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할 때 들은 곡이라 틀든가 말든가















"그래, 내가 네헤모트. 지금은 레이라는 이름의..."


"마왕이야."




정적이 흐른다.

삑, 삑. 하고 내부에서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구동음만이 흐르고 있다.





"..."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관남충은 잠시 놀란듯,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뭐가 그렇군이야. 씨발새끼야. 좀 더 놀라라고.



"그래."



아니



"아니...!"



씨발까지 입까지 차오르던 것을 억누른다.



"그래서 그 네헤모트가 왜 나더러 메이즈 전대의 이야기를 하는거지?"



왜냐니...

당연하잖아.

메이즈 전대는...! 구관리국 전대는... 니 병사잖아.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그리고 자네가 너무 수상쩍어서 말이야.




떠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아무 감정 없이 내뱉었던 말을.

차가운 설원의 능선. 거기에 양복차림이로 서서, 먼곳을 바라보며.

마치 나같은 건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우리들, 아니.

메이즈 전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남일인 것처럼.





"왜냐니... 니 병사잖아. 너를 위해... 지금도..."


"아니, 아닐세. 네헤모트군."




"내 말은..."



관남충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잇는다.





"왜 그걸 자네가 걱정하고 있냐는 걸세."




"..."




말을 잃어버린다.

이 남자의 무서움에, 동시에 나의 어설픈 생각에.

언제나 그렇다. 중점을 찌르는 말은 하나만을 찌르지 않는다. 여러가지가 동시에 터져나간다.

볼이 떨리는게 느껴진다. 목 안쪽이 수도 없이 경련하며, 목소리가 튀어나려고 하지만 머리가 막아세운다.

아니, 정확히는 손도발도 못쓴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네헤모트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내 병사가 아니고, 두번째로 관남충에게 토로할 필요도 없다.

이 상황을 해결 할 힘을 이미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히려 자네에게 있어서 낭보가 아닌가?"



"자네는 타기리온을... 아니지, 타마왕들을 그리 고깝게 보고 있진 않을텐데?"



턱턱, 하고 찔러 들어온다.

마치 가슴을 찌른 뒤에, 그 안에서 이리저리 돋아나는 것 같다.

모든게 무너진다. 관남충.

이 새낀...!





"그...그러니까...!"





"네헤모트군. 난 물론 자네의 말을 믿네. 하하, 이렇게 다시 조우하게 될 줄이야."


"그러지 말고 진짜로 원하는 걸 말해주겠나?"




진짜로 원하는 거?

말 했잖아.

말 했잖아.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전에, 방금도...!

말 했잖아!




"구하라고!!! 구해...! 구하라고...! 도우라고!"



"니 병사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구해줘야 할 거 아냐!!!"




"..."



내 외침에도 액정은 바뀌는 일이 없다. 순간 고장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정적. 엔진과 시스템의 구동음이 내부 장갑을 타고 내게 흘러 들어올 뿐이다. 코로 몇 번이고 거센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흥분했다. 알고 있다. 그건 이 새끼 때문이다.

마치 남일처럼 말하고 있어.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거 잖아. 니가 마지막으로 그녀, 전대를 구하는 엔딩이잖아.

애초에 그럴 의무도, 책임도, 다 너한테 있잖아!





"사장님? 슬슬 출발해야..."



"아, 알겠네."



아, 누렁이의 목소리.

저긴 사장실이었던걸까.




"미안하지만 네헤모트군. 지금 그쪽으로 가니까. 앞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뭐라는거야 미친새끼야!!!"



"나 혼자서 어떻게 해도 안되니까...!"



그러니까 너한테.



"그럼, 가서 보지. 클리포트의 마왕. 네헤모트."





띡, 하고 통신은 종료 된다.

노 시그널. 하고 화면 위에서 점멸하고 있다.


껌뻑껌뻑, 하는 눈동자. 내 얼굴만이 비친다.

아니지. 내 얼굴조차 아니다. 알렉스를 흉내낸 얼굴. 그녀를 억지로 검은 머리로 한 뒤, 그 조형을 흉내내어 남성적으로 바꾼듯한 얼굴. 


퀭한 얼굴. 



"어쩌라고... 씨발새끼야..."



누구를 향한 말일까. 고민하는게 웃기다.

둘 다다.

둘 다.


나한테 맡겨?

뭘 맡겨.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발버둥 쳐도, 아무리 해도 바뀌는 게 없는데.


뭘 맡긴다는 거야.


내가 뭔질 알고.

누군지나 아냐고.




"흐, 흐흐흐...흐흐..."



코가 멋대로 춤을 춘다.

