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벼룩, 이리 와 보세요. 논의할 게 있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엘리자베스는 도도한 눈빛으로 로이를 불러냈다.

언제쯤이면 물벼룩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줄까하고 투덜거리며

그녀의 맞은 편 의자에 앉은 로이는,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쳐진

신문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의력이 산만하다고 해야

할까요. 논의할 내용은 신문의 구직광고에 관한 것이지만, 제 말도

듣지 않고서 바로 딴 것에 한 눈을 파는 것은 좋아보이진 않네요."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 쉽게 말해, 쉽게."

"정말이지.. 고상함과 여유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단말이죠."


엘리자베스는 한 손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신문의 구석을 가리켰다. 로이는 순간 이 입만 다물면 천사같은

미녀 아가씨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로이는 자신이

그녀의 말대로 주의가 산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의 피아니스트처럼 가느다랗고 길쭉한 손가락끝이

가리킨 곳엔 그녀 말마따나 구직광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봉사정신과 헌신으로 잡일과 가사를 맡아줄 메이드 구합니다.'


"...이게 뭐?"

"광고주를 보세요. 이 이름, 기억하나요?"


기억 못 한다면 물벼룩 이하겠지만요, 라고 빈정대는 엘리자베스가

아니꼬워서라도, 로이는 어딘가 익숙한 광고주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 결과 로이는 엘리자베스의 인신공격성 매도발언이 

터져나오기 직전에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 학회의 노땅?"

"...아슬아슬했군요. 물벼룩, 기관은 고상하고 우아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귀족답게 말이죠. 노땅이라니, 하아.."


물벼룩은 얼마나 고상한 단어길래.

로이는 불평불만을 속으로만 삼켰다.

오랜 기간 엘리자베스와 협업한 경험을 토대로 삼아 볼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가는 그녀의 잔소리만 더 듣게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으니 한 번 더 설명하겠어요.

이 광고를 내건 자는 기관이 눈여겨 보고 있던 학회의 끄나풀 중 

한 명인 에밀 스미스에요. 아주 핵심인물은 아닐지 몰라도, 

학회와 꽤나 빈번하게 만남을 갖고 있는 것을 봤을 때, 기관은

잠입해서 정보를 수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메이드로 잠입합니다."


***


변장을 위해 푸른색 렌즈를 끼고, 머리를 짧게 묶은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웠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적지에

잠입한다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지는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설레기까지 했다. 기관장으로서, 귀족으로서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는 답답한 삶으로부터의 일탈이라 생각하니, 엘리자베스는 

일종의 해방감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임무 수행, 아니 소풍가는 느낌으로 도착한 에밀의 저택은

프리드웬 기관만큼 웅장하진 않았지만 소시민들은 압도할만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학회의 개 노릇을 하며 부를 긁어모은 부를

이용하여 세웠을,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고딕양식의 뾰족한 첨탑이  

저택 주인의 오만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는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낡은 경첩이 끼이익, 하며 비명을 지르듯 저택의 문이 열리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피곤해 보이는 집사가 그녀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신문의 구직광고를 보고 연락드렸던, 아멜리아입니다."

"아, 그 메이드."


집사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졸부의 집사답게, 교양이라곤 없어 보이는군요.'


엘리자베스는 그의 뒤를 곧장 따랐다. 내부는 학회에 연루된

자의 저택답게, 꺼림칙한 장식들과 조명, 문양들로 꾸며져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싸워야만 했다.


몇 분을 걸었을까, 집사가 엘리자베스를 이끈 곳은 응접실의

거대한 소파 뒤였다. 


"주인님, 먼젓번에 연락한 메이드가 왔습니다."

"흐흐, 그래. 알겠다."


엘리자베스는 주인님이라고 불린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짐승이 동굴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듯한 기분나쁜 목소리는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엘리자베스에게도

불쾌감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뭐하고 섰어? 주인님께 자기소개를 해야지."


