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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에 앉아 ’지나치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피터와 비비안이 큐리안을 발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비대장언제 왔어?”

“..방금  도착했습니다 없는 동안 뭔가 문제는 없었습니까?”


얼음장처럼 차가운 큐리안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것은 엘라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비안도피터도 자연스럽게 차렷자세를 하게 만든 것을 보면.

엘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따스했던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며 몰래 슬그머니 큐리안의 허리춤을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엘라 부대장도  쉬다 왔나생각보다 일찍 왔네?”

중간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비비안의 얼굴에선 못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마냥 불안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고피터의 표정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조용히 분노하고 있는 큐리안이었다.


좋아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서 빼앗긴 것에 대한 격정일까?

아니확실친 않지만 그런 감정과는 왠지 조금 거리가 있어보였다.


“..피터순찰과 경계 근무는 모두 마치고 노닥거리고 있는거겠지?”


아마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렇게  가라앉은 큐리안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을 터였다

평소에 눈치가 없고까불대기 좋아하는 피터도 심상찮은 공기를 피부로 직접느낀듯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밋을  채로 쭈뼛거리고 있는  젊은 남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큐리안의 위압감은 평소 허당같던 그의 모습과 괴리감이 엄청났다.


수비대장내가 잠깐 쉬자고 꼬드긴 것이다피터는 잘못 없어..!”

그렇습니까.”


큐리안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목소리를  비비안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덕분에 겁먹은 비비안의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마치 자식에게 나중에 따로 혼내겠으니 일단 조용히 하고 있으라는 아버지같은 모습에피터는 사신이라도 마주한것처럼 비틀댔다


”...피곤하니 이만 들어가 쉬겠습니다교관님도 일찍 들어가시죠.“


큐리안의 말은 명령에 가까웠지만비비안은  정도로 끝난것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빛보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건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큐리안은 허밋의 말머리를 돌려 마을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듯 싸해진 분위기에 엘라는 감히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그의 허리를 다시금 붙잡을 수도 없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허밋의 등허리를 움켜쥐느라 곤욕을 치렀다


.. 미안하군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어.“


걷기 시작하고  5분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머리가 식은 큐리안은 평소와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엘라는 무어라 말할  없었다.

평소답지 않던 그의 모습에 겁먹은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애정행각을 벌이던 모습을 목격했던 경험이 그녀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물론 화가 났지만그래도 빼앗긴 상대가 그녀보다 귀엽고 예쁜 비비안이었기에 쉽게 체념할  있었다.

하지만 피터에게 비비안을 뺏긴 큐리안이 느낄 분노는 감히 상상을   없어서 엘라는 침묵을 지켰다


 순간엘라의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지나갔다

비비안이 좋아하고 있던 상대는 큐리안이 아니라 피터였던걸까


눈치가 없고강골처럼 보이진 않으며허당같으면서도 자신이 맡은 일엔 책임감있는 모습을 보이는 남자..

엘라는 당연히 큐리안이라고 넘겨 짚었지만아슬아슬하게 피터도 모든 항목을 충족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금까지 비비안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큐리안을 포기하려 했던 것과당연히 성립될 커플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어리석게느껴졌다


물론 큐리안을 놔두고  하필 피터를하는 생각이 쉽게 사라지진 않았지만 사람의 취향은 다양한 거니까,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아예 불가능한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희망의 빛이 가늘게라도 그녀에게 비추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쌍방향인 줄만 알았던 비비안과 큐리안의 러브시그널이 단방향이었다는  알게 되었으니큐리안을 향한 자신의 단방향 러브시그널에도 일말의가능성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피터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를 개뼉다구 같은 녀석이...”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긴당신이 구했잖아.”

그렇지내가 호랑이 새끼아니개뼉다구 새끼를 키웠군.”

분명 오늘 오전엔 믿을만한 부하라고 했던  같은데.”


취소야.

라고 중얼거리는 큐리안의 어깨는 아무리 봐도 사랑을 뺏긴 남자의 그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싱숭생숭한그러면서도 불만족스러운 듯한 느낌.


있잖아당신 힘들어 보이는데.”

부정하기 힘들군설마 휴가갔다오니 이런 깜짝 선물.. 선물이라고 칭하기도 끔찍하군어쨌든 그런게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우리집에서 상담받고 갈래?”

“..?”

아까 말했잖아부관도 대장 상담해줄  있는거 아닌가?”


큐리안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다시 평소처럼 크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는게 은근히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거 좋지두어시간쯤 후에 갈테니간단한 요리나  준비해줬으면 좋겠군부관이 자랑하는  요리솜씨  봐야겠어.”

 들이고 나서 맨날 해달라고 하지나 .”


큐리안은 엘라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 주고 멀어져갔다.

이제 바빠진건 엘라쪽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몸단장 후에 요리를 했다.