아, 아아아... 아아... 알고 있어. 알아. 알지 당연히.

헛웃음과 함께, 다 귀찮아졌다.

아무래도 좋아졌다.


너도 안 구한다면, 됐어.

그럼 나도 안 할래.


이미 망가졌다. 이야기는 잔뜩 망가졌다. 내가 오기 전부터 망가져 있었다.

이제서 제대로 돌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마냥.

아니, 아니지. 오히려.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었던거지.



그래.

나는 알렉스를 따먹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푸훕... 후....후후후...흐흐흐..."




그녀들을 구한다? 메이즈 전대를 구해? 이 잘못 된, 꼬인 이야기를 푼다?

개 좆빠는 소리지. 각우 너프 되는 소리 아냐. 밀리아가 너프 되는... 아, 그렇지.

밀리아는 이미 너프 되고도 그 모양이니까. 상연아 잘 좀 하지 그랬어.

애미뒈진 새끼야.



그럼 됐어.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수동 조작용 콕핏에서 내려온다. 해치가 열리고, 휘유우우우우.

눈보라 소리는 잦아들어있다.

어느새 폭풍이 지나가기라도 한 마냥.

아무래도 좋아.


이 좁은 곳은 왠지 싫다.

기억 속을 스치는 조명이라고는 OLED 모니터 밖에 없던 곳을 떠올린다.

그래. 그래서 더 싫어.


여긴 무슨 액정인지 모르겠지만.


허리를 틀어서, 다리를 빼내고 걸어서 나온다.

안이나 바깥이나 소음 외에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걷기 시작한다.

어딘지는 모른다.

그저, 걷는다.

걷는다.


눈밭 위를 걷고 걸어.

얼마나 시간이 흐른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냥 산책이라도 가자.

라는 적당히 정신줄 놓은 생각.

산책, 산책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아니야.


그냥 아무래도 좋으니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

걷다가 보면, 빨리 끝이 나겠지하는 생각.




그래 예를 들면.






"아"





양반은 아니네.

금새 눈 밭 위로 대가리를 처박는다.

아... 아하하... 뜨겁다.



잘도 방향을 맞춰 돌아간 머리.

오른쪽 눈알을 밑으로 내리니, 뜨겁다.

무릎 아래 종아리 부분이 경련을 일으키며, 뜨겁다.



그리고 그 아래 조금씩, 선명하게 색을 입히는 붉은색.

수트 안에서 타고 오르는 철의 냄새.




금새 뒤따르는 눈밭을 질주하는 소리.

발걸음이 네 개.

아, 그랬구나. 왼팔로 상체만을 일으키고서 뒤를 돌아본다.

새까만 짐승, 늑대같은 것이 네 발로 달려오고 있다.


저렇게 개같이 이동하니까 빠르지.



그 개는 내게 가까워지자 점점 속도를 늦추고, 앞발이 사라지더니 천천히 일어서며 다가온다.




"드디어 찾았노 씹게이야!"



도플갱어.




말했었지.

내가 먹힐 때.

점점 자신의 루프가 짧아진다고.




그렇구나. 오른쪽 종아리를 달리는 이 고통은 니가 총으로 쏜 거구나.

그랬구나. 그러고서 짐승 모양으로 형태를 바꿔서 여기까지 온 거구나.

그러면. 여기서 끝인가.




"..."




눈을 감는다.

여기서 끝이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낸 것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니가 더...




"허억...허억... 뭐노 게이야..."


"이제야 드디어 그 좆같은 인생을 나한테 주고 싶어졌노?"





하하, 이 새끼 점점 말투가 이상해지는데.

병신인가.





"그럼..."




잘 먹겠습니다다. 씨발년아겠지.

안다.


몇 번이고 그 말을 했으니까.



도붕이의 헬멧 째로 변형 되며 4개의 기다란 아가리로 바뀌겠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습은 침식체보다는

기생수랑 더 닮았다. 아아, 오른쪽이야.


됐다. 드립 칠 힘도 없다. 그만두자.

얼른 날 먹어라.

기왕이면, 이번 한번만에 모든 걸 끝내 주라.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니까.






"뭐야. 저항 안하노? 그럼 나야 좋지."




"그럼... 잘 먹겠습니다다!"




씨발년아! 겠지.

흐흐, 그러면 난 대가리가 통째로 씹혀서...







"으아아아아아아악!"






싫어. 싫어. 싫어. 죽기 싫어. 그런 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눈밭을 헤엄치듯이 발버둥 친다.

양팔을 풍차처럼 휘저으며 눈밭을 헤엄치다가 겨우 일어선다. 그러고서 달린다.

도망친다.



