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군.'


8월,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 여름의 햇빛은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

사장실에 내리꽂혔다.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빨대로 커피를 한모금 쭉 마신 관리자는, 

이미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져버린 커피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얼음을 때려 부은 아메리카노도 사무실을 가득 메운 더위 앞에선

오래 버티지 못 하는게 당연했다.


하다 못해 에어컨이라도 틀수 있었다면.


관리자는 빙글 고개를 돌려 꺼져있는 에어컨 패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명의 이기를 눈 앞에 두고도 사용하지 못 하는건 결국 돈때문이었다. 

함선 수리, 신입사원 채용 등 급격히 상승한 지출에 조바심을 느낀

부사장의 명령 하에 월요일부터 긴축재정에 돌입한 코핀컴퍼니는 

여느때보다 찌는 날씨에 이열치열로 맞대응하고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 5일동안 불지옥같은 사무실에서 쉴틈 없이 일해온

관리자는 이미 정신적으로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그가 계획중인 

주말 여름휴가의 역할이 지대했다. 


여름하면 바다지.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파로 북적북적한 해수욕장에서

정신없이 보내는 휴가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손엔 목구멍이 얼어붙을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들고 푸르른 보석같은 바다를 감상하는 힐링이었다.

성수기의 해수욕장은 사람이 많은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이미 다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


관리자의 힘을 쓰면.

한적한 해수욕장 만들기는 쉬웠다. 


'해당 해수욕장에 침식경보를 발령합니다. 해제되기 전까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관리국에서는 침식체가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각 태스크포스는 대응을 보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다시 생각해봐도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관리자는 그가 눈여겨보고 있던 유명한 휴양지에 도착한 뒤 전율을

느꼈다. 권력남용이긴 하지만, 그는 악인도, 그렇다고 절대무결한 선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용할 수단이 있다면 뭐든 이용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설원처럼 하얗게 펼쳐진 모래가 플립플랍을 신은 관리자의 발을 

보드랍고 따뜻하게 감싸고, 에메랄드 빛 바다는 파도가 넘실댔다. 

사무실에선 짜증만 유발하던 강렬한 햇빛은 보석같이 푸르른

바다에 부서지듯 반사되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냈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엔 늘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대기 마련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늘 이 곳은 그의 프라이빗 비치니까.


관리자는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비스듬히 걸치고 선베드를 펼쳤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파라솔을 대충 꽂아 그늘을 만들고 

선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아이스박스에서 머리가 찡해질정도로 

차갑게 살얼음이 낀 맥주캔을 꺼냈다. 


치익, 탁!

맥주캔에서 들리는 청량한 소리에 얼굴에 미소를 띄운 관리자는

원샷할 기세로 맥주를 들이켰다.

상쾌하게 목구멍을 찔러대는 탄산과 함께, 얼음같은 맥주가 그의

온 몸 구석구석에 찌르르 퍼져나가자 캬, 하는 탄성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이게 섹스지.


순식간에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두번째 캔을 딸 때쯤, 문득 부사장도 

데리고 올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해변을 전세내기위해 취한 침식경보 발령을 

이해하지 못할것이고, 또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을것이다.

잔소리로만 끝나면 다행이지, 어쩌면 실력행사로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보는 이 아무도 없는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농익은 여체를

좁은 면적의 수영복 천쪼가리로 감싼 부사장과의 엄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내심 아쉬운 맘과 함께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왕 이렇게 온거, 모든 걸 내려놓고 힐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관리자는 명상을 하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마치 바이올린의 음색처럼 간드러지는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가 

옅은 잠에 빠저 있던 관리자의 귀를 간질였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걸까? 분명 누구의 출입도 금지된 해변인데.


그는 여전히 상황파악이 덜 된 채로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핑크색 머리칼이었다.


"안녕, 우리 오랜 숙적. 관리자님?"

"으응?"


'오랜 숙적' 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 뜬 관리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셰나가 생글거리며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장이 덜컹 소리 날 정도로 놀랐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상황에서 그나마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관리자는 짐짓 여유로운 척 입을 열었다.


"..뭐야, 셰나 양인가."

"별로 안 놀라네? 후후, 역시 우습게 볼 인물은 아니라니까."


흰색 캡과 블랙 앤 화이트 컬러 수영복, 짧은 핫팬츠를 입고 미소를 짓는 

셰나는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아닌 듯 보였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본다면 완벽한 피서객 그 자체로 보일 뿐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아, 이 해수욕장에 침식경보가 내려졌다는데, 한가롭게 피서를

즐기고 있는 얼간이가 있길래 누군지 얼굴이나 보러 왔지. 그게

당신일 줄은 몰랐지만."


셰나는 능글맞게 대답하며 다분히 의도적으로 수영복 끈을 매만졌다. 


"그런데, 침식체는 코빼기도 안비치는걸. 이렇게 되면 관리국이

허위경보를 내린 거잖아? 그래서 그 자리를 채워주러 왔어. 거짓말쟁이 

관리자가 되지 않은 건, 우리 덕분이란거지."

"하하, 재밌는 농담이군."


관리자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물론 셰나가 애초에 그의 목숨을 노렸다면 그가 깜빡 잠들어 있을 때가 적기였겠지만 어째선지 그의 목은 아직 

제 자리에 잘 붙어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 측에서 뭔가 요구사항이 

있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흐응~ 바다라, 좋네."


