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죽은 발레리가 나옵니다.  







                                                                                    



"아름다운 밤하늘. 오고가는 사람들.


불빛이 수놓은 환상. 광활한 우주 속의 고동.


멈춰버린 시간. 감정의 파도.


그 급류 속에 눈을 맞추는 우리.


첫사랑의 풍경이었다."



                                                                                    







1편 2편





두 사람은 목적지 없이 천천히 샤레이드의 번화가를 걸었다.


이제부터 뭘 해볼까. 샤레이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꿈에 부푼 크리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현란한 묘기를 보이고 있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모습이었다.


저글링을 하듯 뛰노는 아이스크림 콘, 이상하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 아이스크림.


저게 그 돈드루마 아이스크림이라는 거구나.


풍문으로나 들어버릇했던 음식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게 되자 궁금증이 마음을 부채질했다.


크리스는 발레리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발레리는 핸드폰으로 갈만한 곳이 있는지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말은 재밌게 놀아보자고 호기롭게 꺼냈다만 역시 긴장하고 있던게 분명했다.



"아! 발레리 씨. 저기 가보지 않을래요?"


"네?? 어디요??"



크리스가 가리킨 곳에는 터키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저기다. 발레리의 눈이 별안간 반짝 하고 빛난다.


단 것을 좋아하는 자신으로선 하늘이 내린 기회와도 같았다.


발레리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덥석.



"앗?!"


"빨리 가봐요! 줄 못서면 안되니까."



라며 크리스는 발레리의 손목을 붙잡고 아이스크림 노점으로 이끌었다.


손목이 잡힌 것에 화들짝 놀라면서 발레리는 엉거주춤하게 끌려갔다.


본인으로서도 워낙 대담한 행동이었는지, 그를 끌고가는 크리스의 얼굴에 묘한 홍조가 서려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 장수의 정신없는 손놀림을 감상했다. 


콘을 뺏었다가 말았다가,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듯 하다가 말았다가.


아이스크림 장수가 손님을 상대로 묘기를 부릴 때마다 탄성과 웃음이 섞인 손님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이 음식. 원래 저렇게 사람을 놀려먹는 느낌인가요?"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거라서 모르겠지만.... 패턴은 뻔하네요. 저라면 저런 놀림에 안 당할 자신 있습니다."


"오호, 정말요?"


"후훗. 뭣하면 내기라도 해보실래요?"



발레리가 내건 조건은 이러했다.


서로의 차례가 됐을 때 아이스크림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상대방이 재주는 것.


재밌겠다 싶어 크리스는 흔쾌히 발레리의 요청을 수락했다.


어느덧, 두 사람의 차례가 되었다.



"자~! 우리 여성분부터 그럼 가보실까요!"



발레리의 머릿속에는 크리스가 허둥대면서 아이스크림 장수의 농간에 놀아나는 귀여운 광경이 그려졌다.


분명 어쩔 줄 모르며 휘적이다가 시간을 된통 끌리겠지.



휘릭.


휘리릭.


휘릭.



"잡았다!"



크리스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묘기를 단 네 차례만에 파훼하고 아이스크림을 잡아챘다.



"...어??"


"발레리 씨! 전 3번밖에 안돌렸는데도 잡아챘다구요?"


"무, 무슨?!"


"자, 자! 다음 손님은 과연! 여자친구 분보다 빨리 잡으실 수 있을까요~?"



아이스크림 장수의 멘트에 주변의 손님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정말! 발레리는 부끄러움에 속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니. 집중하자. 저건 마음을 흔드는 심리전일 뿐이다.


크리스가 했다면 나라고 못할 것 없다.


눈을 부릅뜬다. 결연한 의지로 발레리는 아이스크림 콘을 잡아챌 준비를 마쳤다.


단숨에 파훼해주지.


아이스크림에게, 신속한 손아귀를!