집사는 엘리자베스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찌른 부위가 젖가슴인 것은 고의로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불쾌함과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고용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소파의 앞으로 돌아들어갔다. 


"아멜리아입니다."


치맛단을 잡아 올리며 고상하게 고개를 숙인 후 고개를 들자

엘리자베스의 눈에 보인 것은 침을 질질흘리며 헤벌쭉 웃고 있는

늙어 빠진 영감탱이였다. 뒷조사를 할 땐 이렇게 얼빠져 보이는

늙은이가 아니었는데,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에밀에겐 로이의 호칭 '노땅' 도 아까웠다.


"호오, 아주 곱상한 년이 들어왔군."


엘리자베스의 가늘고 고운 눈썹이 분노로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즐거운 소풍은 못 될 거라는 불안감이 그녀를 감쌌다.

에밀은 엘리자베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시선에 토할 것만 같았다.


"젖통이 좀 처지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의 맛이 있지."


아무렇지 않게 숙녀의 몸을 품평하고, '맛'을 논하는 역겨운 태도.

엘리자베스는 에밀을 향한 일말의 존중마저 잃어버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적개심이 드러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있는것밖에 없었지만, 약해보이는 그 모습이 오히려 에밀의 욕구를 자극한 듯 그는 비열하게 킬킬거렸다.


"이 년을 메이드장에게 보내라. 기초 교육도 잊지 말고."

"예, 주인님. 따라 와라."


메이드장이라, 하긴 이 큰 저택에 메이드가 한 명 밖에 없을 리가

없었다. 호재라고 봐도 좋을 듯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선 정보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업무상 자주 부대낄 메이드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에 들려오는 것도 많을 것이다.


당찬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기분 나쁜 집사의 뒤를 좇으면서도

저택내부의 구조를 비롯해 학회와 엮인 작은 정보하나조차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그 탓에 갑작스레 멈춰선 집사와

거의 부딪힐 뻔 했지만 탁월한 반사신경으로 피할 수 있었다.


"여기다, 계집."


집사는 으리으리한 보석들로 장식된 나무 문짝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아멜리아라는 가명을 댔음에도 이름으로 칭하지

않고 계집, 년 등으로 불러대는 이 못 배워먹은 놈팽이들에게

부아가 치밀었지만, 감정에 못 이겨 일을 그르칠 풋내기는 

아니었기에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 메이드들 유니폼이다. 갈아 입고 메이드장을 기다리도록."


집사는 엘리자베스에게 검은색 옷가지를 건네고는 멀어져갔다.


"메이드복이라...."


엘리자베스는 손에 들려진 옷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는 한번쯤 메이드복을 입어보고 싶었다. 

이번 잠입임무에 지원한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아가씨들은 귀엽고 예쁜 옷들을 입어보고 싶기 마련이니 어찌보면

그녀가 메이드복에 품은 환상이나 로망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레 메이드실의 문을 열고 내부를 살폈다.

제법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고급진 재질의 침대 네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구들도 호화스러운 원목재질이었고, 책장도 색색의

책으로 가득 들어차있었다.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코를 간질였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메이드의 복지는 꽤나 높은 수준으로 보였다.


메이드복으로 갈아 입으려던 엘리자베스는 받은 옷을 살펴보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 이건 뭐죠..?"


엘리자베스가 들어 올린 옷, 아니, 그것을 옷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천 쪼가리는 속옷에 가까웠다. 사실 옷 본연의 역할인 신체를 가리는 것에 있어서는 속옷보다도 못했다.

중요 부위부위마다 적나라하게 뚫려 있는 까닭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게 맞다면 메이드복은 프릴이 많고, 고풍스러운 긴 치마와 흰색 앞치마로 이루어진 옷이어야 했다.


뭔가 잘 못됐다.


엘리자베스는 그 음흉하기 짝이 없는 집사가 질 나쁜 장난을

친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헛된 기대는 곧 바로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세 명의 미녀가 예의 그 '유니폼' 을 입은 채

메이드 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