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프롤로그

노르드나빅은 오랫동안 침식의 날에 대비해왔다.

높은 장벽을 세우고, 침식을 막는 낙원문을 지었다.


이 땅의 첫 번째 정착자들은 실로 현명하였다.

사슴의 눈에 담긴 세상을 들여다보고 풀과 나무가 속삭이는 충고에 귀 기울일줄 알았다.

사제이자 철학자였던 그들은 인간의 내면을 갉아먹으며 성장하는 위협을 일찍부터 알아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 단절하고 높은 성벽을 쌓아 올렸다.

오래 전, 첫 번째 정착자들이 화톳불 속에서 목격했던 마지막 날을 예비하기 위해.


대정화전쟁. 침식의 날 D+12

노르드나빅 왕국, 수도 아발론 방위선.


병사 : 총사대장님! 괴물들이 장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큐리안 : 막아라!

큐리안 : 저것들이 들어오게 내버려 두지 마!

큐리안 : 데이빗, 파형 분석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부관 : 너무 불규칙적입니다. 침식현상이 허공에서 마구잡이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큐리안 : 저 괴물들이 아무 저항 없이 장벽을 넘었다는 건, 낙원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인가?

부관 : 네.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병사 : 총사대장님! 왕성으로부터 연락입니다!

큐리안 : 연락? 설마 내성이 공격받은 건가?

부관 :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이건 전하의 직통 라인입니다.

큐리안 : 바로 연결해 주게.

부관 : 열쇠를 회수하라니요? 침식을 막아 주던 낙원문을 포기한다는 겁니까?

큐리안 : 그래. 낙원문의 힘은 한계에 달했다. 더 이상 버티다간 열쇠까지 파괴될지도 모른다더군.

큐리안 : 폐하께서는 새로운 낙원문을 세워 그곳에서 항쟁을 이어가실 생각이다.

큐리안 : 게다가... 열쇠를 노리는 존재가 있다는 모양이야.


부관 : 열쇠를 말입니까?

부관 : 대체 누가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설마 왕위를 탐내는 자들입니까?

큐리안 : 데이빗. 분열을 야기하는 언행은 삼가도록.

부관 : 그럼 노르드나빅의 어느 누가 열쇠를 노리겠습니까? 지성도 없는 침식체들이요?

큐리안 : 우리는 군명에 따라 열쇠를 운반하면 돼.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다.


부관 : ...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큐리안 : 남쪽 끝. 디어루트 외성이다.

우리는 괴물에 맞설 무기를 만들고, 성자들을 소집해 항전의 기반을 다졌다.

나라의 중심에는 낙원문이라 불리는 탑을 세워 열쇠를 안치해 불온한 힘이 닿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정착자들이 예견했던 그 날, 균열을 찢고 도래한 붉은 침식의 기운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우리는 굳건한 벽과 결사의 항쟁으로 우리의 터전을 지킬 수 있었다.

병사 : 총사대장님! 수도가 공격받고 있다는 전보입니다! 도와야 합니다!

큐리안 : 아니. 열쇠를 확보한 이상, 우린 예정대로 떠난다.


병사 : 이대로는 시민들이 위험합니다! 돕게 해 주십시오, 총사대장님!

병사 : 수도가 함락되면 나라를 지키는 데 써야 할 열쇠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큐리안: ...

병사 : 데이빗 부관님! 부관님의 가족 분들도 수도에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관 : 수도 방위는 다른 모든 총사대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부관 : 하지만 열쇠를 지키는 것은 우리 제1 총사대에게만 주어진 사명이다.

부관 : 그러니 지금은 총사대장님의 말씀을 따라라.

병사 : 큭. 알겠습니다.

큐리안 : 전군, 열차에 탑승하라! 이대로 디어루트 외성까지 남하한다!

병사 : 총사대장님, 기관사의 말로는 종착역까지 3시간 가량 소요된다고 합니다.

큐리안 : 그래. 혹시 열차에 탄 민간인이 있던가?

병사 : 없습니다. 출발하기 전까지 지시대로 탑승을 통제했고, 차량 안도 전부 확인했습니다.

큐리안 : 좋다. 계속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침식체가 열차를 습격할 가능성에 항상 대비해라.

병사 : 예.

병사 : 다른 대원들에게도 전파해 두겠습니다.


부관 : 여기까지 오는 동안만 해도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지나쳤습니다.

부관 :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대장님.

큐리안 : ...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

부관 :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큐리안 : 미안하다, 데이빗.

큐리안 : 수도를 등지고 떠난다는 건 ... 자네에게나 다른 병사들에게나 힘든 선택이었겠지.

부관 : 상심하지 마십시오. 총사대장님은 필요한 선택을 하셨을 뿐입니다.

부관 : 눈앞의 재해를 두고도 정반대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힘들지만...

부관 :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성유물이 필요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습니다.

큐리안: 그래. 그러니 설령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큐리안 : 성유물만은 어떻게든 지켜낼 생각이다.


병사 : 보고드립니다, 총사대장님. 터널이 무너져 더 이상 가는 건 어렵다고 합니다.

큐리안 : 부관, 자네가 복구할 수 있겠나?

부관 : 제대로 된 장비 없이는 어렵습니다. 잔해를 치우는 데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병사 : 통신도 완전히 먹통입니다. 종착역과 무전이 되질 않습니다.

큐리안 : 으음, 그 침식파라는 것의 영향인가.

큐리안 : 전군, 현 시간부로 열차에서 하차하라. 도보로 종착역까지 이동하겠다.


병사 : 음?

병사 : 지금 이거... 눈이 내리고 있는 건가요?

부관 : 그래. 한여름에 눈이라니 좋은 징조는 아니군.

큐리안 : 서두르지. 눈이 쌓이면 움직이기 곤란해.

병사 : 총사대장님! 멀지 않은 곳에 연기가 보입니다!

큐리안 : 산불이라면 우회하면 될 일이다.

병사 : 그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같은데, 단순한 화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큐리안 : 부관, 방금 감지기가 작동한 건가?

부관 : 네. 침식파입니다.

부관 :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 침식체에게 공격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회할까요?

병사 :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무시해야 돼?

병사 : 쉿, 조용히 해. 총사대장님 입장도 있을 거 아냐.

큐리안: ...

큐리안: 마을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보이지?

병사 : 20여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큐리안: 그런 규모의 마을이 공격받았다면... 생존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희박하겠군.

큐리안 :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다들, 서둘러 움직여라.



1-2 총사의 별동부대


만삭의 여성 : 자, 이쪽으로 들어가. 헛간 지하로 이어질 거야.

아이들 : 선생님, 저희 엄마랑 아빠는 어딨어요?

아이들 : 비명소릴 들었어요. 아까 그 괴물이 엄마랑 아빠를 다치게 한 거예요?

만삭의 여성 : 부모님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우리처럼 안전한 곳에 숨어 계실 거야. 

만삭의 여성 : 그러니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지?

만삭의 여성: 괜찮아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만삭의 여성 : 에, 에잇!!

침식체 : 크르륵.....?

만삭의 여성 : 여기야! 이 괴물아!

침식체 : 크워어어어!!!


만삭의 여성 : 정신 차려...! 최대한 멀리 뛰는 거야!

만삭의 여성 : 아이들이 안전해질 때까지 마을에서 최대한 멀리...! 

만삭의 여성 : 헉.....! 허억......! 다른 괴물들까지 전부............!

만삭의 여성 : 이제 안 돼... 더는 못 뛰겠어...!

만삭의 여성 : ... 꺄악?!

만삭의 여성 : 이, 이 말은 대체...?


큐리안 : 희박한 가능성에 걸었던 게 정답이었군.

큐리안 : 놀라지 마십시오, 부인. 보기보다 순한 녀석입니다.

만삭의 여성 : 당신들은.. 왕립군?

부관 : 총사대장님, 놈들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대와 마주친 적이 있나 보군요.

큐리안 : 그렇다면 운이 나쁜 셈이군. 여기서는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큐리안 : 1격대, 조준!

큐리안 : 발사!

큐리안 : 사수들은 탄환을 장전하도록! 내가 시간을 벌겠다!


만삭의 여성 : 대단해... 산탄총도 통하지 않던 괴물들을 창 하나로 해치우다니..

부관 : 저희 총사대장님은 노르드나빅을 대표하는 성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분이시니까요.

만삭의 여성 : 성자..? 실제로 본 건 처음이네요. 

어떤 괴물도 맨손으로 때려눕힐 정도로 힘이 장사라고 들었는데.


부관 : 하하, 맨손이라니. 그런 얘기는 저도 처음 듣는군요.

만삭의 여성 : 총사대의 성자들은 다들 비밀리에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도 보안법으로 끌려가게 되는 걸까요?

부관 : 그런 건 낭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만삭의 여성 : 전 괜찮아요! 그보다 헛간 지하에 마을 아이들이 숨어 있어요!

부관 : 걱정 마십시오. 마을은 이미 다른 병사들이 가서 구조를 마친 상황입니다.

만삭의 여성 :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이대로 어떻게 되나 무서웠어요.

부관 : 아닙니다. 아이들을 지키려고 침식체를 유인하시다니, 만삭의 몸인데도 대단하시군요.