그러나 발레리의 계획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크리스와는 달리 발레리는 무려 20번에 이르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장난에 정신이 가루가 되도록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크리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







"하하하... 괜찮아요. 발레리 씨. 그럴 수도 있는거죠 뭐."


"패턴.... 알고 있었다고.... 이건 순 억지입니다...."



두 사람은 잠시 쉬어갈 겸 공원 벤치에 앉았다.


크리스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농간으로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해진 발레리를 달래줬다.


발레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묵묵히 핥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자니 농락당하던 순간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 아이스크림 장수, 크리스와의 대화를 엿듣고 수작질을 부린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20번에 달하는 조리돌림과 크리스를 곁눈질하며 올라가던 입꼬리가 설명이 되질 않으니까.



"그래도 뭐....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네요."


"그러게요. 발레리 씨는 이런거 좋아하세요?"


"네에. 단 거면 사족을 못쓸 정도죠."


"그래요? 저도 그런 거 같아요."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에 푹 빠진 채 공원의 풍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공원 주변을 배회했다.


공원 중앙에서 터져 나오는 분수를 맞으며 어린이들이 왁자지껄 뛰어놀았다.


하늘에선 자비로운 햇살이 이 모든 순간들을 따사롭게 비춰주었다.


크리스는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발레리를 쳐다봤다.


똑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광경이 마치 서로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늘어지는 시간을 보낸건 정말 간만인 것 같은데.



"진짜 좋네요. 히히."


"뭐가요?"


"날씨 말이에요. 아이스크림 맛도 그렇고."



아이스크림 덕분일까. 이런 사소한 흘러가는 이야기마저 두 사람에겐 달콤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격장이었다.


카페에 나선 직후부터 발레리가 노력한 끝에 찾아낸 비장의 카드.


빅데이터에 의거하면 둘이서 가장 익숙하게 즐길 수 있는 컨텐츠였다.



"크리스 양. 이번에도 내기 하나 하죠. 이번엔 진 사람이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는 걸로."


"흐흥. 자신 있으세요? 이래뵈도 저, 카운터라구요?"


"하하. 크리스 양. 자신 없었다면 구태여 여기 안왔습니다."



사수, 위치로. 두 사람은 각각 사로에 배치되어 있는 총을 들었다.


자신만만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그로니아 전쟁영웅의 실전압축 사격실력을 보여드리죠. 지고 나서 무르기 없기에요?"


"제가 할 말입니다. 이번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거에요."



발레리는 투지를 다지며 총기를 쥐어 어깨에 견착시켰다.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 이번 승부에서까지 질 순 없는 노릇이다.


심호흡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떠올린다.


메이즈 전대에서 단 한번도 사격 만점을 놓친 적이 없는 관리국 총병.


사격의 신, 예고르의 모습을.


총을 쥔 손에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변한 눈은 곧 명중할 목표물을 냉정하게 담아낸다.


이번에는 다르다. 사격이라면 메이즈 전대에서도 밥먹듯이 하던 훈련이다.


지금의 나는 전장 한복판의 냉혹한 저격수.


발레리는 속으로 호기롭게 승리의 주문을, 전투의 함성을 내뱉는다.


김 예고르 형!! 날 지켜봐줘!!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다.


주제넘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겼다.....!!"


"어라?"



한바탕 폭풍같은 시간이 흐른 뒤의 총 스코어, 100점 만점의 83점 대 41점.


처참하게 패한 것은 발레리였다.



"이럴리가 없는데.....?"


"후후후. 자. 발레리 씨? 이제 조건을 이행하셔야죠?"



음흉한 미소를 띄며 크리스가 천천히 발레리를 향해 다가섰다.


승자의 두 손에는 사격장 직원이 상품이라며 갖다준 길쭉한 고양이 인형이 들려 있었다.


사실 만용에 가까웠다. 발레리는 평범한 방패병이다.


