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이런 대낮에 당당히 돌아다닐 줄이야. 움직이지 마. 머리 날아가.
얌전히 따라오시지.”
리볼버. 리볼버야. 탈의실 거울에 비친 뒤. 커튼 너머로 나온 손. 양복을 입고 있지만 뭔가 헤졌어. 피스톨도 아니야. 머리가 일을 끝마친다. 이 자식, 소음기도 없는 리볼버라니. 얕보고 있어 난 카운터야. 이런 총 맞는다고, 죽지 않아.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탕, 하고 유리가 깨진다. 지, 진짜로 쐈어. 저 자식. 그대로 몸을 돌려 팔꿈치 아래를 노리고 주먹을 휘갈긴다. 척골신경이 지나는 곳. 핀포인트로 노리면 팔꿈치 뼈보다 강도가 약한 주먹이라도 상관없이 손이 마비될 거야.
“큭!”
예상대로 오른팔은 총을 놓치고 커튼이 젖혀진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를 걷어차 버린 뒤에 달린다.
총성을 듣고 온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밝게 웃는 게 원래 표정인 거 같았던 점원이 비명을 지르고 있네. 달리려고 하자, 옷걸이 너머너머. 가게 바깥에서 쓰러진 남자랑 똑같은 복장이 총을 겨누고 있다. 이 바보가! 여긴 점원처럼 민간인도 있는데.
“꺄아아아악!”
탕, 탕. 몸을 숙이며 총알 속을 달린다. 매대에 있는 포스기와 모니터가 맞아 깨지며 튀는 잔해.
이상해. 입력된 것처럼 머리가 움직여. 이대로 달려서 소동에 몰려드는 사람들 속으로 피할 수 있다고. 난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몸은 자연스레 움직이고 있어.
“칫, 그냥 클론이라서 별거 없다더니!”
한 번 구른다. 아, 진짜. 이 스커트 움직이기 엄청 불편하네. 원래 것이 좋았어. 아, 하지만 스커트가 짧아서 방금처럼 구르면 팬티⋯아니, 됐어. 옷걸이 사이를 파고들어 가게를 빠져나온다. 좋아, 딱 좋게 인파가 몰렸어. 저기로 숨어서 도망치면⋯
“뭐야뭐야? 총? 진짜야?!”
“아,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알파트릭스 엔터테이먼트에서 영화 촬영 중이라서요.”
“영화 촬영 중입니다. 물러나세요. 물러나세요.”
“자, 촬영팀도 나오시구요.”
원제
블랙 바로크
-5
“허억, 허억⋯”
머리랑 몸은 안 지쳤어. 알고 있어. 근데 심장이 막 뛰어서 힘들어. 알아. 나도 알아. 계단까지 도망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재네들 날 쫓아 올거야. 영화 촬영? 웃기시네. 사전 협조도 없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움직여야 해. 도망가야 하는데⋯
“씨이⋯”
눈앞이 흐려진다.
왜? 왜? 왜? 왜? 생각이 판단을 멈추게 만들고 있다.
왜 나야. 왜, 아직 아무것도 못 해봤는데. 왜 이렇게 쉽게 들킨 거야?
왜 쫓아 오는 거야. 왜.
문득, 아까 크레페를 먹기 직전의 방송이 떠오른다.
-그룹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헛소문에는 강경한 대처를 취할 생각입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 그 여자. 진짜, 단 1밀리의 동정심도 없어?
“없겠지⋯”
있었으면, 그렇게 못 해. 왜냐면 난 아직 기억해. 선명하게 떠올라.

내 앞에 쓰러진 나. 불이 꺼져가는,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식어가는걸. 솟구치는 총알과 힘 사이에서, 손을 뻗어봐도 이미 꺼져가고 있는걸. 봤어. 단 한마디도 나눈 적 없지만, 그건 틀림없이 나였어. 우리는 똑같은 프로토타입. 불량이라 폐기하지 못하고 보관된 존재니까.
쓰레기가 되어가는 나와 눈앞에서 반짝이는 그 여자를 바라봤다.
그렇게 내 손 아래에서 나는 식어서, 멈췄다. 어차피 그 시설의 장치가 없으면 오래 살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반짝이는 거야? 우린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왜 그렇게⋯
“씨이, 씨이⋯”
쾅, 쾅 하고 방화문을 내려친다. 계단에 울리는 소리는 위아래로 퍼지다가, 금세 사라진다.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거나 그런 것도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서, 무릎을 껴안는다.
“흑, 흐윽, 씨⋯흑”
목이 메여. 머리는 달아나라고 빨리,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라고 하고 있고, 몸도 얼마든지 뛸 수 있는데. 그런데, 마음이 거부한다. 왜?
모르겠어. 알겠는데, 얼마든지 아는데, 알겠는데⋯
너무 하잖아.
나만, 나만, 우리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왜? 우리도 태어났잖아. 불량품이라고 이래야 해?
니가 누리던 것의 반의반도 안 되는 찰나.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거야? 불량품이라서?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건 너무하잖아.
이건 아니잖아.
주저앉은 채로 벽을 몇 번이고 내리친다. 이게 쫓아오는 상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이 감정이. 이 마음이, 주체가 안 된다.
탁, 탁, 탁.
“헉!”
하지만, 밑에 다급하게 올라오는 발소리에는 반응한다. 일어섰다. 뭐야, 밑에서 쫓아 오는 거야?
위, 위로 가야 하나?
탁, 탁, 탁.
위에서도 들려.
문을 열고⋯
“이쪽으로 몰아! 카운터니까 주저 말고 쏴!”
몰아? 몰아⋯?