만삭의 여성 : 저 괴물들을 침식체라고 부르는군요...

만삭의 여성 : 그런데 저기... 수도에 계셔야 할 왕립군 분들이 왜 이런 데 오신 거죠?

부관 : 죄송합니다, 부인.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것 말고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삭의 여성 : 방금 그건 뭐죠? 나무들이 흔들렸는데...?

부관 :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군요.

부관 : 여길 벗어나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저희가 맡을 테니 말에서 내리지 마십시오.

만삭의 여성 : 아, 알겠어요! 부탁드려요!


부관 : 이런 외지의 마을까지 침식체가 득시글대다니 끔찍하군.

부관 : 서둘러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겠어.

병사 : 조심해! 땅이 갈라진다!

병사 : 대형 침식체다! 대열을 유지해!

병사 : 됐어! 통한다!

병사 : 아니야! 상처가 다시 재생하고 있어! 조심해!

큐리안 : 정면으로 받아내긴 조금 무겁군. 다들 무사한가?

병사 : 네! 덕분에!

병사 : 총사대장님! 괜찮으십니까?

큐리안 : ... 이 정도는 문제 없다.

큐리안 : 다음 사격을 준비해라!

큐리안 : 내가 놈의 갑피를 파괴할 테니 그 부분에 화력을 집중하도록!

병사 : 지금이다! 쏴!

병사 : 됐어! 쓰러트렸다!

병사 : 하하, 덩치만 컸지 별거 아니잖아!

큐리안 : 기뻐하긴 아직 이르다.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마라. 

병사 : 예!


아아, 벌써 죽여 버린 거야?

여기까지 타고 오느라 살짝 정들 뻔했는데.

큐리안 : 넌 ... 누구지?

나? 글쎄?


악기를 든 여성 : 너희들 눈에는 내가 뭘로 보여?

악기를 든 여성 : 사람? 아니면 다른 거?

병사 : 멈춰라!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악기를 든 여성 : 하? 바보 아냐, 너네? 여기까지 힌트를 줬는데도 모르겠어?

악기를 든 여성 : 아, 진짜. 너무 멍청해도 골려먹는 재미가 떨어지는데.


( .. )

병사 : 뭐라고?

병사 : 뭐야? 다들 나만 두고 어디로 간 거야?

병사 : .. 응?

병사 : 부, 불이다!! 언제 불이 붙은 거야?!

병사 : 누가!! 누가 이것 좀 꺼줘!! 왜 아무도 없는 거냐고!!

아아아악! 뜨거워! 누가 제발 이 불 좀 꺼줘!


병사 : 이봐! 갑자기 왜 그래! 정신 차려! 불이라니 무슨 소리야!

병사 : 위험해! 일단 총부터 빼앗은 다음에...!

병사 : 에드먼드...!

병사 : 저, 저 녀석... 왜 자기 입에 총을 넣고 쏜 거야?

병사 : 이 개자식! 에드먼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악기를 든 여성 : 아. 아. 아. 안 되지, 이럼 안 돼. 이래서야 한 번에 한 명 꼴이잖아. 효율 최악이라구.

악기를 든 여성 : ... 으흥. 그래. 딱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병사 : 저 여자가 수상하다! 사정 봐 주지 마!

병사 : 전원 사격 개시!!


부관 :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안전할 겁니다, 부인.

부관 :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희는 임무 중이라 계속 모시긴 어렵습니다.

부관 : 혹시 이 근처에 의탁할 곳은 있습니까?

만삭의 여성 : 강을 건너면 저희 본가가 있는 작은 도시에요. 한동안 신세를 져 보려고요.

부관 : 다행입니다. 그럼 여기서 작별하는 게 좋겠군요.

아이들 :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군인 아저씨.

아이들 : 선생님, 왜 집으로 가면 안 돼요?

만삭의 여성 : 얘들아, 그러니까 그건..

부관 : 그건 아주 크고 나쁜 해충들이 너희가 살던 집을 갉아먹고 있어서야.

아이들 : 으엑, 그러면 어떻게 해요?


부관 : 그러게 말이야. 그 해충들은 아직 잘 듣는 약도 없거든.

부관 : 지금으로선..

아이들 : 군인 아저씨들이 괴물들을 해치우는 걸 봤어요!

아이들 : 맞아! 아저씨들이 그 나쁜 해충들도 잡을 수 있는 거죠?

부관 : ...

부관 : 그래.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거야.

만삭의 여성 : 방금 그 총소리. 마을 쪽에서 들렸어요.

부관 : 아직 침식체가 남아 있나 봅니다. 저희가 처리할 테니 걱정마십시오.

아이들 : 안녕히 가세요, 군인 아저씨!

만삭의 여성 : 부디 무사하세요. 기다리는 가족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부관 : ... 감사합니다, 부인.

부관 : 가자, 허밋.


병사 : 초, 총사대장님.. 죄송합니다...

병사 : 저는 분명... 침식체인 줄 알고.. 쿨럭!


악기를 든 여성 : 아하하하하하! 보고 있어, 셰나?! 따분하다는 건 내가 아니라 너를 두고 하는 소리라고!

악기를 든 여성 : 이것 봐! 악상에 쓸 만한 소재들이 잔뜩 나왔잖아!

악기를 든 여성 : 아. 아. 침착. 침착. 침착해. 침착. 최고단원으로서의 품위가 있지.

악기를 든 여성 : 후우. 역시 행복하게 살던 것들이라 그런지 반응이 다채롭네.

악기를 든 여성 : 그래서 저기, 어때?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총 맞은 소감은?

큐리안: ...

악기를 든 여성 : 그리고 그런 부하를 막으려고 목 졸라 죽인 소감은? 어떤 느낌이야? 응?

악기를 든 여성 : 어서 말해!! 그 잘난 아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


큐리안 : 너는.. 대체 뭐 하는 괴물이냐.

악기를 든 여성 : 하아, 반응이 밋밋하네. 짜증나게.

큐리안 : 목적을 밝혀라.

악기를 든 여성 : 아. 아. 그렇네. 노느라 까먹고 있었어.

악기를 든 여성 : 열쇠라고 하던가? 너희들이 빼돌렸다는 그 특별한 아티팩트? 그걸 가지러 왔어.


큐리안 : 역시 .. 목적은 그거였나.

악기를 든 여성 : 웃겨. 그럼 내가 뭐 너네들한테 관심 있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봐?

악기를 든 여성 : 그치만 지휘자님이 내가 가져간 아티팩트로 되살아나서 여쭤 보시면 어떡해.

악기를 든 여성 : 진귀한 아티팩트를 입수했다고 하던데, 어땠나요?

악기를 든 여성 : 아. 그냥 다 죽이고 가져왔는데요.

악기를 든 여성 : 라고 하면 내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한 애 취급 받겠어? 안 그래? 응?

악기를 든 여성 : 저기, 그러니까 나랑 더 재밌는 거 해 볼래?

큐리안 : 누가..! 네깟 괴물 놈의 농간에 당할 성 싶으냐?!

악기를 든 여성 : ... 헉!

악기를 든 여성 : 지금 그 커다란 창으로 사람을 찌른 거야?

악기를 든 여성 : 어떡해~ 진짜 아프겠다~

큐리안 : .. 뭐라고?

부관 : 커헉....!

부관 : 큐리안. 총사.. 대장님.....

큐리안 : 데이빗.. ?

악기를 든 여성 : 오우. 목석처럼 굴면서 실은 조금 쌓인 거 아냐? 저런 오빠를 나라고 착각하. 다. 니?

악기를 든 여성 : 쿠흡.! 쿠흐흐흐흣!

큐리안: ...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큐리안 : 성유물을 빼앗고 싶다면 맞서 싸워라. 대체 왜 이런 짓까지 하는 거냐.

악기를 든 여성 : 아. 질문 진짜 고리타분하네.

악기를 든 여성 :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악기 좀 연주하겠다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해?

큐리안: ...

악기를 든 여성 : 응?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잘 안 들리는데?

큐리안: ... 건방 떨지 마라, 이 괴물.

큐리안 : 너 또한, 무고한 이들에게 위협이 되는 자..!

큐리안 : 내 모든것을 걸어서라도, 너만은 내가 용서치 않겠다.

악기를 든 여성 : 아하하하하하!!

악기를 든 여성 : 그래, 화나지?! 화내야지! 처음부터 그랬으면 더 재밌었잖아, 이 빌어 처먹을 인간 놈!!

악기를 든 여성 : 그 분노로 내 마지막 악장을 멋지게 장식해 줄게!



1-3 침식의 계절


노르드나빅 왕국 변경.

왕립 국경수비대 관할 남단 산악국경지대.

셔우드 외성.

보류 환자 거주 구역.


나이든 외성 주민 : 상태는 어떠냐?

건장한 외성 주민 : 침식된 흔적은 없어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건장한 외성 주민 : 간만에 아주 실하네요. 도시에다 팔아도 되겠는데요?

나이든 외성 주민 : 나 참, 환자 구역에서 키운 감자를 누가 사? 돌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건장한 외성 주민 : 음? 눈이 내리네요?

