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감당하지 못할 악의에 짓눌려 죽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리는 싸늘한 고원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시체 위로 한 인영이 보였다. 그는 자신앞에 쓰러진 시체를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남자는 시선을 돌려 자신을 비추는 달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의 뒷편에 생겨난 기척을 느끼곤 입을 열었다.
"비영(庇影) 인가?"
"천마천세! 만마앙복!"
고저차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고원에 울려퍼졌다. 남자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곤 자신을 향해 한 없이 낮은 자세로 부복하고 있는 묵빛의 여인을 향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여인, 비영은 그제서야 감히 자신의 주군, 위대한 마(魔)의 종주를 향해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위대한 지존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감히 자신과 같은 버러지 따위가 지존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허락될 일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일이므로.
남자는 그 모든 복종과 신앙에 가까운 허례를 우습게 여기면서도 자신이 이곳을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바로 저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을 추앙하고 신앙하며, 또 두려워 하는 자들의 몸짓이다. 뭐가 만마(萬魔)의 종주란 말인가? 내앞에 놓인 인간의 심마(心魔)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그러나 이 또한 이제는 지나갈 일이다. 자신은 이제 이 지긋지긋한 살육과 은원으로 매듭진 무진장(無盡藏)을 벗어날 예정이었므로.
"신녀께서 보내신 전언입니다."
남자의 상념이 끝나갈때 쯤 비영은 부복한 자세로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비영에 손 위에는 붉은 비단으로 치장된 고급스러운 두루마기가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두루마기는 스스로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
비영은 감히 그런 지존의 신위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극마(極魔)에 이르러야 간신히 흉내를 낼 수 있는 무형지기의 권능이었으며 수천, 수만의 천하 검수가 이루지 못한 염원인 이기(以氣)의 길을 남자가 걷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므로
남자는 자신의 힘으로 들어올린 두루마기를 손짓하나 하지 않고 펼쳤다. 그의 눈에 익숙한 필체로 쓰여진 활자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함이 보였다. 활자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자신을 찬양하는 치례와 안부를 묻는 인삿말, 그리고 피처럼 붉은 주사로 쓰여진 단하나의 글자.
'해(解)'
무엇이 해결되었는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두루마기가 펼쳐지며 모습을 드러낸 작은 함에 답이 있으리라. 신녀의 방식은 언제나 이랬다. 자신과 마주할 때 마다 수수께끼와 같은 선문답을 몇시진이고 지껄이는 여인이 그녀 였다. 때문에 남자의 손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여 봉인된 함을 부수고 있었다.
'손목 시계?'
당장에라도 부서질듯한 낡은 함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물건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물건은 절대로 이곳에 존재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전자시계다'
남자는 경지를 높여 부동심(不動心)을 완성 한 이후로 절대로 흔들린적 없었던 내면의 천주(川炷)가 흔들리는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 물건이 어떻게, 왜 이곳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20년 전 자신역시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없는 장소에서 행하는 것을 꿈 꿔 본적 조차 없었으므로. 남자는 빠르게 자신 안의 동요를 잠재웠다. 그리고 그 때였다.
"이건!"
비영은 날카로운 자신의 감각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그것은 거대한 살기(殺氣)였다. 수십년간 낙흔암영대(落痕暗影袋)에서 임무를 수행한 암영주(暗影主)인 자신조차 느껴본적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비영은 그 흉악한 살기에 잠시동안 전율하다 자신의 본분을 떠올리곤 위대한 마의 종주를 향해 소리쳤다.
"피하셔야 합니다!"
ㅡ크아아아아!!!
비영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죽은 신의 요람처럼 조용하던 밤하늘을 부수며 나타난 무언가가 소리 쳤으므로.
남자는 자신에 손에 잡힌 전자시계에서 시선을 떼곤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엔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구멍속에는 남자도 알 수 없는 이계의 하늘이 보였다. 그것은 쪽빛이기도 했으며 밤하늘을 닮기도 했으며, 동시에 핏빛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괴이(怪異)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ㅡ........ㅡ_____!!!
괴이는 남자를 향해 언어 조차 되지 못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의 의미를 단 하나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 세상을 씹어삼킬 듯한 끔찍한 살의는, 명백히 자신과 세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남자는 손에 쥔 시계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돌아가라 비영"
"...예?"
비영은 지존의 말에 멍청하게 되물을 수 밖에없었다. 돌아가라니? 저 존재조차 흉악스러운 신화적인 괴물을 앞에두고 어딘가로 도망쳐야 할지는 부차적인 문제였으며 자신은 절대로 적앞에서 도망쳐서는 안되는 낙흔암영대의 암영주였다.
그러나 남자는 비영의 고뇌에 아랑곳하지 않고 되물었다.
"불복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존!"
자신을 의심하는 지존의 말에 비영은 이마가 찢어질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쳐박으며 자신의 복종을 지존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갑작스런 비영의 행동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지시를 내릴 뿐 이었다.
"가라. 신교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녀에게 전해라. 다음 교주는 만천(瞞天)이다."
"예?!... 그게 무슨...!"
비영은 갑작스러운 지존의 후계자 지목에 상황을 잊고 또다시 지존의 말을 되묻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녀의 앞에 존재해야만 할 남자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지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비영은 퍼뜩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존재조차 용납받지 못할 괴이의 세상을 일권으로 부수어 나가며 마침내 신화적인 괴물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지존의 모습을.
"... 천마천세! 천천세!"
비영은 전율적인 지존의 무(武)에 감복하여 한 번 절을 하고는, 지존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신교를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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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보다가 급 꼴려서 썻는데 2화 쓸지 안쓸지는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