셰나는 천연덕스럽게 팔을 어깨 위로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시원하게 드러난 백옥같은 겨드랑이에 맺힌 땀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던 관리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고간이 아직도 팽팽하게 서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비치타올로 가랑이를 덮었다.


"내게 뭔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그림자는 생전에 추구하던 것에 집착한다는 거, 알지?"

"대충은."


관리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셰나는 빵터진듯 깔깔댔다.


"아하하! 그렇게 경직되어 있을 필요 없어, 관리자님. 나도 참

어이가 없거든. 나는 생전에 여름휴가를 즐기고 싶었었나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관리자는 잠시 벙찐표정을 지었다.

즉, 바닷가에서 놀고 싶다는 건가.

그림자와 여름휴가,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우습지. 이런 욕구가 생길때마다, 그리도 내가 한 때는 인간이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니까."


셰나는 왠지 쓸쓸한 눈빛으로, 손에 모래를 한움큼 움켜쥔 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흘려보냈다. 


"그래서 나를 해치지 않은 건가?"

"뭐, 겸사겸사. 휴가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편이 즐겁잖아. 카르멘 녀석이랑 둘만 있으면 싸우기만 할테고."

"나는 굳이 따지자면 한적한 휴가를 더 선호하네만. 그래서 오늘 

여길 프라이빗 비치로 만든걸세. 거짓경보까지 해가면서 말이지."


관리자는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내 셰나에게 건넸다.


"하지만 내 목숨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술친구정도는 

해줄 수 있네. 마침 나도 제법 적적하던 참이었거든."


셰나는 눈웃음치며 맥주를 받아들었다.


"후후, 당신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구나. 적이란게 아쉬울정도로."

"카르멘 양은 어디있나?"

"싫다, 여자를 앞에두고 바로 딴 여자 얘기하기야?"

"나는 자타공인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 말일세."


셰나는 맥주를 홀짝 들이키며 쿡쿡거렸다.

평소의 복장보다 오히려 노출도가 적은 수영복을 입은 그녀였지만

어째서일까, 관리자의 성욕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적으로만 여겼던 그녀의 암컷스러운 면모를 보게 돼서 였을까? 

알가슴 사이에 흐르는 진주같은 땀방울을 모조리 핥고 싶었다.


"카르멘은 지휘자님을 공항까지 모셔다드리고 조금 늦게 합류하기로 했어. 그로니아에 가고 싶으시다더라. 이제 슬슬 그 암코양이가

올 때가 됐는데... 아, 저기 오네."


셰나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엔 젖꼭지만 겨우 가린 정도의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은 갈색 피부의 늘씬한 글래머가 고양이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푸웁."

"어라? 관리자님이네. 잘 지냈어?"


관리자는 뿜었던 맥주가 묻은 입가를 닦아냈다.

확실히 자극적인 복장이었다. 차마 성욕을 주체하기 힘들 만큼.


"왜 그래? 누나 몸매에 넋이 나가기라도 했어?"

"네가 하도 치녀같이 입고 다니니까 그렇지."

"어머? 가랑이에 지퍼달린 옷이나 입고 다니는 애가 내숭은."

"크흠, 크흠!"


두 앙숙같은 여자들의 다툼이 심화되기 직전에, 관리자는 헛기침을

두 어번 함으로써 존재감을 어필했다. 생전에 휴가를 즐기고 싶었던건 

카르멘도 마찬가지인지 그녀에게서도 전혀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없는 수영복이었다.

굶주린 색마, 관리자의 시선이 자꾸만 카르멘의 풍만한 젖가슴으로 

향하자 그녀는 도발적인 윙크를 보냈다.


"관리자님, 누나 등에 썬크림좀 발라줄래?"


처음에 관리자가 바라던 한적한 휴가의 꿈은 산산이 바스라졌지만,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잘 익은 미녀들과의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돗자리 위에 엎드려 수영복 브라 끈을 풀어헤친

카르멘의 매끄러운 등을, 썬크림을 손에 쥔 채로 멍하니 바라봤다.


"얼르은."


그래, 오늘은 휴가니까.


관리자는 썬크림을 쭈욱 짜내고 카르멘의 맨 살갗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피부는 촉촉하고, 말랑거렸다.

썬크림이 발라지는 촉감또한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무아지경으로

바르고 있자니 자꾸만 그 풍만했던 젖가슴이 눈에 어른거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는 그녀의 말캉한 옆가슴을 주무르듯

만지며 썬크림을 펴 바르고 있었다.



"아앙~ 등에만 발라주면 됐는데, 혹시 누나랑 그런 것도 하고 싶은거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던 셰나는 관리자에게서 썬크림을 뺏어 카르멘의 등에 쭉 

짜낸 뒤 발바닥으로 대충 짓밟듯이 펴 발랐다.


"관리자님, 제안이 하나 있어."


관리자는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카르멘의 옆가슴 감촉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 아까 프라이빗 비치 얘기 했었지? 우리가 방해한 것 같은데,

 그 사죄의 댓가로 어때, 우리를 프라이빗 빗치로 써 볼 생각은?"


그 그림자는 터무니 없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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