나이든 외성 주민 : 그래. 또 어디서 거지 같은 일이 벌어지려나 보구나.

건장한 외성 주민 : 침식체가 나타날지도 몰라요. 수비대에 알릴까요?


나이든 외성 주민 : 엘라 대장 모르게 와트한테 귀띔만 해 줘.

나이든 외성 주민 : 지난번에 화약 때문에 난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또 덧날라.

건장한 외성 주민 : 에이, 그래도 명색이 카운터인데 괜찮겠죠.

나이든 외성 주민 : 인석아, 탈나면 어쩌려고? 그 사람 말고 어느 카운터가 우리까지 지켜 주겠냐?

나이든 외성 주민 :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와트나 찾아가.

건장한 외성 주민 : .. 어?

나이든 외성 주민 : 또 왜?

건장한 외성 주민 : 침식체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나이든 외성 주민 : 이런! 어서 경보 울려!

노련한 수비대원 : 1종 소형 침식체 다수의 접근 확인! 제1격대 사격 준비!

노련한 수비대원 : 발사!

노련한 수비대원 : 제2격대 사격 준비!

노련한 수비대원 : 발사!

건장한 외성 주민 : .. 이걸로 끝인가?

건장한 외성 주민 : 뭐야. 괜히 쫄았네.

노련한 수비대원 : 물러서라, 피터. 눈이 아직 그치지 않았어.


피터: 알겠어요, 와트 씨.

와트 : 전원, 장전하고 각자 위치에서 대기한다!

피터 : 어라..?

피터 : 와트 씨, 저기 보이는 거 사람 아니에요?

와트 : 뭐? 네가 눈이 좋은 건 안다만 뭘 잘못 본 거 아니냐?

와트 : 국경 밖에서 사람이 오는 경우는 그동안 한 번도 없었어.

피터 : 아뇨. 정말이에요. 말 같은 걸 타고 있어요.

피터 : 그리고...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수비대원 : 하이랜더 타입이 접근 중입니다!

와트 : 하이랜더? 오늘 국경에서 침식체들 잔치판이라도 열리는 건가?

와트 : 절대 외성 쪽으로 접근하게 두지 마라! 해자로 유인해!

피터 : 와트 씨! 거긴 지난번에 폭탄을 잔뜩 쌓아 둔 곳이잖아요!


와트 : 그래.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싸구려들이지.

피터 : 쫓기는 사람은 어떡하고요? 폭발에 같이 휘말릴 텐데!

와트 : 하이랜더는 우리가 가진 무기만으로 못 막아.

와트: 설령 네 말대로 사람이더라도, 한 명 구하자고 도박을 할 순 없다. 놈들을 해자 쪽으로 유인해.


쫓기고 있는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수비대원 : 엇? 대장님?!

와트 : 괜찮겠습니까. 아직 지난번 상처가 다 낫지도 않으셨을 텐데.

엘라: 난 괜찮아. 엄호 부탁하지.

와트 : 대, 대장님?!

이런...! 다들 대장님을 엄호해라!


수비대원 : 침식체들이 폭발 반경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어쩌죠?

와트 : 기다려! 아직 대장님이 벗어나지 못했다!

엘라: 와트. 난 신경쓰지 말고 기폭장치를 눌러.

와트 : 예? 하지만!

엘라: 놈들이 외성을 넘으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어서!

와트 : 아, 알겠습니다!

수비대원 : 하이랜더 타입...격퇴 확인.

수비대원 : 대장님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와트 : 다들 예를 갖춰라!


엣취..! 

피터 : ...재채기?

엘라: 훌쩍..

수비대원 : 대장님이다!

수비대원 : 대장님이 살아계신다!

와트 : 대장님?

와트 : 그 폭발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오신 겁니까?

엘라 : 이 녀석의 등을 좀 빌렸다. 꽤 빠르더군.

병기마: ...

피터 : 우와, 평범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거 전부 갑옷이에요?

와트 : 이건.. 왕립군의 병기마잖아?

와트 : 원작자가 사라진 뒤로 생산이 단절됐다고 들었는데.. 이런 게 왜 국경 밖에서 나타난 거지?

엘라 : 나도 몰라. 이것 좀 싣게 들것이나 가져 와.

수비대원 : 대장님, 그 시체는 뭡니까?

엘라: 말에 태워져 있던 사람이야.

피터 : 대장님? 이 사람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상태가 엄청 나빠 보이는데요?


엘라: 하지만 숨은 쉬고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야.

엘라 : 어서 가서 수술 준비해 줘, 피터.

피터 : 아, 알겠습니다!


...

꼭 당신이 가야만 하는 건가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야. 이제 와서 나 혼자 빠질 수는 없어.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정확한 예정은 없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부디 무사해야 돼요.

당신도 부디 무사히 지내고 있어줘.

잠깐만요.

떠나기 전에.. 태어날 아이 이름만이라도 지어주고 가요.

아직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잖아.

함께 기다리고 있어 줘.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까.



피터 : 아, 눈 떴네요?

피터 : 가망이 희박하다길래 못자리나 알아보고 있었는데.

붕대를 감은 남성: 여긴 어디지?

피터 : 우리 마을에서 제일 호화로운 병실이에요. 그래서 정말 위급한 환자들만 데려오죠.

붕대를 감은 남성 : 네가 날 도와 준 건가? 이거 신세를 졌군.


피터 : 나한테는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요.

피터 : 침식체한테 쫓기던 당신을 목숨 걸고 구해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엘라 대장이니까요.

피터 : 그 사람, 수도에서도 보기 힘든 엄청 강한 카운터거든요. 말 타고 나타났을 때는 진짜 멋졌다니까요?

붕대를 감은 남성: 엘라 대장?

피터 : 네. 우린 그렇게 불러요.

피터 : 그리고 난 그냥 당신이 병원비도 안 내고 도망칠까 봐 보초를 서는 것뿐이고요.

붕대를 감은 남성 : 괜한 걱정을 끼쳤군. 병원비는 지불하도록 하지.

피터 : 킥킥, 농담이에요. 여기선 돈 있어 봐야 별로 쓸 데도 없고.

피터 : 근데 이름이 뭐예요? 아까부터 묘비명에 뭐라고 적어야 하나 계속 고민했어요.

붕대를 감은 남성 : 묘비명? 그것도 농담 같은 건가?

피터 : 반쯤은 진담이에요. 아저씨, 부상이 너무 심해서 수술 중에 한 세 번은 더 죽었다 깨어났거든요.

피터 : 사람끼리 싸울 일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런 부상을 당한 거예요?

피터: 엘라 대장이 집도하지 않았으면 아저씬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을 거라고요.

붕대를 감은 남성 : 그 엘라 대장이라는 사람이 날 구해주고 수술까지 해 준 건가?

붕대를 감은 남성 : .. 큭!


..

대장님!

살려주십시오, 대장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어두워요!

큐리안 총사대장님!



피터: 이봐요! 괜찮아요?

붕대를 감은 남성: .. 그래. 생각났어.

붕대를 감은 남성 : 제라드 큐리안. 그게 내 이름이다.

피터 : 큐리안?

피터 : 헤헤, 내가 농담 좀 했다고 바로 복수하는 거예요?

큐리안 : 복수? 왜 그런 말을 하지? 이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피터 : 당연히 문제 있죠. 내가 기저귀 차고 다닐 때부터 그 이름은 아무도 안 썼다고요.

피터 : 국경 밖에서 대체 뭘 하다가 여기 오게 된 거예요? 그런 것도 모르고.

큐리안 : 미안하군.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피터 : 됐고, 지금은 가만히 있어요. 엘라 대장이 아저씨가 깨어나도 나가게 하지 말랬거든요.

큐리안 :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어. 난 디어루트로 가야만 해.

피터 : 디어루트요? 기껏 국경 밖에서 온 양반이 거기로 왜 다시 가려고 하는데요?

큐리안 : 난 중요한 임무를 맡은 왕국 군인이다. 폐하께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어. 


피터 : 폐하?

피터 : 왕을 말하는 거라면 지금은 없어요.

큐리안 : 왕이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피터 : 아뇨. 말 그대로예요. 마지막 왕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거든요.

큐리안: 그렇다면.. 여기는...

피터 : 여긴 노르드나빅에서도 제일 남쪽에 있는 셔우드 외성이에요. 

큐리안 : 셔우드라면 디어루트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곳 아니었나? 

피터 : 네. 디어루트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도에서 지워진 침식지대고요. 

큐리안 : 그렇군..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그렇게나 줄었다는 건가...

듣자 하니, 아무래도 농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닌 듯하군.


나이든 외성 주민 : 뒤로 물러서라, 피터.

피터 : 촌장님?

촌장 오닐 : 왕립 12총사대 중 서열 1위, 총사대장. 제라드 큐리안.

촌장 오닐 : 아무래도 자네가 바로 그 성유물을 훔친 장본인인가 보군.

큐리안 : 내가... 성유물을 훔쳤다고?



1-4 인터루드 #1

촌장 오닐 : 내가 들은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겠지, 피터?

피터 :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기억 자체가 온전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피터 : 마치 과거에 살다가 온 사람처럼..