갖고 있던 식재료만으로도 아까 시내에서 먹었던 요리보다 월등한 맛을 내는 요리들이 차례차례 만들어졌다


음식들을 맛있게 먹던 큐리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엘라는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요리와  청소를 하느라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고어느덧 큐리안이 찾아 오기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옷만 갈아입으면..


바니걸 슈트.

생각해보니 아까 샀던  중에 바니걸이 있었다





이건 .. 심한가?“


바니걸 슈트 풀세트를 입고서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던 엘라는 조금 정도가 지나친 것은 아닐지 고민에 빠졌다


타이트한 의상을 좋아하는건 맞지만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슴골과 어깨존재 의의를 모르겠는 커프스와 넥카라가 오히려 그녀를  창피하게 만들고 있었고 검은색 스타킹으로 다리를 전부 감싸긴 했어도 뒤에서 보면 복실복실한 토끼 꼬리와  가리지 못한 풍만한 엉덩이가 탐스럽게 드러나는 모양새가 그리 자랑스럽진 않았다.


뭐가 그리 신나서 토끼  머리띠까지 쓴건지자신이 한심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비비안이 좋아하는 남자가 큐리안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도 신났던 걸까지나치게 들떠버린 자신이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치는  같아서 엘라는거북함마저 느꼈다


아무래도 벗어야 ...”

문이 열려있군우리 부관님 센스하....”


하필 이런 시간에그리고  다시 문단속에 실패한 덕분에 큐리안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고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한마리 토끼와 마주치고말았다


고는센스가 아니라.. 섹시였군...”

 다물어...“

대장이 힘들다고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해주다니감동적이야.”


놀리는건지진담인지는   없었지만 큐리안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보여서 엘라는 어깨위에 제복 케이프만을 걸치고 직접만든 요리를 식탁에 날랐다


오오이건 확실히..! 아까 식당이 불만족스러울만도 했겠어.”

미안하지만 아까 고기는  사서있던 재료로만 만든거니까 감안하고 먹어줬으면 좋겠어.”

음식은 눈으로 한번코로 한번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으로 먹는다지 않나이미 코로  식당 메뉴를 아득히 넘어섰으니 걱정마.“


엘라는 흐뭇하게 턱을 괴고 큐리안이 음식들을 해치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가슴이 모이는 자세가 되자  폭력적인 유방의 형태에 큐리안의 시선이 쏠리는가 싶더니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부관아까 말했듯이 자네는 자네 몸매의 파괴력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어.“

미안.“


엘라는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다


 내오는  잊었네.“

 쪽이 미안하단 거였나?“


엘라는 에일 대신 며칠전 비비안이 선물로 가져온 와인을 가져왔다.


이건...“

와인우리 마을에선 턱없이 귀한거지.“

옛날 생각나는군내가 제일 좋아하던 와인이야.“


엘라는 조심스럽게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돌려서 땄다.

향긋하고 진한 포도향이 금새 부엌을 가득 채웠다


당신 총사대의 엘리트였지.“


큐리안은 눈을 감고 와인의 향을 머금었다.

이슬이 맺힐 정도로 길다란 속눈썹날카로운 턱선음영이  정도로 오똑한 콧날에 엘라는 빠져들고 있었다


부관.“

말해.“

아무리 그래도 피터자식에게 교관님은  아깝지 않나?“


아까부터 느꼈던 묘한 위화감.

큐리안이 비비안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던 그녀였지만그의 애정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비비안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그저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사랑.

반려를 찾는 남자보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걸맞는 사랑.


하긴피터보다는 당신이 교관님께 어울리지.”


큐리안은 떠보는 듯한 엘라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피식 웃었다


아니 피터녀석만 아니면 와트도.”

그러면 마을에 젊은 남자가  남는데?“

 마을은 글러먹었구만미안한데 와인 한잔  주겠나?“

맙소사당신 대체 몇살인거야?”


큐리안은 잠시 벙찐듯 하더니 킬킬 웃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부관누누이 말했잖나이래봬도 나이가 많다고.“

이제야  역겨운 파스텔톤 드레스를 추천한 이유를 알겠네.“

그럴 수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교관님께도 그거 몰래 선물할 생각하지마걸레로 쓰이는거 보고 싶지 않다면.“


엘라는 자신의 잔에 찰랑이는 진한 보랏빛 와인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처음부터 헛다리 짚고 있었네.”

무슨 소린가부관.“

당신도 드러나지 않는 사랑을 하느라 맘고생이 심하겠어.”


알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엘라는 큐리안과 자신의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기억은 오래될수록 미화되기 마련이다

엘라의 상대는 처음부터 날이갈수록 미화될 큐리안의  아내였다

물론 엘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기억은 미화될지라도기댈  없는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질테니까.

하지만 엘라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확고했다


”..잠깐당신 ’‘?“

”미리 말해두는데,  포기 안할거야.“


드러나지 않는 사랑을 하던 엘라는 자신의 마음을 조금 드러내며 와인을 홀짝였다

밤은 깊어가고큐리안을 향한 엘라의 마음은 더욱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