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counterside/76172862



 갈아 입는게 오래걸린다 했더니 겨우 제복인가.”

불만 있어?”


엘라는  사람을 웃으며 배웅하는 비비안에게 살짝 목례하고나서 큐리안에게 불끈  주먹을 보여주며 조용히 윽박질렀다


굳이 제복을 골라 입고 나온 것은 그저 엘라의 패션센스가 꽝이기 때문이거나 조이는 옷을 선호하는 그녀의 취향탓은 아니었다


그녀를 믿어주고 큐리안과의 휴가를 승인한 비비안에 대한 의리의 표명 휴가는 일과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의 코디였던 것이다


나는 말이지쉬는 날은 아예 풀어져서 충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네  오프라고 들어봤나?“

그럼 엊그제 일과시간에 몰래 창고에 틀어박혀서 낮잠 때리던건  모드에서 벌어진 일이야놀랍기 그지없네.”

,크흠그건 아마 피터가 사라지는 바람에 찾으려다 수마에 당한것이었지.“

어련하시겠습니까.“


마음이 간질거린다.

그냥 단둘이 걸으면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뿐인데도.

시내로 향하는 길이 끊이지 않고 무한히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걸음의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엘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큐리안도 보폭을 줄이고 엘라와 발을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일단 시내에 도착하면 쇼핑부터 하자고.“

무슨 쇼핑?“


뜬금없는 큐리안의 제안에 엘라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저 큐리안의 ‘같이 시내가자’ 라는 제안에 들떠 따라나서버리긴 했지만사실 도착하고나서  해야 할지 정하지도 않은 그녀였다.


쉬는 날에 마땅히 입을  조차 없는 부관의  쇼핑.”

 소리야 있거든?”

하하하농담일세그냥 사주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너무 불쾌해하진 말라고.“


그냥 사주고 싶다니.

 남자는 정말로 그녀가 입을  조차 없는  아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선뜻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 남자에겐 당연한 것일까.

엘라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미녀와 단둘이 외출하는 것은 오랜만이라이거 들뜨게 되는군.”


미녀라니.

큐리안의 덧붙이는 말을 듣고  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자꾸만 증폭되는 의혹과 혼란 속에서 도착한 목적지는 한적한 시골 마을  자체인 셔우드 외성과 달리 시끄럽고 번잡한 도심지였다.

이따금씩 엘라 혼자 의료용품등을 사러 오곤 했지만그럴때마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최소한의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움직이던 평소엔 눈에 띄지 않았던 술집과 여관도박장과 유흥업소들을 마주한 엘라는  곳이 이리 퇴폐적인 곳이었나 하고 경악했다


일단 쇼핑부터 할까제복은 너무 눈에 띄니 말일세.”

, 평소에 올때에도 제복차림이었는데.”

평소에도 눈에 띄었겠군 참에 어여쁜 외출복 하나 장만하지.”


큐리안은 거침없이 엘라를 리드했다


예쁘게 생겼으면서 제복만 입는건 얼굴이 아깝잖나제복차림의 여자에게 남자가 반하는 것도 입던 여자가 입어야  이색적인 매력에 빠지는 법이거든.”


큐리안에게 이끌려 들어온 곳은 여성복 매장이었다

사방에 진열된 하늘하늘한 옷들을 둘러보던 엘라는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피스나짧은 치마나.

그녀의 취향과는 몇백광년 떨어져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내게 이런건  어울..“

이거 어떤가자네에게 딱인것 같은데.“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빼던 엘라를 향해  큐리안이 들어올린 옷은 방금  그녀가 헛구역질을   했던 파스텔톤 원피스였다


구려.“

그럴수가!“


상처받았다는 듯이큐리안은 낙담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금새 기운을 차리고는 다른 옷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왠지 신나보이는 그를 바라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하며 엘라는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어보기로 했다


치마는 입기 싫으니까골라줄거면 바지로 골라줬으면 좋겠는데.”

부관 다리가 얼마나 예쁜데그런건 아쉽지 않나?”

“.. 다리는 언제 쳐다보고 있었던거야?”

“..주인장 바지 다른 색상은 없습니까?”


너무나도 티나게 화제를 돌린 큐리안을 응징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친 엘라의 손에 쥐어진 것은 검은색 짧은 반바지였다.

결국 그녀의 다리 노출을 포기할수 없었던 큐리안의 절충안이었다.


갈아입고  보겠나?”


싱긋 웃는 큐리안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대충 옷을 골라 사고난 후에야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있겠다고 판단한 엘라는 한숨을 내쉬곤 탈의실로 들어갔다


노르드나빅  제복 바지를 벗고큐리안이 골라준 검은 반바지를 입은 엘라는 생각보다 좋은 피팅감과 한치의 오차없는 사이즈선택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정도면입을만   같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큐리안이 골라준 옷이다

마지막 전리품정도로 생각하고 간직할 가치가 있을 만한 옷이었다


한참을 거울 앞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엘라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탈의실 커튼을 걷어내 몸을 드러냈다


오오역시.. 예쁘구만부관.”