큐리안이면 그 실종됐다던 총사대장 아냐?

뭔가 수상하긴 했어. 왕실 군복 차림에 병기마까지 타고 있었다며.

20년 전 사람이 왜 이제서야 여기 나타나? 뭔가 착각한 거겠지.

사실이라면 당장 내쫓아야 하는 거 아녜요? 재건단 사람들에게 오해 받긴 싫다고요.

내쫓긴 뭘 내쫓아? 당장 끌고가서 심판을 받게 해야지!


촌장 오닐 : 피터, 수비대를 불러라.

피터 :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죠?

촌장 오닐 : 제라드 큐리안은 국가지명수배자다. 군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해야지.

분노한 주민 : 촌장님! 놈은 열쇠를 가지고 도망친 배신자라고요!

옳소!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분노한 주민 : 우리가 써야 할 약으로 치료해 준 것도 열불나는데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 준다니요?


엘라 : 상처가 아직도 안 아물었나?

엘라 : 카운터라는 것도 이럴 때는 정말이지 쓸모가 없군.

와트 : 대장님, 전해 드릴 말씀이⋯ 음?

와트 : 뭡니까, 그건?

엘라 : 화살. 시간이 있을 때 미리 깎아 둬야지.

와트 : 아뇨. 쓰레기통 안의 그 피투성이 붕대 말입니다.

와트 : 역시 어제 폭발에 휘말렸을 때 다치신 겁니까?

엘라 : 아니. 치료를 제대로 안 한 내 실수야. 화약을 덜 씻었는지 상처가 덧나 버렸어.

엘라 : 너에겐 못 볼 꼴을 보였네.

엘라 :그런데 바깥이 왜 이리 소란스럽지?


와트 : 아, 이번 전투에서 구조하신 환자 있잖습니까.

와트 : 그 자가 본인 스스로를 큐리안이라고 하더군요.

엘라 : 큐리안..?


촌장 오닐 : 진정들 해. 나도 자네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세.

촌장 오닐 :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진상을 밝히고 심판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촌장 오닐 : 저 자의 처우는 군인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네.

분노한 주민 : 아뇨! 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놈을 끌어내야겠습니다!

분노한 주민 : 놈이 자기 죄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엘라 :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셈이지?


분노한 주민 : 에, 엘라 대장님?

분노한 주민 : 대장님! 놈은 제라드 큐리안입니다! 대장님도 그 자가 누군지 잘 아시잖습니까!

엘라 : 창 한 자루로 내로라하는 카운터를 모두 꺾고 총사대 서열 1위에 오른 영웅 중의 영웅이지.

엘라 : 당신은 이 환자를 그 자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야?

분노한 주민 : 병기마는 총사대만의 특권이었으니까요!

분노한 주민 : 그리고 총사대의 카운터들은 20년 전 전쟁에서 모두 죽었어요!

분노한 주민 : 열쇠를 가지고 사라진 큐리안 한 명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분노한 주민 : 병기마를 타고 나타나서 자기를 큐리안이라고 하는데,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큐리안 : 잠깐, 총사대가 모두 전사했다고? 게다가 20년 전이라니?

큐리안 : 뭔가 오해한 것 아닌가? 떠오르는 건 전부 얘기할 테니..

... 커헉!


엘라 : 자, 방금 이 자가 내 주먹에 반응했나?

엘라: 주먹질 한 번에 코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이 자가, 당신이 말한 총사대 서열 1위라고?

엘라: 내 눈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데.

분노한 주민 : 그.. 그건..

외성 주민 : 어떻게 된 거야? 성자라면 엘라 대장이랑 같은 카운터 아냐?

외성 주민 : 살짝 친 것 같은데, 깃털처럼 날아가버렸어.


엘라 : 죽다 살아난 환자가 기억이 왜곡되어 착각을 일으키는 건 흔한 일이야.

엘라 : 당신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이해하지만, 무고한 인간까지 휘말리게 하진 마.

분노한 주민 : 큭..

촌장 오닐 : 대장님, 저 사람들은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만하시죠.

엘라 : 알겠어. 그럼 이 환자는 내가 다시 데려갈게.


엘라 : 여기서 한 발짝도 나올 생각 말고 회복에만 집중해.

엘라 : 심심하면 여기 있는 나뭇가지들로 화살이나 깎든가.

큐리안 : 끄응.. 주먹이 맵군, 엘라 대장.

엘라 : 내 이름은 누구에게 들었지?

큐리안 : 피터란 소년에게서. 죽어가던 날 자네가 치료해 줬다더군.

엘라 :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으니까. 고마워하진 않아도 돼.

큐리안 : 그보다 코피가 멈추지 않는데.

엘라 : 당신이 피라도 흘렸으니까 사람들이 진정한 거야. 힘 조절은 했으니 걱정 마.

큐리안 : 그 일이라면 내가 설명하게 놔두는 편이 나았을 거다.

큐리안 : 나는 폐하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을 뿐, 열쇠를 훔친 적은 없어.

엘라 : 그럼 그 열쇠란 아티팩트는 지금 어디에 있지?


큐리안 :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아.

엘라 : 편리한 기억력이군.

엘라 : 됐어. 떠올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엘라 : 알고 있으니까. 제라드 큐리안이 자기 욕심 때문에 도둑질이나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큐리안 : 그런데 왜 주민들 앞에서 내 말을 막았지?

엘라 : 이곳 남부 국경의 주민들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침식으로 고통 받아 온 피해자들이야.

엘라 : 평생 동안 쌓인 응어리가 당신의 해명 몇 마디에 풀어질 리 없어. 화만 돋울 뿐이지.

큐리안 : ...

큐리안 : 열쇠만 있으면 낙원문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반드시 되찾아 오겠다.

엘라 : 그럴 필요 없어. 낙원문은 침식의 날에 무너졌거든.

엘라 : 낙원문에 대한 지식을 전수 받은 왕족들도 모두 사라졌으니, 다시 지을 수도 없지.

큐리안 :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가 않는군..

큐리안 : 침식의 날로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거지?

엘라 : 20년. 침식의 날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야.


큐리안 : ..자네는 완력이 성자 같던데, 혹시 발육이 빠른게 능력인가?

엘라: 내가 빠른 게 아니라 당신이 느린 거야.

엘라 :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성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카운터라고 불리지.

큐리안 : 카운터.. 그러고 보니 피터도 자네를 그렇게 불렀지.

엘라: 당신이 진짜 큐리안인지 과대망상 환자인지는 몰라도, 우선 이것만은 확실히 해 둘게.

엘라: 큐리안은 아티팩트 열쇠를 훔쳐가서 노르드나빅의 존속을 위협한 국가지명수배자야. 

큐리안 : 내가... 수배자라고?


1-5 외성벽과 국경마을

첫 번째 정착자들은 세상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숲의 요정들이 속삭여 준 지식으로 낙원문이라는 커다란 탑을 세웠다고 하지.

어떤 원리인지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알 수 없지만, 낙원문은 나라를 침식에서 지켜줬다네.

무서운 침식체들도 낙원문이 건재할 때는 맥을 못 췄지.

하지만 침식의 날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낙원문은 갑자기 가동을 멈췄어.

그러자 노르드나빅 전역에 침식 현상이 일어났고, 지옥이 펼쳐졌지.

그 날의 전말을 되돌아볼 여력이 생겼을 즈음엔 이미 나라가 엉망진창이었어.

성자들은 모두 침식체에게 맞서다 죽고, 임금께선 후계자를 결정하지도 못한 채 승하하셨지.


촌장 오닐 : 그리고 임금의 총애를 받던 총사대장 큐리안은..

촌장 오닐 : 낙원문의 중추인 열쇠를 가지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네.

큐리안 : ...

엘라 : 그래서 재건단은 파괴된 낙원문을 복원하려고 시도 중이야. 나라의 흥망을 가른 사건이니까.


촌장 오닐 : 하지만 지식을 전수 받은 왕족이 없는 한, 그건 결국 모조품에 지나지 않아.

촌장 오닐 : 우리는 오랫동안 침식에 시달려 왔네. 침식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

촌장 오닐 :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왔건만, 침식의 고통은 하루도 우릴 놓아 주지 않았어.

촌장 오닐 : 그러던 어느날 우리 앞에 나타난 거라네.

촌장 오닐 : 자신이 큐리안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친구가 말이야.

큐리안 : ...

엘라 :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 아니면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거나.

큐리안 : 나는.. 낙원문의 기능이 한계에 달했으니 열쇠를 운반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큐리안 : 그렇게 남부로 향하던 중 침식체에게 공격 받은 마을을 도왔고..

큐리안 : 거기서 어떤 기이한 존재와 마주쳤지.

큐리안 : 그건 우리가 알던 침식체는 아니었지만, 인간 역시 아니었어.

큐리안 : 놈과 마주친 뒤의 기억은.. 그저 병사들의 절규와 비명뿐이야.

촌장 오닐 : 으음.

촌장 오닐 : 솔직히 나는 자네 이야기를 믿을 수 없네.

촌장 오닐 : 하지만 여기 외성에 사는 주민들은 침식으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아 왔어. 

