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갤드


전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8433881?mode=best&p=1



"밤새 얼룩진 베개 맡에 앉아서 


가만히 너의 머릴 쓸어주고 싶어

 

내게만 말해봐


마음 속 가득한 걱정들"

 

- 걱정인형, ‘러블리즈’



"-그래서 루미가 그 말을 하는 바람에 코멘트가 엄청나게 많이 달렸어요. 그 중에는 엄마가 준비한 식사라던지, 엄선되고 준비된 식단이라던지 그런 코멘트도 보였고요. 하도 도배가 심해서 미야가 제지하고 나서야 겨우 멈췄어요." 


죽을 다 먹은 뒤 가은은 관리자와의 대화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임했다. 대화 주제는 별 것 없었다. 1주일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일상의 나눔일 뿐이었다.


항상 차갑고 도도한 매력만을 보여줘서 얼음공주라고 불리는 가은이었지만 관리자와 함께 있을때만큼은 달랐다. 


오랜 친구를 본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아이가 부모님께 말하는 것처럼, 막혀있던 말문이 우수수 터져나왔다.


물론 가은은 성격 상 큰 관심이 없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러나 지금 가은이 하는 얘기는 -그녀는 모르겠지만- 대중적인 유머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관리자는 웃겨서 죽을 것 같은 걸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근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선생님? 엄마가 준비한 식사...? 그게 웃긴가?"


"아... 그건 말이에요. 단합력 테스트? 그런 느낌이에요. 그 왜, 파도타기 같은거 있잖아요?"


"그런가요?"


"네. 가은 양은 잘 모를수도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아는 언어나 유머를 갖고 끝말잇기를 하듯이 이어가며 즐기는 문화가 있어요. 특히 인터넷에서요."


가은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이해하기 쉬우라는 뜻에서 일부러 말을 포장한 것이지만. 세상에는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그럼 가은 양은 방송 말고 제일 하고싶은게 뭐에요?"


"전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거라면 뭐든 좋아요."


"에이. 너무 범위가 넓잖아요. 전 가은 양이 흥미롭게 느끼는게 뭐가 있을지 궁금해요."


"음.... 딱히 없는데요. 애초에 방송도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 시작한 거고..."


그 말대로, 가은은 관리자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아이였다. 그랬던 것을 최이나가 유명해지면 찾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어르고 달래서 설득시켰다.


"그럼 평소에는 뭘 하는데요? 평소에 항상 절 만나는 것만 생각하며 지내지는 않잖아요."


"그, 그렇진 않죠 당연히!"


관리자의 때 아닌 폭탄발언에 가은은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가은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24시간 선생님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애, 결혼, 달콤한 신혼생활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을 때쯤 되자 달궈진 냄비처럼 가은의 머리에서 김이 올라왔다.


정신을 차린 가은은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물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흠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 가은은 말을 이었다.


"....음악을 자주 들어요."


"어떤 음악을요?"


"히트곡을 위주로 듣지만 딱히 가리는 건 없어요. 음악의 멜로디나 화음 등이 잘 들려서 그런 것들에 집중하는 편이니까."


"그랬구나. 그러고보니 가은 양은 처음 우리 회사에 왔을 때 머신갑 로봇의 변조된 목소리를 듣고도 바로 제 목소리인 것을 알아챘죠?"


"헤헤. 그랬었죠. 그땐 정말 깜짝 놀랐어요."


관리자는 가은이 얘기할 때마다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가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관리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가은의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았다. 그의 목소리는 가은에게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노래요, 그와의 시간은 그녀 방의 침대만큼이나 편안한 휴식처였다.


하지만 관리자와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가은은 마음 속 한켠에 자리해있는 걱정을 쉽사리 치워버릴 수 없었다. 


방금 전의 꿈이 계속 생각났다. 지금 보내고 있는 즐거운 시간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꿈이요, 한 순간의 거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도 떨쳐내지 못한다.


불안한 만큼 잊기 위해 현재에 집중했다.


소중한 만큼 잃고 싶지 않아서 불안했다.


미련과 두려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만 갔다. 곧 가은은 즐겁게 떠들다가도 그녀 스스로의 생각에 잠식되어갔다. 드러내지 않았기에 관리자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가은은 계속 생각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루미나 미야나 보미라면 이렇게 걱정이 있을 때 어떻게 했을까.


"....."


가은은 악몽을 꾼 것에 대해 말하기로 결정하고 이불을 꽉 잡았다.