몇년만에 맨다리를 드러낸 것보다 큐리안의 칭찬탓에 얼굴을 붉힌

엘라는 바지와 어울리는 상의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마네킹이 입은 바니걸 슈트였다


얼마 비비안과의 걸즈토크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복을 입던 여자가 뜻밖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어필하는 .

그리고  가게에서 이것보다 화려한 옷차림은 없을 것이었다


큐리안은 엘라에게 어울릴 만한 상의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보였고

엘라는 조용히 점원을 호출했다


저기이건 얼마입니까?“

손님과감하시군요남자친구분께 이벤트라도 하시나요?“


남자친구’ 라고 말하며 큐리안을 흘끗거리는 점원을 마주보는게  이렇게도 힘든지

엘라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큐리안 몰래 바니걸 세트를 샀다


하지만 막상 사고나니 자신에게 이런 옷을 입고 큐리안에게 어필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탈의실에는 큐리안이 골라온 옷만을 가지고 들어가 갈아입고 나올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염치의 문제였다

차라리 비비안에게 나도  남자를 좋아한다 말하고경쟁구도라도 만들었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텐데


역시 눈은 정확해너무나도  어울려부관.“


큐리안이 골라준 옷으로 전신을 꾸미고 나온 엘라에게 박수갈채를 보낸 큐리안은 엘라가 말릴 새도 없이 옷들을 전부 결제해 버렸다


내가 입을 옷인데 내가 살게!“

괜찮아내가 사주고 싶었으니까대신 오늘은 그렇게 입는걸세.”


엘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입지도 못하고 환불도 하지 못한 바니걸 슈트와 제복을 함께 담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인물이 훨씬 사는군이제 어디 갈텐가?“

잠시 의료용품을  사야겠어.“


낭만 없는 엘라의 다음 행선지 제안에 큐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크흠아까 내가 뭐랬는가  오프...“

오래  걸릴거야당신한테  약도  사야하고.“


큐리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엘라의 뒤를 따랐다

엘라는 사실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사복 차림의 큐리안과 그가 선물해준 옷을 입은 자신.


어떻게 생각해도 기분이  뜨는 탓에 업무에 관련된 뭔가를 해야 들뜬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있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주사바늘과 앰플을 사고소독용 악콜과 붕대로  각종 약까지 정신없이 구매하다보니 마음은 가라앉힐  있었지만 동행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엘라는 문득 큐리안이 떠올라 황급히 고갤 돌렸고

 미소 지어 보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리 주게내가 들지.”

 카운터야 정도쯤은 깃털보다 가벼워.”

자네의 완력은 아마 내가 제일  알겠지가끔  쇠뇌를 쓰는지 모르겠다니까단언하지만 자네의 펀치는 분명 침식체에게도 통할걸세.”

그거 칭찬이야기분  별론데.”

어허 침식체 병기를 일반인에게 휘두르지 말아주겠어?“


방심하고 있던  큐리안은 엘라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갔다.


교관님 명대로 오늘은 부관을 수행해야 하니까내게 맡기라고.”

“..고맙네.”

밥이나 먹으러 가지슬슬 출출하던 참이라.“


아무래도 옷을 사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들인 모양이었다.

어느새 끼니 시간도 훌쩍 지나가 엘라와 큐리안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섰다


아아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휴가는 너무 짧단 말이지.“

”1 365 휴가처럼 지내는 사람이  말이야?“

누가 들으면 진짠줄 알겠군부관나는 탄력적인 근무를 하고 있을 뿐이야그래서 효율도 우수하지.“


퍽이나.

엘라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서로의 손을 잡은 연인들이 술집이나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당황해서 물을 들이켰다


   거라도 봤나?“

아니아무것도 아니야음식 나왔다.”


타이밍 좋게 서빙된 음식은좋게 말해서 평범했다.

 돈이면 재료면 훨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는 엘라에겐  만족스럽지 않아야  식사임에도 그녀가 나름의 즐거움을 느끼고있는 것은순수하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고상하게 고기를 썰고 있는 큐리안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분명 마지막으로미련을 떨쳐내기 위한 휴가였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쇼핑을 하고식사를 하고 있으니 지금껏 해온 모든 일들이 오늘 하루로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하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다시 예쁜 옷을 골라달라고 하고 싶고쇼핑한 옷가지를 나눠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고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오늘 못해본  잡고 술집에 들어가는 일도 하고 싶어져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욕망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만다.





내가 두번째라도 좋아.




다음편 https://arca.live/b/counterside/76297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