촌장 오닐 : 그러니 그들에겐 자네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었다고 설명할 걸세.

촌장 오닐 :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 헛소리는 더 이상 입 밖으로 내지 말게.

촌장 오닐 : 이 늙은이의 말을 이해하겠나?

큐리안 : 알겠다. 그렇게 하지.

촌장 오닐 : 그러면 이 자의 관리는 앞으로 엘라 님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라 : 고맙습니다, 촌장님.


엘라 : ...

큐리안 : 괜찮은 건가?

엘라 : 갑자기 무슨 소리지?

큐리안 : 아까부터 계속 아픈 걸 참는 기색이더군.

큐리안 : 옷이 젖고 있는데, 아무래도 피 같아서 말이야.

엘라: 복부의 상처가 터진 것뿐이야.

큐리안 : 혹시 날 구하다가 다친 건가?

엘라 : 신경 쓸 것 없어. 체질 문제 때문에 회복이 평소보다 더딜 뿐이니까. 

큐리안 : 그렇군. 수술을 할 수 있을 정도라면 나보다 자기 몸은 더 잘 알겠지. 

엘라 : 당신이야말로 수술 때 피를 많이 흘렸어. 영양 보충이 필요할 거야.

큐리안 : 듣고 보니..허기가 지는군. 배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아.

엘라 : 당신도 자기 몸을 참 잘 아는 것 같네. 혹시 감자 알러지 있어?

큐리안 : 음? 딱히 그런 건 없다만.

엘라 : 그럼 잠깐 기다려 봐.


큐리안 : 대접해 줘서 고맙다. 감자로 이런 맛을 낼 수도 있군.

엘라 : 금방 물릴 테니 각오해 두는 게 좋아.

엘라 : 여기서 기르는 작물은 감자나 칡 정도니까.

큐리안 : 내가 여기 계속 머물러도 괜찮겠나?

엘라 : 자기를 큐리안이라고 믿는 얼뜨기 한 명도 챙겨주지 못할 만큼 인심 박한 곳은 아니야.

큐리안 : 고맙군. 그럼 염치 불구하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신세를 지기로 하지.

엘라 :그리고 이거 받아.

큐리안 : 뭐지, 이건? 나뭇가지와 나이프..?

엘라 : 배를 채웠으면 밥값을 해야지. 누워 있는 동안 같이 화살이나 깎아 줘.

큐리안 : 그런데 국경수비대라는 건 어떤 조직이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

엘라 : 총사대가 전멸하고 왕의 마지막 직계마저 디어루트에서 전사하면서, 

노르드나빅은 국가 기능을 상실했어.

엘라 : 남은 귀족들은 국가 재건단을 세우고 빈 왕좌를 대신해 군을 재편성했지.

엘라 : 왕립 국경수비대도 그 중 하나지. 말 그대로 국경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야.


큐리안 : 하지만 자네들은 병영도 없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내는 것 같더군.

엘라 : 말만 왕립이고 근방 거주민들을 데려다가 최소한의 훈련만 시키는 게 실상이니까.

엘라 : 내 부대원들도 대부분 자기 고향을 지키겠다고 모인 사람들이야.

엘라 : 노르드나빅에 그렇게 만들어진 국경수비대만 백 군데가 넘어.

엘라 : 급하게 숫자만 늘리다 보니 규모가 너무 커져서, 재건단도 지원은 포기한 지 오래지.

엘라 : 그러니 민간인들과의 공생은 필수야.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그 대가로 물자를 받는 거지.

엘라 : 가끔은 텃밭일도 도와 주고 말이야.

큐리안 : 실력을 보니 요리도 자주 도왔던 모양이군.

엘라 : 재료라고 해 봐야 감자랑 도시에서 구한 향신료 조금뿐이지만..

큐리안 : 여긴 물자가 많이 부족한 편인가?

엘라 : 장비가 고장나도 새로 보급 받지 못해서 놔두는 상황이야. 식량도 자급자족하는 상황이고.

엘라 : 이만하면 충분한 대답이 됐어?


큐리안 : 그 고장 났다는 장비, 내가 좀 확인해 봐도 되겠나?

와트 : 엘라 대장님? 저 사람이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엘라 : 보다시피 1년 전 고장난 쐐기 대포를 고치고 있어.

엘라 : 자기 목숨을 구해 준 답례를 하고 싶다네.

와트 : 하지만 신분도 불분명한 외부인에게 중요한 장비를 맡기는 건 좀....


와트 : 우왓?! 방금 대포가 작동한 건가?

큐리안 : 자동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했다. 다행히 부품을 교체할 필요는 없겠어.

와트 : 테스트고 자시고 대포를 멋대로 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큐리안 : 걱정 마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쐈으니까.

큐리안 : 실제로 쏴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검증법도 없지 않나?

와트 : 젠장, 쐐기창 한 발이 얼마짜린지나 알아? 아무데나 쏴 버리면 땅속에 박혀서 회수도 못한다고!

큐리안 : 미안하군. 가격을 고려해 무기를 써 본 적이 없어서.

엘라 : 손 봐야 할 장비가 몇 개 더 있어. 그것도 같이 봐 줄 수 있을까?

큐리안 :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이들 : 앗, 작동한다!

아이들 : 야호! 깨끗한 물이야!

외성 주민 : 정말로 정수장치가 고쳐진 건가?

외성 주민 : 드디어 지긋지긋한 흙탕물과도 작별이군.

외성 주민 : 내가 아까 저기서 들었는데, 저 외부인이 혼자 고친 거래.

외성 주민 : 뭐? 와트가 수리한 게 아니었어?

외성 주민 : 굉장한데? 땜장이 와트도 포기했던 걸 무슨 수로 고친 거지?

외성 주민 : 정수장치만 그런 게 아니야. 성벽의 장비들도 전부 말짱하게 고쳤다더라고.

와트 : ... 쳇.


저기 ...

큐리안 : 음?

피터 : 기계를 잘 알면 혹시 이 오토바이도 한 번 봐 줄 수 있어요?

큐리안 : 트라이크로군. 꽤 구형 모델 같은데.

피터 : 헤헤, 아버지가 현역이던 시절에 몰던 거예요.

큐리안 : 그렇군.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지.

피터 : 고마워요!


엘라 : 수고했어. 하루만에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결해 줬네.

큐리안 : 이렇게 눈에 띄게 돌아다녀도 괜찮겠나? 주민들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텐데?

엘라 : 눈에 띄는 편이 좋아. 주민들에게 당신이 그 큐리안과 다른 사람이란 걸 각인시키려면.

큐리안 : ..난 총사대장 제라드 큐리안이다. 언제까지 동명이인으로 남을 생각은 없어.

엘라 : 촌장님이 했던 말 기억해 둬.

엘라 : 저 사람들에게 당신이 과거에 어떤 큐리안이었는지는 중요치 않아.

엘라 : 지금 이곳에 머무는 큐리안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가 중요한 거지.

큐리안 : 알겠다. 명심해 두지.


엘라 : 그리고 고마워. 

당신이 손 봐 준 덕분에 마을의 상황도 많이 나아졌어.

엘라 : 몸상태는 좀 어때?

큐리안 : 괜찮다. 깨어났을 때보다는 많이 회복됐어.

큐리안 : 이 정도면 그만 여길 떠나도 괜찮..

큐리안 : 커헉!


엘라 : 별로 괜찮지 않아 보이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잖아. 

큐리안 : 그렇게 갑자기 다리를 걸면 보통은 쓰러지지 않나?

엘라 : 총사대 최강의 카운터가 고작 다리 걸기에 당했다면, 그건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뜻이지.

엘라 : 안그래?

큐리안: ... 그래. 일리 있는 말이군.

엘라 : 오늘은 이만 병실로 돌아가. 진단은 내일 다시 해 줄 테니까.

큐리안 : 그러지.


외성 주민 : 엘라 대장님!

엘라 : 무슨 일이야?

외성 주민 : 낮에 외성 밖으로 고철을 주우러 갔던 아이들이 여태 돌아오지 않았어요.

외성 주민 : 부모님들이 찾으러 나갔는데 계속 소식이 없어서... 흑...

엘라 : 알겠어. 바로 대원들을 소집해서 수색해 볼게.

큐리안 : 나도 돕지.

엘라 : 환자는 빠져. 외성 밖은 언제 침식체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어.

큐리안 :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엘라 : 의사의 소견을 무시하지 마. 지금 같은 밤은 특히 더 위험해.

큐리안 : 방아쇠를 당기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큐리안 : 나에겐 지금 이곳 사람들에게 큐리안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 말이지.


엘라: ...

엘라 : 방금 대사는 나르시스트 같아서 별로였어. 그냥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고 해.

큐리안 :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

엘라: 하아, 웬만하면 함부로 앞에 나서지 마.

큐리안 : 노력해 보기로 하지.

엘라: 혹시라도 침식체와 싸우게 되면 최대한 관절부를 노려. 그나마 갑피가 약한 곳이야.

엘라: 물론 쉽진 않겠지만.


수비대원 :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와트 : 성문을 내려라! 최소한의 병력만 남고 모두 출발한다!

