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counterside/75194893
엘라는 숨을 죽이고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뛰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왜 숨었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곳은 그녀의 집이었고, 그녀는 아무것도 잘 못한 것이 없었는데.
심호흡도 해보고, 눈을 감아봐도 큐리안이 비비안에게 입을 맞추던 장면이 어른거렸다.
이 와중에 비비안의 이마에 질투하고 있다는게 우습기 짝이없다.
과연 잠들어 있던게 그녀였더라도 큐리안은 입을 맞춰 왔을까.
엘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찰나였지만 큐리안이 비비안을 바라보며 지었던 표정은 엘라에겐 단 1초도 보여준 적 없던 표정이었으니까.
흘러내린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려 봐도 엘라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그늘은 도통 걷혀지지 않았다.
겨우 표정관리에 성공한 엘라가 거실로 나왔을 때 큐리안은 이미 식탁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 부관. 좋은 밤이군.”
머리에 두 손가락을 붙였다 떼는 과장된 손인사와 함께 능글맞게 미소짓는 큐리안.
잠든 비비안에게 입맞춘 것이 바로 조금 전 일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행동하는 저 태연자약함은 어디서 오는걸까.
“..어떻게 들어왔어?”
“문이 열려있기에, 내가 올 시간에 맞춰 열어둔 줄 알았지 뭔가.“
아무래도 비비안에게 와인을 건네받느라 문단속을 잊었던것 같다.
“아, 그러셔. 여자 냄새에 문을 딴줄알고 드디어 선을 넘었나 했지.”
“하하하! 날 뭘로 보는 건가, 부관.”
호탕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큐리안의 뻔뻔함에 엘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쉽군. 이런 잔치가 벌어진 줄 알았더라면 좀 서두르는건데.”
“저런, 유감스럽게도 걸즈 파티라서. 당신 자리 없었어.”
모든 일엔 걸맞는 타이밍이 있듯이, 현장을 덮치지 못해 큐리안을 추궁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엘라는 굳이 그 사실을 들추기보단 입을 다무는 것을택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해명, 즉 비비안을 향한 사랑 고백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엘라는 비비안이 마음을 털어놓은 친구이면서도, 같은 사람을 맘에 담아 두고 있는 연적이기도 했다.
비비안이 적극적으로 큐리안에게 대쉬하는걸 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하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도와주고 싶지도 않은, 복잡미묘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누구의 남자도 아닌 이 상태 그대로 남아주면 좋겠다는게 엘라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엘라는 탁자위에 늘어진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이마로 시선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한숨을 작게 내쉰 후 비비안을 들쳐 업으려던 엘라는 큐리안에게 제지당해 멈춰서고 말았다.
”무리하지말게. 내가 하지.“
엘라를 돕고 싶은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제안인지, 아님 비비안과 접촉하고 싶은 시꺼먼 흑심에서 비롯된 제안인지,
“배려는 고맙지만, 내 침실에 눕힐거거든. 남자에게 숙녀의 침실을 공개하는 건 조금 거부감이 들어서.“
“흠, 침실에 막 벗어둔 속옷이 널려있거나 할 수도 있으니. 알겠네. 얼음공주 부관답지 않은 면모로군. 몹시 흥미로워.“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내 침실은 언제나 깨끗하게 정리 되어있으니까, 이상한 상상의 나래 펼치지말아줬음 좋겠네.“
작은 덩치에서 예상할 수 있듯 비비안은 깃털처럼 가볍고, 향기로웠다.
엘라는 역시 큐리안에게 맡기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침대에 곱게 뉘이고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려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비비안은 또래 친구라기보단 동생, 혹은 딸처럼 느껴지는것 같았다.
지금 가슴에 찡하고 울리는게 모성애라는 녀석인걸까.
’..결혼도 한 적 없는 숫처녀가, 딸은 무슨.‘
침실의 불을 끄고 나온 엘라는 연고를 바르기 위해서 제복을 벗고 있는 큐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하체는 조금 부실해보일지 몰라도, 그의 상체만큼은 여자 대부분이 좋아할만한 마른 근육이 알차게 박힌 밸런스 좋은 몸을 자랑했고, 엘라는 처음봤을때와 같이 또 다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게되었다.
“뭐지, 부관? 내 알몸만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건 치사하지 않나?“
“뭐 아,알몸? 그게 어떻게 알..“
“아무리 나라도 조금 부끄럽단 말이지. 혼자만 벗고 있는건.“
뭐 어쩌라는 건지, 그녀도 같이 상의를 벗어주기라도 바라는 걸까.
”아주 매를 벌지? 이건 의사의 치료행위 중 일환일 뿐이거든..?“
”아, 자네 눈에서 치료광선이 나오는 줄은 몰랐네. 진작 말을 하지.”