총을 잘 쐈다면 방패병이 아니라 예고르와 같은 병과에 배속되어 있었겠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크리스가 명중률이 좋을 줄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크흠흠! 장비 이슈입니다. 평소 쓰던 총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실수가 잦았네요."


"그렇다고 하기엔 점수 차가 2배 이상 나는데요...?"


"....."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 법이라구요. 발레리 씨?"


"그렇게 팩트로 때리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발레리는 볼맨소리로 크리스에게 대꾸했다.



"익.... 제가 너무 심했나요....? 저기요? 괜찮으세요? 우는거 아니죠?"


"사나이는 그런 거에 울지 않습니다..... 응? 어째서 눈물이?"


"푸흡. 아하하하!"



발레리의 과장 섞인 장난에 크리스는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눈까지 찡그리며 활기차게 웃는 모습. 발레리가 크리스를 만난 이래 처음 보는 미소였다.


크리스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건물의 분위기가 태양이 내리쬐는 것처럼 화사해졌다.


냉소적인 미소 말고는 지을 줄 모르던 그녀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넋 나간 듯이, 발레리는 좋아하는 크리스를 계속 쳐다봤다.



"...응? 왜요? 발레리 씨?"


"예뻐서요."


"네???"


"아."



망했다!!! 발레리는 입을 틀어막으며 시선을 피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의 말을 멋대로 내뱉어버리자 발레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아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웃는 모습이 말이에요."


"아...."



크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어쨌든. 내기 조건은 기억하고 계시죠? 제 부탁 하나. 뭐든 들어주시는 걸로."


"그럼요. 무리한거 빼고 전부."


"아뇨? 뭐든요. 설마 메이즈 전대는 약속도 지키지 않는 비겁한 자들의-"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후훗. 좋아요. 그럼 이제 나갈까요?"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발레리의 손을 잡아 사격장 밖으로 이끌었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어서일까. 맞잡은 손은 처음보다도 훨씬 편하고 안락했다.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샤레이드 번화가 곳곳을 누비며 알찬 시간을 보냈다.


"하아. 잘 놀았다."


"재밌었어요?"


"네. 이렇게 놀아본건 처음이에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신기한 놀거리들도 많이 즐겨봤다.


크리스는 보람찬 방학을 보낸 고등학생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크리스를 보자 발레리 역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음에 또 와봐요. 다른 못해본 것들 하러."


"그럴까요? 타로 점 같은걸 못본게 괜히 마음에 걸리는데. 히히."



두 사람은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며 샤레이드의 밤거리를 걸었다.


손은 맞잡은 채로, 걸음걸이는 느릿하게.


오전보다 훨씬 거리감이 줄어들었는지 한결 편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불현듯 크리스는 오늘 단 한차례도 상상 친구를 찾은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게 가능했을까.


사람이 곁에 있다 할지라도, 마음 속으로는 항상 상상 친구를 부르짖으며 아우성치곤 했는데.


모든 것이 두렵고 긴장되서, 상상 친구를 찾아야 마음이 진정될 정도였는데.


문득 맞잡은 손의 주인공을 바라본다. 그로니아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이 샘솟아났다.


친구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눈 앞에 있었구나. 하고.








(반복)





"뭔가 아쉽네요. 이렇게 재밌었는데, 돌아가야 한다는게."


"저도 그렇습니다. 뭐랄까. 이런 시간을 보낸게 저도 처음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 사람 모두 헤어질 생각은 뒷전이었다.


발레리도, 크리스도, 오늘의 만남을 정리하고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운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분명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안다. 지금의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두 갈래의 망설임은 두 남녀의 발을 지박령처럼 땅에 묶어놓았다.


두 갈래의 갈망은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마치 도돌이표처럼 이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왔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즐겁고 소중해서.


어제로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 아까워서 투정을 부린다.


크리스 양과

발레리 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고.



"야경. 예쁜 거 같아요."


"그러게요. 정말."



헤어지기 싫어서 사소한 말로 시간을 끈다. 서로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는 듯 눈에 담는다.