와트 : 음?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큐리안 : 실종된 아이들을 구하러 간다고 하더군. 도우러 왔다.

와트 : 흥. 우리더러 뒤처져서 짐만 될 게 뻔한 환자까지 챙기라고? 당장 돌아가.


큐리안 : 당신들 대장에게 허락은 받았어.

와트 : 뭐? 엘라 대장님이?

큐리안 : 그리고 걱정처럼 뒤처지지는 않을 거야. 친구가 도와 주기로 했거든.

와트 : 친구라고?

수비대원 : 병기마가 움직인다!

수비대원 :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전까지 창고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는데?

와트 : ...

와트 : 좋을 대로 해. 대신 우리 발목만 잡지 말라고.


꺄아악!

수비대원 : 들립니다! 아이들 목소리입니다!

와트 : 나도 들었다. 폐허 쪽 건물에 숨어 있는 건가?

와트 : 하지만 너무 멀어.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큐리안 : 뒤따라오도록. 내가 먼저 가겠다.

와트 : 뭐? 이봐, 뭘 멋대로..!

와트 : 기다려! 혼자 뛰어드는 건 위험해!

와트 : 망할! 무슨 말이 저렇게 빨라?!

수비대원 : 괜찮지 않을까요? 저자가 정말로 그 총사대의 큐리안이라면...

와트 : 큐리안이 아니면?! 사람 목숨으로 도박할 셈이냐!

와트 :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쫓아!

수비대원 : 네, 넵!


외성 아이A : 안 돼. 저러다 문이 부서지겠어.

외성 아이B : 씨이.. 그러길래 내가 얼른 가자고 했잖아.

외성 아이A : 너도 좋대매! 지난번엔 여기까진 안전했었다고 했으면서!

외성 아이C : 잠깐만, 얘들아. 소리가 안 들려.

외성 아이A : 어? 그냥 포기하고 갔나?

외성 아이B : 꺄악! 벽이 무너졌어!

외성 아이C : 다들 도망쳐!

외성 아이A : 아, 안 돼! 문을 막아 놔서 나갈 데가 없어!


침식체 : 크르륵..!!

큐리안 : 네 상대는 이쪽이다.


외성 아이A : 저 사람.. 말 되게 잘 탄다...

외성 아이B : 대장님이 구했던 그 아저씨야! 멋지다!

외성 아이C : 뭐해! 저 괴물이 없을 때 얼른 빠져나가자!

외성 아이B : 으, 응!

외성 아이B : 꺄악!

외성 아이A : 다들 뛰어! 한 마리 더 있었어!!

외성 아이C : 어떡해! 루시가 넘어졌어!


큐리안 : 이런, 한 마리 더 있었나?

피터 : 여기다! 이 괴물아!

피터 : 약오르냐? 약오르지? 그럼 어디 쫓아와 보시지!

큐리안 : 저 소년은...?

외성 아이C : 피터잖아! 저 바이크 언제 고쳤지?!

외성 아이A : 지금이야, 루시! 얼른 일어나!


큐리안 : 갑피가 계속 재생되는군. 이대로는 이쪽의 총탄이 먼저 바닥나겠어.

큐리안 : 그 여자가 말한 관절부.. 움직일 때 드러나는 저 붉은 부분인가?

큐리안 : 지금이다!

큐리안 : 해치웠군. ... 음?

피터 : 우와아앗! 따라잡힌다아아!

큐리안 : 괜찮나, 소년?

피터 : 우와...... 저 괴물을 단 한 발로 해치운 거예요?

큐리안 : 다리의 관절을 맞춘 것뿐이다. 내버려 두면 다시 일어나서 덤벼들겠지.

피터 : 그, 그럼 어서 해치워 버려야죠!

큐리안 : 그건 안 되겠어. 탄환이 다 떨어졌다.

피터 : 네에에에?! 그럼 왜 말에서 내리는 거예요! 얼른 도망쳐야죠!


큐리안 : 걱정마라. 탄환이 없다고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큐리안 : 하아아앗!


...

엘라 :그래서 다짜고짜 말에서 내려 침식체에게 주먹질을 했다고?

큐리안 : 그래.

엘라 : 그걸 맞은 침식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큐리안 : 발을 삐끗해서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간 모양이야.

엘라 : 무모하네. 카운터라도 침식체와 맨몸으로 싸우는 경우는 드물어.

큐리안 : 이번에 실감했다. 부끄럽군.

엘라 : 뒤늦게 도착한 대원들 말로는 침식체가 휘두르는 팔에 맞고 쐐기창처럼 날아갔다던데.

큐리안 : 굳이 과장되게 묘사를 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엘라 : ......후우. 좋아.


엘라 : 일어나. 막지 않을 테니까 어디 날 한 번 주먹으로 있는 힘껏 쳐 봐.

큐리안 : 내가 전력을 다하면 뼈가 으스러질 텐데, 괜찮겠나?

엘라 : 먼저 안 치면 내가 칠 거야.

큐리안 : 어쩔 수 없군. 그럼 실례하지.

엘라 : 어때?

큐리안 :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군. 오히려 내 손이 아플 지경이다.

큐리안 : 혹시 자네의 카운터 능력은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건가?

엘라 : 난 아무짓 안 했어. 당신 주먹이 솜방망이인 거지.

엘라 : 그리고 큐리안 같은 고등급 카운터라면 수술 상처쯤은 진작에 아물었어야 해.

엘라 : 하지만 당신은 아물긴커녕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상처가 벌어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큐리안 : 이런 경우를 전에도 본 적이 있나?

엘라 : 없어. 한 번도.

엘라 : 애초에 그림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전례가 없고 말이야.

큐리안 : 그림자? 그게 뭐지?

엘라 : 침식의 영향으로 침식체가 된 카운터. 정식 명칭은 데몬 타입이라고 불러.

큐리안 : 성자가 평범한 인간들처럼 침식의 영향을 받는다고? 처음 듣는 얘기군.

엘라 : 과거엔 모두 무지했으니까. 그래서 국경 저편엔 한때 카운터였던 그림자들이 많다고 해.

엘라 : 하지만 당신이 정말 20년간 국경 저편을 떠돌았다면, 

관리국이 제시한 정보 대신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어.

엘라 : CRF를 완전히 소진한다고 반드시 그림자가 되는 게 아니라, 능력만 잃는다는 가능성 말이지.

엘라 : 물론 그 첫 사례는 당신이 되는 거고.


큐리안 : 관리국? 그건 재건단에 속한 기구 이름인가?

엘라 : 전혀 달라.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고, 침식의 날 이전부터 그 위협을 연구해 온 기관이야.

큐리안 : 침식의 날 이전부터? 바깥 세상에도 정착자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건가?

엘라 : 글쎄. 하지만 어느 쪽이나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생존하는 것도 힘들었겠지.

엘라 : 아, 그리고 아직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남았어.

큐리안 : 그게 뭐지?

엘라: 당신이 타고 다니던 그 병기마에 대해서야.


1-6 인터루드 #2

엘라 : 아이들을 데리고 온 뒤 작동을 멈췄어. 상태는 어때보여?

큐리안 : 파손된 곳은 없다. 단순히 동력이 부족해서 멈춘 것 같군.

큐리안 : 다시 움직이게 하려면 병기마의 사양에 맞는 강력한 동력원이 필요해.

엘라 : 수송 차량에 쓰는 예비용 배터리가 있어. 그걸로 동력을 공급해 볼 수 없을까? 

큐리안 : 유감이지만 자동차 배터리로 병기마를 움직일 수는 없어.

엘라 : 흐음... 원인을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큐리안 : 무슨 뜻이지?


엘라 : 자기가 타고 다니던 병기마에 대한 지식은 잊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엘라 : 당신이 병기마를 어딘가에서 훔쳤을 뿐이라면, 방금처럼 보자마자 판단하진 못했을 테니까. 

큐리안 : 아직도 의심 받고 있었나? 유감이군.

엘라 : 미안. 대신 저녁으로 감자 요리 대접할게.

엘라 :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만나 봐야 할 친구들이 있어.

큐리안 : 친구들?


...

큐리안 : 고철 수집이라고?

외성 아이A : 네. 외성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쓸 만한 골동품을 찾을 수 있거든요.

큐리안 : 하지만 아이들끼리 침식지대로 나가는 건 위험하진 않나?

외성 아이B : 너무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댔어요! 좋은 고철을 찾으면 돈도 많이 벌고요!

외성 아이C : 도시 어른들은 저희가 침식 환자라고 일을 안 시켜 줘요.

외성 아이A : 그래서 어제도 고철을 모으러 갔는데 좀 멀리 갔다가 침식체를 만난 거예요.

외성 아이B : 아저씨가 와 줘서 살았어요!

외성 아이C : 침식체한테 맨주먹으로 덤빌 때는 죽는 줄 알았지만요.

큐리안 : 크흠. 그건 잊어 버려도 돼.


외성 아이A : 아무튼 침식체한테 쫓기기 전에 커다란 고철배를 발견했거든요?

외성 아이C : 아직 거기 있을 거예요. 우리끼리는 못 옮길 만큼 엄청 컸어요.

