐데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죽어서까지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일까.


힐데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저 조용히 검을 들어, 주한과 연화를 단칼에 베어넘겼다.


살을 써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났다.


흘러나온 피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저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적막이 감도는 거실 안에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흘렀다.



"약속.... 지키겠다...."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억지로 삼킨다.


주검이 된 주한과 연화의 손을 잡은 채, 힐데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의 앞에 무릎을 꿇은 힐데를 뒤로하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느낌과 함께 주시윤은 어디론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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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시윤은 다시 어린 시절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는 주한과 연화가 자기 손을 잡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미안해. 시윤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랑 네 엄마는 네 몸을 잠식하려던 뱀으로부터 널 끊어내려 했단다. 우리가 죽은 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했던 결과였지,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어."


"이 모든 걸 네가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있어. 넌 강제로 유폐되었고, 깊은 미궁 속에서 몇 번이고 잘려나가는 경험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네가 우리를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엄마랑 아빠는 널 비난하지 않아."


"....왜요?"


"널 사랑하니까.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우리가 죽음을 선택했던 것 역시 널 사랑해서였고."



사랑한다.


기억 속에서 들었던 그 말. 4글자에 불과한 말일 뿐인데,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울컥거리며 무언가를 토해내는 느낌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마음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고쳐지는 과정이었다.


주한과 연화의 말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기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아들로서, 주시윤의 마음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침묵의 끝에 울음 섞인 채 흘러나온 말은 주시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혼자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에 갇힌 채로,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인제 와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엄마랑 아빠도 마찬가지야. 우리 둘뿐만이었다면, 이렇게 시윤이 널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둘... 뿐이라니요?"


"원래라면 깨어날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저 바깥세상에서 우리 시윤이를 위해 싸워주는 이들이 있었어.


신묘한 바람의 힘을 다루는 한 아이가 네 엄마의 검에 깃들어 있던 우리 둘의 사념을 깨웠고, 그것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주었단다."



바람의 힘을 다루는 아이라면 나나하라 가문의 가주인 치나츠 밖에 없다. 치나츠가 여기에 왔다니?


그제야 주시윤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인지할 수 있었다.


치나츠 뿐만 아니라 아마 힐데도, 루시아도, 바깥에서 자기 몸을 빼앗은 뱀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랑 아빠가 이렇게 시윤이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우리 둘만의 힘이 아니었어.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모여 우리가 해방된 거고, 이렇게 기적이 이뤄진 거야."


"그러니 시윤아. 이젠 앞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렴. 우린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네 주변엔 수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잖니."


"......"



주시윤의 눈시울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위안이 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싸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듣는 것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듣는 것도.


주시윤은 눈물을 쏟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촉촉해진 눈가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요."


"그래."



다신 못 잡게 될까봐, 주시윤은 연화와 주한과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괜찮아. 아들. 괜찮아."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저는-"


"그런 생각 금지. 백 번을 생각해도 시윤이 넌 우리 아들이야. 정말 소중한 선물, 빛나는 선물, 엄마와 아빠가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



혼자서 몇 번이고 자신을 부정했지만, 연화와 주한은 몇 번이고 그를 긍정했다.


연화는 손을 뻗어 주시윤의 얼굴로 가져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더 이상 주시윤의 주변에 죽음은 없었다.


주시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절망과 죽음의 벽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처와 흉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 어떤 벽일지라도 무너뜨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주시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어머니와 아버지는 날 이렇게나 사랑하고 계셨구나.


죽음이 우릴 갈라놓았을지라도.


계속해서 내가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계셨던 거구나.



"시윤아. 우리 시윤이가 과거에 묶여 있는 걸 볼 때마다 엄마 마음도 아파. 하지만 이젠 눈을 뜰 시간이야. 자유로워지고, 채워지지 못한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갈 시간이야. 


너도 진심으로 웃고, 재미있게 살아도 돼. 그래도 괜찮아. 그러니까, 사랑하는 우리 아들.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주겠니?"


"......"



맑은 푸른 빛의 눈동자가 주한과 연화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순수함으로 빛나는 눈, 사랑을 속삭여주는 입, 사랑을 표현하는 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 하나하나를 천천히,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각오로 마음에 새겼다.


네.


그럴게요.


반드시 그렇게 할게요.


주시윤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해야 할 말이 많았고, 풀어내야 할 감정의 산이 무너져 내려왔다.


대신 주시윤은 팔을 들어 연화를 끌어안았다. 주시윤이 처음으로 의지를 갖고 취한 행동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주시윤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주한이 연화와 주시윤을 함께 끌어안았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나누지 못했던 감정과 잃어버린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행복한 고통이 마음을 한가득 수놓았다.


온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서글프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처럼 그는 해일처럼 덮쳐오는 감정에 자신을 내던졌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눈물의 강을 이루는 동안, 주한과 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꼭 안아준 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것은 더 이상 18살의 장성한 소년이 아니었다.


7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품에 안긴 채, 그 나이대에 맞는 모습을 하고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울고 있는 그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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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파트인데 자꾸만 쓰는게 늦어졌네....


나 스스로도 쓰면서 눈물 펑펑 흐를 만큼 슬픈 씬을 쓰고 싶었는데 삼류 신파극이 되어버린 느낌.


주시윤의 슬픔과 절망, 다시 부모님을 만나서 느끼게 된 위안과 사랑이 잘 전달된다면 좋겠다.


한 글만 20몇편을 넘게 파다 보면 이새낀 언제까지 이거 쓸거지?? 싶은 생각도 들고 뇌절도 보이고 흥미도 떨어질거임. 그럼에도 계속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싶음.


아직도 애정 갖고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너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