엘라는 큐리안의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녀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그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그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어서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그의 상처는 벌써 꽤나 많이 아물어 있었다.
큐리안의 몸이 성유물과 융화된 덕분인지, 회복력이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덕분인듯 해서, 엘라는 그 회복력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조각같은 큐리안의 맨몸을 만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됐어. 내일이면 다 아물겠네.“
”역시 자네는 유능한 의사야. 내가 걸렸다는 병의 이름은 알았나?“
엘라는 은근슬쩍 큐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애초부터 성격상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다.
“유능하긴, 그랬으면 당신 병명도 금방 알아챘겠지.“
“하하하! 혹시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큐리안이 너무나도 큰 소리로 웃는 바람에,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비비안이 깰까봐 걱정한 엘라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오진이었다던가.”
엘라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착각할 정도로, 마음에 돌덩이가 날아와 얹힌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늘 하던대로 한 농담이었을까, 아니면 넌지시 떠보는 말이었을까.
“물론 그럴리가 없겠지, 자네만큼 내가 믿는 전우도 없으니까.”
아프다.
불편함을 넘어서 가슴에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진다.
엘라는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상대로 있지도 않은 병을 핑계로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냈다는걸 한심하다 여기면서도, 그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자네처럼 책임감있는 사람이 또 없지. 특히 그 피터녀석은 최근에 뺀질거리는게 도를 넘었어.. 음?“
혼잣말을 지껄이던 큐리안이 갑자기 엘라에게 불쑥 다가왔다.
”헉?! 뭐,뭔데?“
”부관, 얼굴이 붉은데. 요즘 좀 무리하고 있는거 아닌가?“
다정함이 묻어나는 맑은 청록색 눈동자.
엘라는 그의 앞에선 자신도 영락없이 여자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그를 마주볼수 없을 만큼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 더 붉어지는군. 일과도 소화하고 내 병세까지 살피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것 아닌가 걱정되는데.“
”술, 술 마셔서 그런거야. 에일을 좀 많이 마셨거든, 교관님 완전히 곯아떨어진것 봤지?“
당황한 엘라의 말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길어졌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요즘 부관, 자주 술을 마시는것 같은데. 뭔가 고민이라도 있나? 언제든지 상담해줄수 있으니 술 들고 찾아와도 좋아. 비싸고맛있는 술일수록 상담의 질도 올라가는것 명심하고.“
”내가 누구때문에 술고래가 됐는지, 굳이 말을 해야 아는 사람한테 상담받아봤자 뭐가 달라질것 같진 않은데.“
”하하,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싱긋웃는 큐리안에게 전염이라도 된건지, 엘라도 피식 웃음지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희망이라도 품었을 것을.
언젠가 그의 아내가 되어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의 옷을 받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차려주고, 목욕물을 따뜻하게 데우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조용하고 안락한 삶.
허나 비비안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날, 그 마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오직 엘라 혼자만이 알고있다는 사실은 상상이상으로 잔혹하게 그녀를 고통속에 옭아맸다.
게다가 비비안은 큐리안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이될것같았다.
마치 이미 가족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 엘라가 할 수 있는거라곤 천천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만큼 조금씩 마음을 조각내어 흩뿌리고, 큐리안과 비비안의 좋은 동료로 남는것 뿐일것이다.
차라리 비비안과 큐리안이 잘 될 수 있도록 징검다리라도 놔 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 아닐까.
엘라는 저릿저릿한 가슴을 부여잡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엘라의 가슴은, 심장은 여전히 큐리안이 필요하다고 소리지르고 있다.
아무래도 혼자 너무 오랜시간을, 그리고 너무 깊게 그를 좋아해버린 모양이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 엘라는 갈라진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저기, 큐리안..”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일, 휴가쓰게. 부관.”
“뭐?”
그녀가 어떤 각오로 얼마나 힘들게 말을 꺼냈는지 알 바 아니라는 듯, 큐리안이 명쾌하게 말했다.
“지금 자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이야. 여전히 내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는것도 너무 여유없이 자신을 몰아세워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일수도있으니, 내일 휴가쓰고 쉬지.“
엘라는 벙찐 표정으로 큐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휴가내서 쉴테니 우리, 마을은 교관에게 맡기고 같이 쉬다 오는건 어떤가?”
“하아, 당신 미쳤어? 어느 부하가 상사랑 같이 휴가나가는걸 ‘쉰다‘ 라고 생각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엘라는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번 외출은 그에 대한 미련을 전부 털어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함께 충실하게 보내고 깔끔하게 포기하리라.
어느새 얼음공주 엘라의 머릿속은 내일 있을 큐리안과의 ’유사 데이트‘ 라는 봄으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