외성 아이B : 저희 집보다요! 게다가 엄청 신기하게 생겼어요!

큐리안 : 고철배라고? 이 근처에 그런 배를 띄울 호수가 있었나?

엘라 : 차원 함선을 말하는 거야. 관리국이 지원하는 기술로 만들어진 대형 선박이지.

엘라 : 바깥 세상에서는 그걸 타고 이면세계로 넘어간다고 해.

큐리안 : 이면세계?

엘라 : 당신도 익숙할 거야. 침식의 날에 침식체를 쏟아냈던 균열 저편의 세계거든.

엘라 : 낙원문이 이면세계의 통로를 잠그는 자물쇠라면, 차원 함선은 통로를 여는 열쇠인 셈이지.

큐리안 : 왜 그런 엄청난 물건이 외성 밖에 방치되어 있는 거지?

엘라 : 글쎄. 어쩌면 관리국에서 로스트 쉽이라고 부르는 물건일지도.

엘라 : 하지만 지금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 고철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거야.


큐리안 : 차원 함선을 고쳐 쓰자는 말인가?

큐리안 : 미안하지만, 나도 내가 모르는 물건을 고칠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해.

엘라 : 잘못 짚었어. 여길 지키기도 벅찬데 자진해서 이면세계에 뛰어들 이유도 없잖아.

엘라 : 하지만 함선의 코어가 아직 멀쩡하다면, 써먹어 볼 수는 있겠지.

큐리안 : 함선에 쓰인 동력원으로 병기마를 다시 움직여 보자는 건가?

큐리안 :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런 이유로 이곳 사람들을 괜한 위험에 빠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엘라 : 함선까지는 나 혼자 동행할 거야.

엘라 : 그리고 공짜로 도와 준다고 한 적도 없어. 거래를 하자는 거지.

큐리안 : 거래?


엘라 : 우리 국경수비대에 정식대원으로 들어와. 그게 내 조건이야.

큐리안 :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 자네는 몰라도 다른 대원들이 달갑지 않게 여길 텐데.

엘라 : 난 이곳 남부 국경수비대의 결정권자로서 부대에 필요한 결정을 내린 거야.

엘라 : 제라드 큐리안이 여기 남는 편이, 우리에게 득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지.

엘라 : 그리고...

엘라 : 무모한 짓이긴 했지만, 목숨을 내던지는 것만큼 확실한 자기증명도 없어.

엘라 : 당신이 못마땅했던 대원들도 아이들을 구한 행동에는 틀림없이 마음이 움직였을 거야.

엘라 :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큐리안 : ...


1-7 인터루드 #3

외성 아이A : 와, 진짜로 다시 움직인다.

외성 아이C : 그 배에서 가져 온 부품이 효과가 있었나 봐!

외성 아이B : 신기하다............. 가까이서 봐도 진짜 말 같아.

엘라 : 그럼 약속한 대로 당신은 오늘부터 국경수비대의 일원이야.

큐리안 : 확정짓기엔 아직 일러.

큐리안 : 새로 장착한 동력원의 출력이 너무 강해.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 수도 있어.

큐리안 :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미리 신호를 보내라, 허밋.

허밋 : ....!

외성 아이A : 앗, 방금 연기가 새어 나왔어!

외성 아이B : 폭발하려나봐!

외성 아이C : 도망쳐!


허밋 : ...

큐리안 : 음, 기분은 괜찮아 보이는군.

큐리안 : 녀석을 고칠만한 장소가 있어서 다행이야.

엘라 : 외성에 남아 있던 전쟁 이전의 설비실이야. 한때 셔우드는 병기고 역할도 했으니까.

엘라 : 그런데, 그 병기마의 원래 이름이 허밋이었어?

큐리안 : 적당히 떠오르는 대로 부른 이름이다. 더 괜찮은 이름이 있다면 추천해 줘도 좋아.

엘라 : 로시난테?

큐리안 :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엘라 : 소설에 나오는 비쩍 마른 말 이름이야. 하긴 당신이 쇄국의 시기였던 

20년 전 사람이라면 모를 만도 하겠네.

큐리안 : 그렇군. 이 녀석의 디자인 정도면 꽤나 늠름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엘라 : 그 말의 주인 성격이 당신과 닮았거든.

엘라 : 농담은 이쯤 할게. 허밋이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아.

큐리안 : 고맙다. 다른 이들처럼 날 원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도와줘서.


엘라: ...!

엘라 : 방금 그거 느꼈어?

큐리안 : 그래.

큐리안 : 삶은 감자 냄새가 나는군. 곧 저녁시간인가?

엘라 : 바닥의 진동을 말한 거야.

엘라 : 게다가 공기도 변하고 있어.

큐리안 : 침식파인가?

엘라 : 맞아. 하지만 평소와 느낌이 달라. 불쾌할 정도로. 

와트 : 엘라 대장! 침식 레벨이 급속도로 오르고 있습니다!

엘라 : 관측탑 소식은?


와트 : 그게, 아직까지는.........

와트 : ... 잠깐, 뭐라고?

와트 : ...!

와트 : 대장! 이쪽으로 오는 대형 침식체를 포착했답니다! 2종 추정!

엘라 : 대원들을 소집해. 장벽에서 막아낸다.

와트 : 예, 대장!

엘라 : 큐리안, 최대한 빨리 장벽으로 가야 해. 허밋을 써도 되겠어?


큐리안 : 물론이지. 정비는 진작에 끝났어.

큐리안 : 뒤에 타라, 엘라 대장.



1-8 신출내기 베테랑

와트 : 일제 사격! 머리의 파손부를 노려라!

수비대원 : 놈이 장벽을 들이받으려 합니다!

와트 : 충격 대비! 완충 배리어 전개!

와트 : 다들 괜찮나?

수비대원 : 콜록, 콜록... 괜찮습니다.

수비대원 : 2종 침식체, 무력화 확인!

와트 : 장벽의 상태는?

수비대원 : 일부 손상됐지만 다행히 관통된 곳은 없습니다.

와트 : 큭.. 크큭...

와트 : 모두 잘해 줬다! 우리가 2종 놈을 막았어!


큐리안 : 다행이군.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해결된 모양이야.

사격조는 위치 사수! 포격 훈련 받은 적 있는 녀석들은 다들 대포로 간다! 움직여!

엘라 : 아니. 워치에 반응이 와. 침식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와트 : 각자 파편 회수하고, 장벽 보수 작업 준비해.

와트 : 오늘 저녁은 든든하게 먹자고.

관측대원 : 어라? 2종 침식체 신호가 다시 잡히고 있습니다.

와트 :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처리했잖아?

관측대원 : 아뇨! 다른 곳입니다!

관측대원 : 게다가 하나가 아니에요! 신호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비대원A : 방금 진동 느꼈어?

수비대원B : ... 진짜야? 2종이 여럿 나타난 적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와트 : ...

와트 : 전원 위치 사수! 2파에 대비해라!


관측대원 : 점점 가까워집니다! 오백 미터!

관측대원 : 삼백 미터! 백 미터..!

수비대원A : 어이, 뭐가 보여?

수비대원B : 아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수비대원A : 그러면 탐지기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수비대원A : 으윽! 방금 뭐였지?

수비대원B : 장벽이 흔들린다! 뭐라도 붙잡아! 

와트 : 큭.......! 침식체가 안 보인다는 건 설마?! 

엘라 : 놈들이 땅 밑에서 장벽을 부수려는 거야. 

큐리안 : 장벽이 지하까지 막고 있는 건가?

엘라 : 장벽이 세워진 뒤로 수 차례의 지각변동이 있었어.

엘라 : 셔우드 외성의 장벽 중 절반 이상이 아래에 묻혀 있는 셈이지.

엘라 : 덕분에 당장은 놈들이 외성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고 있지만...


엘라 : 지금 우리가 가진 무기로는 땅 밑에 숨은 녀석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엘라 : 이대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거야.

큐리안 : 방법이라면 있다.

엘라 : 대응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확실해?

큐리안 : 확실하다. 하지만 나 혼자서 실행에 옮기는 건 불가능해.


와트 : 예? 쐐기 대포를 말입니까?

엘라 : 그래. 쐐기창이라면 놈들이 파고든 곳까지 닿을 수 있다.

와트 : 쐐기창을 사용한다면.. 타격은 줄 수 있겠군요.

와트 :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의 약점을 노리긴 힘들 겁니다.

큐리안 : 침식체는 단순해. 위쪽에서 공격을 받는 순간, 공격한 상대를 찾아 위로 튀어나올 거다.

큐리안 : 그 때를 노려 한 마리씩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놈을 처치할 수 있어.

와트 : 대장, 저자의 작전은 실전성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와트 : 저희가 시간을 버는 동안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엘라 : 우리가 외성을 포기하면 놈들은 도시까지 노릴 거야. 그런 건 해결책이 아니야.

와트 : ...

와트 : 알겠습니다. 그럼 대포 통제권은 잠시 저 자에게 넘기도록 하죠.

큐리안 : 아니. 대포를 쏘는 건 와트, 자네가 맡아줬으면 해.

큐리안 : 엘라 대장이 수비대에 자네만큼 병기를 잘 다루는 기술자가 없다고 하더군.

