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입에 파리가 입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당장 입을 닫는 것을

권장합니다, 레이첼."

"으아니.. 방금 내가 들은 게 사실이야?"


호라이즌은 또 다시 설명해야 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레이첼은 어버버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동생같은 호라이즌이 수염 덥수룩한 오타쿠 아저씨한테 고백을

받았다는데, 충격 받지 않고 배기겠는가.


"농담 아닙니다. 마크가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어떻느냐고 

물었습니다. 진부한 휴먼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놈의 인기란."

"그,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호라이즌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침묵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뭐어?"


레이첼은 모종의 사유로 인해 마크 핀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고백의 대답을 '보류'로 받은 남자를 가엾다고 여길

만큼의 정은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마크에게 연민을 보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약간의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메이드와 마녀 코스프레에 환장하는 아재에게 호라이즌을 

넘겨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하.. 그 아저씨 아주 쬐애애애끔 불쌍하긴 하네."

"제가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을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내일 아침 또 그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익, 그 아저씨는 일도 안 해?"

"제법 시간 내는 것이 자유롭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러니 내일은

휴무입니다. 모레 뵙죠, 레이첼."


호라이즌은 레이첼에게 퇴근하라며 손을 휘휘 내젓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사무실을 나서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옷, 하루만 더 빌리겠습니다. 오늘 마크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꽤 맘에 들었거든요."

"똑같은 걸 또 입겠다고?"


레이첼에게 내재된 패피의 혼이 울부짖었다.

아무리 썸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지만 반응이 좋았다고 똑같은 옷을

이틀연속으로 입는다니, 오히려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 비에 젖기도 했으니까, 내일은 딴 거 입자. 내가 골라줄게.."


레이첼은 호라이즌에게 잘 어울릴 옷을 골라주면서도, 마크의

취향에는 들어맞지 않길 바랐다. 여전히 그녀는 속으로 호라이즌과 마크 커플의 성립을 반대하고 있었으니까.


***


이튿날 아침, 레이첼은 평소 출근시간보다 이르게 사무실에 

도착해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호라이즌의 표정이 미묘하게 실망스러움을

띄었다.


"레이첼이었습니까."

"뭐야 그 표정은? 왜 실망해? 언니 서운하게."

"휴무를 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미리 말하지만 추가 수당은 

없습니다."


호라이즌은 어제 레이첼이 골라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첼은 코디와 찰떡같이 어울리는 순백의 호라이즌을 보며

자신의 안목에 감탄했다. 묘하게 설레보이는 표정도, 호라이즌을

평상시보다 더 예뻐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나 없을 때 사무실에서 둘이 얼마나 꽁냥대려고, 신성한 일터에서

그러는 꼴은 못 보지."


레이첼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응접용 쇼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레이첼, 설마 사귀지도 않는 남녀가 쪽쪽거리겠습니까?"


호라이즌은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 심드렁하게 쏘아붙였다.

레이첼은 사실 쪽쪽거림 그 이상의 행동을 걱정한다는 것을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고백받고 나면 누구든간에 상대가 평소와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아니, 호라이즌은 사람이 아니라 그 운명에서 자유로울수 

있으려나?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호라이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혹여나 호라이즌이 마크에게 거절의사를 전할거라는 일말의 작은 기대마저 접어버렸다. 

레이첼은 이렇게 된 이상, 그 둘의 커플성립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어서 오십시오, 마크."

"호라이즌, 좋은 아침일세. 아, 레이첼 양도 있었군."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마크는 손에 무언가가 가득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호라이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뭡니까, 마크?"

"하하, 뇌물이라고나 할까."


마크는 쇼핑백을 뒤적거리더니 윤활유와 냉각수 캔을 꺼내들었다.


"이것은...!"

"헴스워스 로얄 임페리얼 프리미엄 에디션, 구하느라 제법 

애먹었지만, 최고급중에서도 최고급품이라더군."

"사귀죠."

"호,호라이즌?!"


레이첼은 경악에 찬 얼굴로 호라이즌의 이름을 불렀다.

보류라고 말한지 24시간도 채 안됐는데?

저 속물 기계가!


"농담입니다. 제 마음이 고작 이런 걸로 휙휙 움직일리 없죠."

"하하, 좋다 말았군."


호라이즌은 그렇게 말하고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마크의 선물을

소중하게 안아들고는, 그를 대접하기 위해 유례없이 직접 

네크로노미코코아를 타러 부엌으로 향했다.


호라이즌은 저런 아저씨가 어디가 좋다는 건지.


레이첼은 마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후우."