 

“저, 선생님.”

 

“네.”

 

“사실 아까 꿈을 꿨어요.”

 

“어떤 꿈이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관리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진중하고 부드럽게 바뀌었다. 아까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던 만큼, 가은에게 있어서는 크게 두려운 이야기가 될 터였다.

 

“....선생님이 저랑, 헤어지는 꿈이요.”


가은은 주저하듯 조심스럽게, 열고 싶지 않았던 꿈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꿈 속에서 저는 행복해요. 그런데 같이 있다가도 선생님은 연기처럼 사라지세요. 그러고는 다른 꿈으로 넘어가지만, 다른 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행복하게 안겨 있다가도 선생님은 다시 사라지고 말아요. 그것이 계속 반복되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리 선생님을 불러도, 사라진 선생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하트베리의 동료들에게조차 제대로 보여준 적 없었던 마음의 뒷면을 백발의 소녀는 조심스럽게 꺼내보였다. 마음 속 생각이 언어로 형태를 얻을 때마다, 그것이 실현될 것만 같은 불길함에 가은의 어깨가 나지막히 떨렸다.


"나는 항상 혼자가 되요. 절망해서 울부짖어도, 사라지지 말아달라며 선생님을 죽을 힘을 다해 붙잡아도, 선생님은 절 떠나가요. 그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멈춰선 안된다. 끝까지 말해야 했다. 다시 이 악몽을 마음 속에 품은 채라면, 꿈과 현실이 뒤엉켜 꿈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 


그 일념 하에 소녀는 무리하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가면서, 마음의 문턱을 넘어 갖고 있던 생각들을 언어로 표현해내고자 했다.


“그래서 무서워요. 겨우 만났는데,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또 헤어지면 어떡하지. 선생님이 사라져버린다면, 꿈이 현실이 되면 어떡하지. 저는... 저는 선생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겨우 손에 잡은 이 소중한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아요.


억지로 힘을 짜내며 목소리로 표현하느라 소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가은은 절박했다. 눈물이 흘러나와서 가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리란 보장은 없다. 하늘 아래 영원불멸한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자신과 관리자의 관계도, 물거품처럼 덧없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이지 않는가. 누군들 버림받고 단절당하는 고통을 다시금 겪고 싶겠는가.


“가은 양.”


관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지막히 가은의 귀에 속삭였다.


“네...?”


그리고 관리자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가은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자신의 몸이 온전히 관리자의 품 속으로 쏙 들어갈 만큼 깊은 포옹에 가은의 눈물 젖은 눈이 놀라움으로 열렸다.


“...?!!”


올려진 팔이 천천히 가은의 등줄기를 쓰다듬는다.


“지금 우리는, 현실에 있죠?”


“선생님 지금 뭘...”

 

“저와 가은 양의 심장소리, 이 따스한 온기, 이 편안한 느낌, 분명히 느껴지죠?”


피아노의 화음같은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깃털과도 같이 내려앉는다.


“.....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어요. 이건 분명 현실이에요. 우리는 현실에 있어요. 제가 병문안을 온 것도, 가은 양을 제가 안아주고 있는 것도, 시간은 또 흘러 목요일이 다시 찾아오는 것도 전부 현실이고, 앞으로 찾아올 미래에요. 우리가 만나는 날은 계속 반복될 거에요.”


하늘 아래 불멸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멸을 추구하는 것처럼, 꿈이 꿈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현실이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삶. 

 

“.....”

 

“그리고 만일 내가 가은 양을 떠나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결코 내가 가은 양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가은 양이 내가 없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하게 성장했기 때문일 거에요. 그 때가 되면 가은 양의 마음속에 나라는 존재가 자리 잡았을 테니까.” 


하지만 하늘을 날고자 소망한 끝에 하늘을 날게 된 것처럼, 꿈을 현실에 묶어 또 다른 현실을 자아내는 것 또한 인간의 삶.


그렇기에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또 다른 확신을 주는 것. 나쁜 꿈 대신 좋은 꿈을 현실로 끌어내는 것.


"그걸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르죠."


“....!”

 

“그러니 지금은 떨어도 괜찮아요. 혹여나 다시 악몽을 꾸게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요. 제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요. 그 추억들이 가은 양에게 큰 힘이 되어줄 거에요. 할 수 있겠어요, 가은 양?”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단란한 속삭임을 노래한다.

 

그의 두 팔이 푹신한 솜이불처럼 몸을 덮어주어 안심시킨다.