생각을 읽는 힘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눈에 아쉬움이 감돌아 있다는건 알 수 있었다.



"......"



세간의 이야기에 따르면, 남녀간의 관계 속에서는 호감을 확신할 수 있는 타이밍이란게 있다고 한다.


분명 지금이 그 타이밍이란 것이겠지.


앞으로 단 한 걸음. 하지만 이 순간에 이르러서도 발레리의 소심한 마음은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걸 두려워했다.


눈앞에 크리스가 있지만, 건드릴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남들과의 거리에서 한 걸음만큼의 거리를 띄고 있는 탓에.


다른 누군가라면 거리낌없이 내딛을 수 있는 그 한 걸음을, 좁히지 못한다.


발레리 역시 한 걸음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했다. 그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 소녀에게 말로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근원적인 의문이 발레리를 가로막는다.


크리스는 어떨까? 나와 같은 마음일까?


크리스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크리스는 '진짜 나' 를 받아줄 수 있을까?


목적지 앞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방패에 익숙해져 그 뒤에서 자신을 지켜오기만 했던 이 겁쟁이를.


받아줄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생각은 그물에 얽혀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냐. 발레리. 앞으로 한 걸음이야. 그거면 모든 것이 잘 될거야. 라며,


불확실한 가능성을 억지로 장담한다. 이를 악물고 용기를 짜낸다.


발레리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크리스 양."


"네."


"....상상 친구가 아니라, 현실 친구도 나쁘진 않죠?"


"후후. 네. 좋았어요. 정말로.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그러면요. 그...."



목이 멘다. 마음이 떠들썩하게 소리친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얼버무리자. 하고.


yes와 no 사이의 외줄타기를 하며 목에 걸린 자물쇠를 억지로 해제한다.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되돌릴 수는 없는거니까.


크리스는 발레리의 눈을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다. 밤의 거리를 수놓은 빛이 크리스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냥 친구 말고요. 다른 친구는 안될까요?"


"......"


"이를테면...







제 여자친구라던가."



방패 너머의 소중히 감춰뒀던 속마음을 드러낸다.


거리를 수놓은 밤의 불빛 탓일까. 크리스의 눈동자가 병에 담긴 물처럼 일렁였다.


한번 선을 넘어버린 마음으로부터 못 이뤘던 말들이 둑이 무너지듯 터져나왔다.



"정말 좋아합니다. 함께 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요. 


오늘 크리스 양이랑 같이 있던 모든 시간이,


크리스 양이 보여줬던 모든 모습이,


정말, 정말로 좋았어요."





말을 마친다.


세계가 멎는다.


더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도, 거리의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정적만이 이 공간에 치민다.


광활한 우주공간 속에서 생존자를 찾는 전파가 닿지 않듯, 공허한 정적만이 이어진다.



"......"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실패구나. 발레리는 적막 속에서 직감했다.


타이밍을 잘못 쟀던 걸까. 너무 서둘렀던 걸까.


하긴, 고작해야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교류도 많지 않았는데.


실패의 이유를 묻는 온갖 생각들이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어렵게 용기를 냈지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겁쟁이의 마음을 쏘아붙힌다.



"....당장 답하지 않으셔도-"



그래. 도전에 의의를 두자.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하며 발을 빼려는 발레리를









"잠시만요!"



크리스가 다급히 잡아세운다.






.......






처음으로 그와 길게 마주했던건, 가장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들켰을 때.


지독한 감기로 몸도 제대로 못가누던 날. 상상 친구를 찾으며 홀로 괴로워하던 모습을 본 것이 그였다.


얼마나 암담했는지 모른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나 들려왔던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종류였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하나 쯤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비밀이 탄로나 발가벗겨진 채 떨고 있는 자신에게 보여줬다.


클론 병사로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민낯을.


평생 고뇌하며 괴로워했을 점인데도 소탈하게 웃으며 털어놓았다.