와트 : 쳇, 입에 발린 소리나 늘어놓긴.

와트 : 그럼 그쪽은 뒤에서 손 놓고 구경이나 할 셈인가?

큐리안 : 나는 엘라 대장과 함께 장벽 밖으로 나가겠다.


와트 : 뭐?! 대장이야 그렇다 쳐도 당신은 카운터도 아니잖아!

엘라 : 난 그렇다 치는 거냐?

와트 : 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엘라 : 농담이야.

엘라 : 침식체를 지상으로 유인하더라도, 장벽 위에서 싸우면 시선을 끌지 못해. 

엘라 : 하지만 큐리안 대원에겐 병기마가 있으니 충분히 놈들을 따돌릴 수 있어. 

엘라 : 놈들의 시선을 끌어서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지.

와트 : ... 거 진짜 목숨 내놓고 하는 짓이 되겠군요.

엘라 : 그러니까 빗나가지 않게 잘 쏴.

와트 : 죽지나 마십쇼, 두 분 다.


엘라 : 이번엔 그쪽으로 간다!

큐리안 : 확인했어! 내가 발사좌표로 유인하지!

수비대원 : 놈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와트 : 지금이다! 발사!

와트 : 방금 그게 마지막 놈이었나?

수비대원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침식파가 더는 감지되지 않아요.

와트 :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저 덩치 큰 놈들을 전부 해치우다니...

큐리안 : 헉..... 헉...... 끝난건가?

엘라 : ...

엘라 : 침식파는 사라졌어. 우리가 모두 처리한 것 같아.

큐리안 : 그거 다행이군.

큐리안 : 혼란스러운 와중에 대원들이 다들 제 역할을 잘 해줬어. 

큐리안 : 평소에도.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거겠지.


엘라 : 겸손 떨 필요 없어.

엘라 : 당신의 지휘가 아니었으면...

엘라 : ... 큐리안?


(...!)

병사 : 이해가 안 됩니다.

병사 : 아무리 보안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호송하는 병사들도 정체를 모른다니요.

병사 : 우리가 지켜야 할 열쇠라는 것이 최소한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큐리안 : 지휘권자 외에 성유물을 공개해선 안 된다는 군명이 있기 때문이다.

병사 : 어째서입니까? 저희 중에 성유물을 노리는 배반자라도 있다는 뜻입니까?

큐리안 :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큐리안 :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다들 돌아가라.

부관 : 총사대장님, 병사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큐리안 : 열쇠의 힘을 겪어 본 이상 물욕이 생길 수도 있어.

큐리안 : 무엇인지 모른다면 탐난다고 해도 노릴 수 없지.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뿐이다.

부관 : ... 모쪼록 아무 탈 없이 도착하면 좋겠군요.

큐리안 : 그래. 다들 같은 생각일 거다.

큐리안 : 더 이상 절망하는 건, 누구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

큐리안 : 여기는...?

엘라 : 병실. 여기서 두 번이나 멀쩡하게 깨어난 건 당신이 처음이야.

큐리안 : 으음.. 어쩌다 또 실려 온 거지?

엘라 : 전투가 끝나고 갑자기 쓰러졌어.

큐리안 : 다른 병사들은? 인명 피해는 없었나?

엘라 : 당신이 전부야. 부상자 1명.

큐리안 :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


엘라 : 안심하긴 아직 일러. 당장 자기가 쓰러진 이유도 모르고 있잖아?

큐리안 : 회복도 제대로 못한 상태로 무리를 한 탓이겠지. 전시에는 흔한 일이다.

큐리안 : 그런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마취가 덜 풀린 건가?

엘라 : 난 마취 같은 거 안 해. 게다가 이번엔 수술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

큐리안 : 그렇다면...?

엘라 : 당신. 침식증후군이야.

엘라 : 그것도 꽤 진행이 된 상태야. 아직 침식체가 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큐리안 : 침식체에게 부상당한 인간이 겪는 병을 말하는 건가?

엘라 : 침식체에게 물리지 않아도 돼. 침식 증후군은 침식파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걸리거든.

엘라 : 이렇게 되면 당신이 20년 전 사람이라는 터무니없는 말도 그럴싸해지긴 하지.

엘라 : 침식 증후군은 침식 현상만큼 증상이 천차만별이야.

엘라 : 바깥 나라에서 보고된 사례 중에는 노화가 지연된 경우도 있었어.

큐리안 : 불로불사는 축복 아닌가?

엘라 : 그 대신 세포가 정상적으로 사멸되지 않아서 온몸이 종양에 뒤덮인 채로 사망했지.

큐리안 : ...

엘라 : 침식 증후군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남은 삶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

엘라 : 하지만 그 사례를 예로 들면, 20년 전 사람이 젊은 시절 그대로인 것도 설명돼.

엘라 : 20년 동안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큐리안 : ... 그렇군.


엘라 : 울고 싶으면 어깨라도 빌려 줘?

큐리안 : 아직은 눈물이 안 나는데. 나중에 한 번 더 물어봐 주겠나?

엘라 : 의외로 담담하네. 경멸하던 환자들과 같은 처지가 됐다는 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큐리안 : 열쇠를 운반하는 임무는 목숨을 다해서라도 마칠 각오였다.

큐리안 : 그런데 실패해 버린 지금은..

큐리안 : 내가 망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

엘라 : 충분히 살아 있다고 믿어도 좋아. 당신 덕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더 살아가게 됐으니까.

큐리안 : 격려 고맙군.

큐리안 : 하지만 이런 몸으로 열쇠를 되찾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엘라 : 걱정 마. 침식환자는 여기서 많이 상대해 봤어.

엘라 : 명예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게.

큐리안 : 말만으로도 고맙군.


큐리안 : 엘라 대장, 나 같은 환자가 수비대 일에 계속 관여해도 괜찮겠나?

엘라 : 국경지대 주민들은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대부분 침식환자들이야.

엘라 : 도시에 머물면 보균자 취급만 받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여기 정착한 사람들이지.

엘라 :그런 사람들이 국경에 모여 마을을 이루고, 수비대를 도와 주는 거야.

엘라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해. 앞으로 내 지휘권은 당신에게 일임할 테니까.


큐리안 : 지휘권을...? 어째서?

엘라 : 내가 대장직을 맡게 된 이유는 순전히 카운터라는 명함 때문이야.

엘라 : 나에게 리더의 자질 같은 건 없어. 그런 교육도 받은 적 없고. 줄곧 흉내만 냈을 뿐이지.

엘라 :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

엘라 : 병사들을 앞뒀을 때의 침착함. 상황을 정리하고 방향을 정하는 결단력. 

모두 좋은 지휘관의 자질이었지.

큐리안 : 너무 경솔해. 지휘관이란 병사들의 신망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큐리안 : 갑자기 지휘권을 넘긴다고 자네 부하들이 내 말을 따를 것 같나?


엘라 : 대원들은 전부 동의했어. 와트도 마찬가지고.

엘라 : 주민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와 내 대원들은 알아.

엘라 :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건 케케묵은 과거의 응어리가 아니라, 

당신처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군인이라는 걸.


큐리안 : .....

큐리안 : 제의를 수락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엘라 : 뭔데?

큐리안 : 대장은 침식 증후군 환자도 아니고, 의사로서의 실력도 뛰어나.

큐리안 : 그리고 성자.. 아니, 카운터로서 남들보다 강력한 힘도 가졌지.

큐리안 : 왜 그런 인재가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최전선에서 싸우는지 듣고 싶군.


엘라 : 선택했을 뿐이야.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엘라 : 원하는 걸 전부 이룰 순 없으니까.

큐리안 : 카운터로 각성한 사람으로서의 책무 같은 건가?

엘라 :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 없어.

엘라 : 처음엔 그저 침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법을 배웠지.

엘라 : 하지만 결국 지키고 싶었던 사람은 죽고, 나는 카운터가 됐어.

엘라 : 이 힘으로 침식체를 없애면 침식 증후군에 고통 받는 사람들도 줄어들지 않을까...

엘라 :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당신도 구해 버린 거야.

엘라 : 그리고 오늘을 기점으로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나보다 당신이란 확신이 들었지.


큐리안 : 그렇군. 혹시나 지휘권을 넘기는 다른 이유가 있나 해서 말이야.

엘라 : 왜? 내가 당신에게 일을 떠넘기고 도망치기라도 할 줄 알았어?

큐리안 : 아니. 혹시나 대장이 연심에 사로잡혀 날 너무 믿는 것 아닌가 걱정했거든.


큐리안 : .. 크헉!

엘라 : 이전에도 느꼈지만 사람이 참 뻔뻔하네.

큐리안 : 으윽... 의사가 환자를 때려도 되는 건가?

엘라 : 특정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에는 충격요법이 효과적이야. 이를테면 자의식 과잉 같은 거.

엘라 : 곧 식사 시간이야. 헛소리에 기운 빼지 말고 배나 채워.

큐리안 : 이 냄새. 이번에도 감자인가?

엘라 : 맞아. 앞으로도 실컷 먹을 테니 하루 빨리 익숙해지도록 해.

엘라 :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