 

그의 손길이 늦가을의 선선한 바람처럼 천천히,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얼마 안가, 가은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들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감정이라는 이름의 물병에 담긴 물들이 황옥과도 같은 맑은 창문을 통해 흘러내린다.

 

“....선, 생님...”

 

눈물에 젖었던 눈에서는 또 다른 눈물이 맺혀 흐른다. 가은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흐윽... 선생님... 선생님... 무서웠어요, 저, 무서웠어요..."


마음이 인도하는 대로 가은은 관리자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들이 퍼붓는 비처럼 마구 쏟아져 내렸다. 형태를 갖출 필요 없이 두려운 마음을 그대로 관리자에게 내려놓았다.


“옳지, 옳지. 괜찮아요. 잘 말했어요. 잘했어. 응.”


"흑, 으윽, 아, 흐윽..."


그런 가은을 관리자는 등을 토닥여주며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하나씩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날 때 비로소, 사람은 상처를 입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품에 안겨 우는 가은의 모습은 그루니아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게 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지금 가은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일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공포가 아니라 해방감과 안심으로부터 비롯된 기쁨의 눈물이었다.


한바탕 울고 난 뒤 진정되었는지, 가은의 몸은 부르르 떠는 것을 멈췄다. 호흡도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진정됐나요?”

 

사려깊은 관리자의 물음에 가은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선생님. 이상한 모습 보였는데도... 받아주셔서.”


“아니요. 오히려 내가 가은 양에게 고마워요.”

 

“어떤 점이요?”

 

“이제는 잘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절 향해 웃어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웃으면서 지내주세요.' 


샤레이드에서 가은을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을 때 쪽지에 남겼던 말을 관리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는 가은의 성장한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잘 성장해줬기에 고마웠다.


가은은 품에서 얼굴을 떼어 관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야 선생님과 이렇게 있게 되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지어져요.”


눈물에 젖어있지만 여전히 가은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는 아름다웠다.


“보기 좋아요. 악몽 꿀 때도 그렇게 웃으면 악몽이 죄다 도망가 버릴걸요? 한번 웃어주면 바로 사라질 것 같은데.”


실없는 농담에 가은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푸훗. 선생님도 참. 악몽을 그렇게 깨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까는 감기도 살살 옮으면 안 걸린다더니.”


"어라, 울다가 웃은 사람은 뿔 난다고 들었는데요?"


"선생님 탓이잖아요. 울게 했다가 웃게 했다가, 나쁜건 선생님이라구요?"


그렇게 말하는 가은의 얼굴에는 관리자에게 보여줬던 어떤 웃음보다 훨씬 환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역시 가은 양은 그런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니까요. 앞으로도 그렇게 웃어줄 수 있죠? 사람들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

 

가은은 아버지를 잘 따르는 딸처럼 눈을 빛내며 답했다.

 

“네. 물론이에요 선생님.”

 

관리자의 품에 좀 더 안겨있으려니 가은의 눈이 살짝 감겨왔다. 


격하게 울었기 때문에 지쳤던 것도 있고, 아까 먹은 약의 효과가 돌기 시작했기에 가은은 점점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휴식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듣고 있어요."


"제 옆에 앉아 주세요."

 

가은은 침대에 앉은 채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관리자는 멋쩍게 웃으며 침대로 가 가은의 옆에 앉았다. 


그 후 가은은 고개를 기울여 침대 옆에 앉아있는 관리자의 어깨에 기대었다.

 

“저... 좀 졸려요. 잠시만 이러고 있어도 되요...?”

 

대답 대신 관리자는 기댄 쪽의 반대편 팔을 들어 가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청순하고 눈부신외모의 소녀가 말없이 기대있는 모습이 조그만 인형과도 같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잘 자요. 가은 양.”

 

“이따 봐요.... 선생님....”


그 말을 끝으로 가은은 관리자의 어깨를 배게 삼아 팔을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기분 좋게 잠든 가은의 모습을 보며 관리자는 가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더는 가은의 얼굴에서 악몽의 여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녀가 얼굴에 머금고 있는 미소는 분명 관리자가 살면서 봤던 가장 깨끗한 미소 중 하나였다.




- FIN



1편 6200자 + 2편 6400자. 하루만에 글 다 써내려니 죽겠다. 뭔가 급전개가 된 것 같아서 납득이 되게 써보고 싶었는데 살릴 수가 없었네 ㅅㅂ.


자러간다 카붕이들아. 가은이 많이 애호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