"아니 씨발!"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죽고 싶지 않아. 죽기 싫어. 여기서 죽기 싫다고.

다급하게 달린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이 들린다. 눈 앞은 온통 새카맣고, 지면은 온통 새하얗다.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어디로 가라고. 몰라. 그런거 모르는데 그냥 달린다.

죽고 싶지 않아.



"하, 하하하...하하하...! 으아아아아아아"



웃긴다.

아까까지만해도 아무래도 좋다며.

아무래도 좋다고 해놓고서, 이제와서 죽기 싫대.


도망칠 곳도,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 하나 없는데.

흐흐흐, 흐흐흐흐.. 흐흐흐흐...


아아아아아아ㅏ....!



"총맞아서 병신 된 다리도 도망 칠 수 있을 거 같냐?!"




쫓아 온다.

쪼, 쫓아온다고!




"아하, 아아아ㅏㄱ. .아아아아ㅏㄱ! 오지마!!!"




눈밭을 헤친다.

왜?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가래를 뱉어내지 못하고 슈트 내부에 토해내며 달린다.

왜?

살고 싶어서? 아니. 죽고 싶었는데.

어차피 아무것도 못하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더럽다. 추악하다. 꼴사납고, 병신같다.

그래도 달린다.



"헉, 헉.... 허억....!"



죽는다.

붙잡히면 끝난다.

그런데

왜? 왜 도망치는건데?

왜 살려고 하는건데?



"거기 안 서? 이 씨발새끼가! 병신다리로 도망가봤자야!"



몰라 씨발.

몰라 몰라 몰라 몰라 그딴 거 몰라!


그냥, 그냥...! 난...!





-조심해. 눈으로 덮힌 곳은 지반을 알 수 없으니 항상 주의해야한다고 전...




"이 씨발새끼가!!!"



앗, 하고 모든게 무너진다.

절벽이었나.

눈으로 덮여서 아래가 보이지 않았나.

여긴 능선이었나.


애초에, 어디였더라.





애초에 왜 살려고 했더라.

모르겠다.

뭘 하려고 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게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대로 간 건지.

그리고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도.



하늘 위의 계단처럼, 혹은 지면 위의 허상처럼 쌓인 눈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허우적대며 하늘을 헤엄치는 건 1초.

모든 것이 뒤틀리고, 빙그르르 도는데 2초.






.

.

.

.

.

.






"흠흠...흠..."



굳이 따지자면 따뜻하다.

목욕탕의 그러한 따뜻함이 아니라, 가슴. 그러니까 왼쪽 말고, 여기 안쪽. 뭔가가 화아아악하고 천천히 녹아내리는 그런 종류.

예를 들면 어릴 때 엄마가 밤에 타준 코코아. 볼을 데우면서 얼굴을 늘어지게 만드는 것 같은.

예를 들면 어릴 때 엄마가 혼내고 난 뒤에 차려준 밥상. 모든게 흐려지는 것 같은.


어딘가 그립고, 따뜻하고, 동시에 애틋한 그런 종류.

흘러간다. 멈추는 것이 박자에는 맞지 않다. 하지만 뭐더라.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싱코페이션이었나, 아니면 레이백이었나. 제멋대로 줄였다가 늘렸다가 하면서.

어설프게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콧노래.



떠오른다.

그 익숙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나보다 한참은 커다란 그 뒷모습.

주방에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한쪽 다리가 떨리고 있다.

탓탓탓, 하고 불이 붙어서 지이이잉하는 소리와함께 계속해서 춤을 추는 푸른색 불꽃. 가스 레인지와 우우우웅하고 계속해서 배음을 만드는 후드. 그 곳에서 들썩이는 뒷 모습. 이제 막 돌아와 앞치마 대신에 편한 외투를 갈아 입고서, 도마를 톡톡하고 어설프게 두드리는 소리. 어설프게, 혹은 감질나게 콧노래의 박자와 맞지 않는 소리들.


하지만 어딘가 애처럽고, 가슴이 메어져 온다.

그저 보고 있다는 걸 생각만해도 목 안쪽이 뜨겁다. 담배도 안 피는데 가래가 마구 뜨겁게 끓어오른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엄...어....마..."


"응...?"


"정신이 들었나 보네?"



눈 앞에는 기타를 쥔 채 뒤 돌아보고 있는 여자가 한 명.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가 한 명.

은빛일까, 잿빛일까. 아니면 새하얀 걸까.

고민하게 만드는 찰나에 눈에 잦아드는 붉은 기.


왼쪽 눈 아래의 점.

그걸로 알아챈다.

아니, 내려다보는 저 붉은 눈동자로 알아챈다.




"아....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