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가 알렉스와 종신계약을 맺은지도 어느덧 1주일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관리자도 가끔씩은 연봉협상과 같은 업무 상의 이유를 핑계 삼아 본사에 얼굴을 몇 번 비췄지만, 얄궂게도 종신계약 이후에는 눈 코 뜰새없이 바쁘게 일들이 몰아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지금 관리자는 테라브레인이 비치되어 있는 공간을 이용하여 입맛대로 꾸민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태스크 포스 소대의 운영을 비롯해 회사의 자잘한 업무들은 부사장인 이수연과 머신갑의 훌륭한 성능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에게 들이닥친 것은 회사의 운영 같은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큰 차원의 일과 맞닥뜨린다고 했던가. 구 관리국의 최고 명령권자(였던 것)이자 세계를 말 한마디로 움직이는 존재였던 관리자는 그 말의 무게를 오늘도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이면세계가 현실세계를 침식하지 못하도록 세계 각지의 정보원들로부터 이면세계에 대한 보고를 받고 적절한 조치를 재빠르게 취해주는 것은 기본이요, 필요한 경우 세계 어디든 문제가 있는 곳으로 즉시 날아가서 해결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세계 침식률과, 그걸 이용해서 일을 꾸미려는 조직들도 염두에 넣고 행동했다. 


자신의 행동이 갖는 비중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일은 정비례한다니, 인과율이라는 것은 참으로 까다로운 개념이기에 관리자는 이 문제들을 매우 세심하게 대했다. 지금의 세계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루프 가운데 어렵게 손에 넣은 기회다. 절대 허투루 임할 수는 없다.


"네. 말씀드린 것 외에 특이한 징후는 없었습니다."


"...고마워요. 계속 조사해주세요. 유사시에는,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체코에 있는 정보원에게 통화로 지시를 내리고, 관리자는 세계지도가 펼쳐진 대형 패널로부터 몸을 돌려 일어났다. 기지개를 피자 찌뿌둥한 몸이 펴지면서 뻐근함과 시원함이 찾아왔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개인의 힘에 입각하여 세계를 조정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관리국이 버젓이 살아있을 적보다 훨씬 더한 고생이었다. 차라리 관리국이 건강하게 살아남았으면, 관리국 고위 관리자 중에서 자신 외에 생존자가 또 있었다면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으리라.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많은 루프를 거쳐오며 시공간 수정에 그간의 기억들을 백업해놨기 때문에 관리자의 머릿속에는 세계가 움직이는 수백 수천 가지의 양상이 게임 공략집처럼 남아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도 어느 세계든 예정을 빗겨나가는 요소는 존재했으므로, 관리자는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벌써 며칠째 이런 식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슬슬 피가 말렸다. 


류드밀라와 메이즈 전대를 구해내고 난지 시간이 꽤 흘렀다지만, 클리파 차원의 봉인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클리파의 힘은 관리자의 예상보다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 


그림자 전당은 그 중 하나였고, 침식체들이 침공해오는 빈도도 늘어 각 태스크포스 컴퍼니들은 침식체 박멸에 열을 올렸다. 세계를 지켜내는 사람들의 하루는 평소보다 1.5배는 바쁘게 흘러갔다.


관리자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하품을 하며 생각했다. 이건 몇 번을 생각해봐도 사람이 해먹을 짓이 못된다. 


다수의 루프를 거치며 매번 실감하는 점이지만, 혼자서 세상의 흐름을 조율하는건 극히 피곤한 일이었다. 루프를 통해 정신이 단련되어간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 단련보다는 무뎌진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됐다... 이런 안좋은 생각은 안하느니만 못하니까."


관리자는 손짓으로 패널을 꺼버리고 지친 한숨을 쉬었다. 유일한 광원이었던 패널이 꺼지자 방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눈을 감자 관리자 자신의 의식도 어둠에 녹아들어 생각을 멈추고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 잘 때 말고는 한 시도 쉬지 않았던 관리자의 뇌는 지금 처음으로 침묵 속에서 평화를 누렸다.


하지만 인간이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존재던가. 나는 생각하므로 고로 존재한다고 데카르트는 말했다. 금새 관리자의 의식 위로 새로운 것들이 떠올랐다. 1주일간의 강행군을 하다보니 코핀 컴퍼니의 사원들이 그리워졌다. 


투덜대기 일쑤인 이수연 부사장, 각자 캐릭터가 분명한 펜릴 소대의 3인방, 발랄함이 매력인 알트 소대원들, 관리부의 김하나... 생각을 멈추려고 일부러 가만히 있던 건데, 왜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건지.


그 중에도 유독 강하게 관리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색의 눈동자, 그와 대비되는 깨끗한 은빛의 머리카락, 고혹적이면서 자상한 모순의 아름다움을 가진 눈매. 얼마 전에 종신계약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사람. 메이즈 전대의 부전대장, 알렉스. 


뛰어난 상상력 덕분에 알렉스의 얼굴을 생각하기만 해도 관리자에게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목소리는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창고를 정리하면서 했던 그녀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비롯해 사장실에서 나눴던 이야기의 내용들이 떠올랐다. 함께 마셨던 커피의 맛과, 그녀가 은은하게 짓던 웃음이 뒤따랐다. 회사의 사장이자 관리국 제1 관리자라는 직분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알렉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무엇 하나 잊혀지지 않고 선명하게 관리자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었다. 


왜 알렉스인가? 이유는 관리자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관리자는 특별히 그녀를 대할 때 연정을 품은 것도 아니었고, 그녀 쪽에서 특별한 신호를 보낸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알렉스는 메이즈 전대원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에게 사려깊고 자애롭게 대해줬기 때문에 행동에서 특정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유도 확실치 않은데 가장 강하게 떠오른 사람이 알렉스라니, 관리자는 과로 때문에 자신이 많이 피곤한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1주일 전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요즘 옥상에 화단을 가꾸고 있어. 혼자 있긴 쓸쓸하니까, 종종 놀러와. 기다리고 있을게.'


화단을 가꾸고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식물들이 있을까, 거기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꾸만 알렉스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관리자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생각들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지만 이상하게 알렉스의 목소리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 특유의 잔잔한 톤이 마음을 간질였다.


결심한 듯 감았던 눈을 뜨고 관리자는 닫아버렸던 패널을 손짓하여 다시 켰다. PM 9:45.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다. 


7시나 8시 정도면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할 겸 화단을 둘러볼 확률도 있을 테지만, 지금 회사 옥상에 올라가더라도 알렉스가 거기 있으리란 사실은 보장할 수 없다. 화단을 가꾼다면 밤에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햇살이 화창한 아침이나 낮에 주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은 만날 수 없는 걸까. 기껏 떠올랐는데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냐. 밑져야 본전이지 뭐."


어차피 그녀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바람을 쐬며 휴식할 목적으로 방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관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한결 홀가분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녀 또한 지금의 자신처럼 바람을 쐬러 잠시 옥상에 올라와 있을지,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이 지친 마음을 가진 가련한 양에게 자그마한 기적을 내려주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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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는 저런 말투가 아니지만 나이 먹은 관리자가 싫은 것도 있고 해서 연령을 살짝 낮췄음. 여러분 스스로를 이입해서 보길 바람.


알렉스눈나 볼때마다 자꾸 소재가 떠오르는데 나는 글을 못쓰잖아? 정말 가슴이 타들어간다... 일단 대충 쓰인 대로 던지고, 다음 화 마저 구상하러 감. 달달하게 써보도록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