어딘가 맛이 간 사람 정도로 치부당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눈을 맞춰줬다.


분명 둑이 무너져내린 것은 그 순간.


처음이었다. 상상친구라는 것을 남에게 털어놓았던 것은.


나조차도 등을 돌리고 마주하지 않으려던 현실을,


상상친구의 뒤에 숨지 않으면 꺾일 수 밖에 없던 나의 과거를,


남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





"네....?"



어리둥절하는 발레리를 앞에 두고 크리스의 심장이 요동친다.


그때부터였을까. 당신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당신을 바라보는 눈이 사뭇 달라졌던 것은.


그리고 지금,


내 마음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저, 발레리 씨."


"...네."




나는 알아. 본인도 서툴면서. 겁쟁이이면서.


남을 품어주려고 하는 그 따뜻한 마음을.


그 마음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큰 구원이었는지를.




"아까 사격 내기에서 그러셨죠? 그....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기로."


"그랬었죠...?"




그러니까, 이젠 내 차례야.




"....그럼 들어주세요. 지금. 부탁할게 있으니까."





마음 속 말을 형상화하며 심호흡을 한다.


군인으로 만났던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거리 위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본다.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상대방의 눈을 마음 속에 담고 새긴다.


눈만 마주쳤는데 가슴이 두근거려 온다. 심장의 고동이 세계에 노래를 입힌다.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한 가운데 너와 나.


세상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크리스는 발레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젠 알 수 있다. 그 역시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좀 더 같이 있을 수는 없을까.


이대로 시간을 아침으로 다시 돌릴 수는 없을까.


그 기회가 지금 눈 앞에 와있다면,


눈 앞의 상대 역시 그 기회를 잡길 원한다면,




"오늘....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요."




망설이고 싶지 않아서.


아이스크림을 단번에 잡아채듯, 먼저 기회를 잡아챈다.





"그냥 친구 말고, 남자 친구로."


"?!?"



기적을 고한 그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형태의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진다.


이 감정은 뭘까. 기쁨? 희열? 긴장?


시간 감각조차 멍해지게 만드는 이 고양감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졌던 메마른 갈증이 삽시간에 해소된다.



"저도 좋아해요. 정말로."



전하는 말을 전부 마음 속에 새기며 크리스는 두 손을 들었다.


떨어져 있던 거리는 한 발짝.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항상 벌려왔던 타인과의 이 거리를 포기하고, 내딛는다.


정말 소중한 것을 받아들듯이


사랑스런 애인을 위로하듯이 팔을 두르고


그대로 팔에 힘을 주어 천천히 얼굴을 당겨온다.







쪽.







구름이 내려앉는 것 같은 부드러움.


지극히도 사랑스러운 그 감촉이 입술에, 마음에, 축복을 아로새긴다.


달콤한 느낌이 입술에 남긴 잔향이 계속 맴돌았다.


닿은 시간은 단 3초.


단 3초일 뿐인데도. 이 얼마나 행복한 3초인가.


뇌가 기쁨으로 떨린다.


밤의 야경은 은하수가 되어 흐르고, 흐르는 음악은 축가가 되어 울려퍼진다.


발레리는 너무 행복해서 어떻게 되버릴 것만 같았다.


백지로 변할 뻔했던 세계에는 다시 선명한 색채가 돌아온다.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성공이었다.


흐릿하게 녹아내린 눈. 가장 순수하고 찬란한 미소. 남아있는 이성을 전부 모아, 크리스는 방긋 웃었다.


얼굴에 나타난 그 미소를 발레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패자니까, 거절하기 없기에요?"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말하면서 발레리와 크리스는 서로 손을 겹치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간다.


이 손에 감도는 온도를, 이 감촉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발레리에 얼굴에도 크리스처럼 행복에 겨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그가 살면서 지어본 가장 멍청해보이는 미소였으며,


동시에 가장 행복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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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너네들도 행복해라.


나도 쓰면서 너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