마크는 피곤하다는 듯 썬글라스를 벗고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아, 아..?"


레이첼은 의외로 핸섬한 마크의 외모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왜 저런 샤프한 눈매를 어벙한 선글라스로 가리고 다녔을까?


"음? 레이첼 양,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김이요.. 잘 생김..."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크는 변태 오타쿠 아재가 아니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옴므파탈 에이전트였던 것이다. 레이첼은 호라이즌이 다소

어려보이긴 하지만, 둘 사이의 연애를 전적으로 응원해 줄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선글라스를

걸쳤고, 레이첼은 아쉬움을 삼켰다.


"코코아 드십시오, 휴먼들."

"아, 고맙네."


호라이즌은 기계였지만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크를 아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레이첼의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호라이즌, 오늘 의상도 정말 잘 어울리는구만."

"당연합니다, 옷걸이가 좋으니. 마크는 안목이 있는 휴먼이군요."

"푸훕, 얼굴 예쁜건 맞는데 옷걸이 운운하기에 너는 좀 짧..."

"..감봉당하고 싶으면 계속 하십시오, 레이첼."

"하하하! 시무르그 실루엣일때도 느꼈지만 호라이즌, 자네는

순백색이 참 잘어울려!"


제때 난입한 마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호라이즌은 더이상 

레이첼의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고 레이첼의 얼마 안 남은 봉급도 지켜질 수 있었다. 그렇게 늘 나누던 평범한 담소가 오갔고,

호라이즌에게 듣지 않았더라면 마크가 그녀에게 고백했단 사실도

눈치 못 챌 만큼 평범한 하루가 지나갔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창문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크가 일어섰다.


"저녁 먹고 가십시오, 마크."

"맞아요, 저녁먹고 가요 마크 아저씨. 저 요리 잘 해요."


마크는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친절해진 레이첼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제안은 고맙네만 업무 상 미팅이 있어서 말일세.. 저녁은 

다음에 같이 하도록 하지."

"다른 휴먼 여성이라도 만나러 갑니까?"


도끼눈을 뜨고 흘겨보는 호라이즌에게 난처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마크는 미꾸라지처럼 자리를 벗어났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이첼."

"응, 으응? 잘 생기셨더라..."

"뭔 뜬 구름 잡는 소리입니까. 마지막에 제 추궁에 제대로 된 답을

회피하는 마크의 괘씸한 태도에 대해 물은 겁니다만."

"아, 아 그거? 그 만큼 생기셨으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한 호라이즌은,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레이첼의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뭐해?! 왜 내 옷장을 맘대로..."

"값은 제대로 쳐드릴테니 흰 옷 있는대로 내놓으십시오. 아, 이건

실밥이 삐져나왔으니 정가의 20퍼센트면 될 거고..."


제 값은 커녕 말도 안 되게 가치를 후려치는 호라이즌을 말리느라

레이첼은 진땀을 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잘 보이고 싶어하면서, 고백은 왜 비싼 척 보류한거야?"

".. 사귀는 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관계로 알고 있습니다."

"그,그렇지?"


레이첼의 머릿속엔 사랑하는 남녀들의 행동들이 스쳐지나갔지만,

호라이즌이 진지해보였기에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겠습니다."

"흐,흐응~? 사랑도 모르고, 우리 호라이즌 완전 어린 애구나?"

"레이첼은 그럼 사랑이 뭔지 압니까?"


레이첼의 머릿속엔 남녀간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스쳐지나갔지만,

호라이즌이 진지해보였기에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잘 들어, 우리 아기 호라이즌. 사랑이란건 말이야. 평생 함께하고싶고 그 사람이 웃는 게 좋고.. 뭐 그런거야."

"그럼 저는 레이첼을 사랑하는 겁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멘트에 레이첼은 코끝이 찡해져서

호라이즌에게 울며 달려들었다.


"뿌에엥~호라이즈은~!"

"이거 놓으십시오. 본 소체는 완벽한 방수기능을 자랑하긴 하지만

콧물과 타액으로 범벅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나는 네가 요즘 마크 아저씨한테 빠져서 나는 전혀 관심도

없는, 훌쩍. 그런 줄 알았는데에..."


호라이즌은 난데 없이 울음보가 터진 레이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참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휴먼은 울음을 쏟곤 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웃음이 터지곤 한다.

표정을 짓는것도 잘 못 하는 기계가 휴먼과 사귀어도 되는걸까?

내일 마크가 찾아오면 물어보리라, 사랑이란 무엇이냐고.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늘 당연하다는 듯 사무실을 방문하던 마크가 찾아오지 않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