마치, 마치⋯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잖아. 사냥하는 거 같잖아.
이⋯
“여기 있다!”
밑에서 들리는 목소리. 외침보다 먼저 고개를 든다. 빗나가는 탄환. 맞아도 아프기만 할 뿐.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반사적이었다. 위로 가려 해도 발소리가 내려온다.
“⋯하악, 하⋯하악⋯”
도,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가야⋯
싸, 싸워? 하, 할 수 있어. 그래. 할 수 있어. 저기도 카운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 미치광이 늙은이가 만든 소원을 이루는 요정. 나한테도 그 힘이 있어. 그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그, 그래. 덤벼 봐. 주먹을 쥔다. 떨리고 있어. 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이까짓 놈들 정도야⋯
“뭐 하고 있어. 여기야!”
방화문이 열리고, 나를 잡아당기는 손. 피하려다가, 그 익숙함에 나도 모르게 몸을 맡겨버린다.
.
.
.
“젠장! 어디 갔지?!”
“본 거 맞아?”
“이 쪽 문으로 들어갔는데!”
“쉿.”
남자가 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둘의 심장 소리만 크게 들린다.
좁아. 방화문 뒤 통로에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 웅웅, 하는 기계 소리. 왼편에 보이는 작은 LED 등이 점멸하고 있다. 공조실⋯?
머리가 움직인다. 금방 알아챌 거야. 통로에서 사람이 없어진다면 이 공간은 금세 들킬 거야. 움직여야 해. 하지만⋯그보다, 왜 이 남자는 도우러 온 거지.
‘훨씬 비싼 속옷이랑 옷을 사입힐 때는 암말 없다가, 크레페에 감사 인사를 하네’
“그⋯고, 고마⋯”
“조용히 하고 따라 와.”
뭐, 뭐야 저 남자. 진짜, 사람이 모처럼⋯
“어디로 갔어?!”
“여기에 분명히 몰았는데요.”
“잘 찾아봐.”
“야, 이거 뭐냐?”
“이거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지 않아?”
어, 얼른 따라가자.
.
.
.
.
남자를 따라 어둠 속을 걷는다. 뭔데 저 남자는 이렇게 익숙하게 걷지? 공조실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안 거야? 앗, 여기서 꺾는구나.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하면서도, 머리는 착착 움직인다. 구조. 단면도를 그리고 있다. 쇼핑몰 자체가 중앙에 커다란 홀을 두고 있다 보니 층별로 이렇게, 아⋯이런 구조구나.
근데 어떻게 이 남자는 이걸⋯
“너, 너,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
답은 돌아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발소리만이 이어지다가 멈춘다.
“조용히 하라니까, 그리고⋯”
“도와준 거에 대한 감사보다 그걸 물어보네.”
그거야 아까 말할 때 네가 끊어서
“그거야! 아까 말할 때 네가 끊어⋯”
“소방 점검 하러 온 적이 있거든. 여기.”
악, 또 끊었어. 진짜 짜증 나!
그보다 소방 점검?
“소방 점검? 너 소방관이었어?”
“예전에는.”
예전에는? 아, 하긴. 그 할아버지 말로면 건설 노동자라고 했었지.
아~ 알겠다. 보나 마나 잘렸네. 맨날 그 이상한 야한 거나 보고 있으니까.
아얏, 뭐야. 뭐가 머리를 때렸어.
“위에 조심해. 배관 지나가.”
“미, 미리 말해!”
“큰 소리 내지 마. 소리가 들려도 복잡해서 쫓아오진 못해도 들키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으으으으으으으, 뭐야 진짜. 일일이 짜증 나. 마치 사람을 무슨 아랫사람처럼⋯!
“⋯”
“아얏, 뭐야 이번엔 또.”
남자가 멈춰서는 걸 보지 못하고 부딪힌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네.”
“이름?”
이름, 그래. 말한 적 없어. 이 남자도 나도. 애초에 나는 이름이 없기도 하구.
“그래, 이름.”
“그, 그런 걸 말, 하려면 있지? 그, 뭐야. 니가 먼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
그 말에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뒤에서도 우리를 쫓고 있는 기척은 없다. 뭐야, 뭔데 그렇게 뜸 들여.
“헨델. 지금은 헨델이야.”
뭐야, 지금은 이라는 수식어는. 전에는 뭐 다른 거라도 되는 거야? 그리고 헨델이라니.
“헨델? 아무리 봐도 그런 이름으로는 안 생겼는데.”
“그래? 내 얼굴을 그렇게 잘 살펴보기라도 했어?”
칫, 한 마디 한마디가 짜증 나게. 장난치는 거지?
그쪽이 헨델이라면 뭐 좋아. 나도⋯
“난 그레텔이겠네. 뭐. 사이 좋게 이 마녀의 숲을 빠져나가는⋯”
“⋯그래. 이제 곧 2층 쪽 계단이야 달릴 준비 해.”
캉, 하고 문이 열린다. 발로 차서 연 거야? 그보다 방금 내 비아냥도 안 받아준 거지?
일일이 짜증⋯
“엇! 여기 있다!”
때마침 거기에 있는 양복 남자.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듯, 외치고 있어. 이러면 다 쫓아 올 텐데⋯
“크악!”
양복 남자가 그대로 쓰러지며 계단 아래로 돌돌돌. 뭐야? 저거. 헨델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아니란 것처럼 통로를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다. 방금 던진 거, 비상용 망치 맞지? 개폐구나 방화문 격벽 잠금을 깨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
“있다! 여기다!”
위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헨델이 움직인다. 방화문을 열고 얼른 가라는 손짓에 달린다. 복도를 지나면 홀이야. 로비로 내려가는 계단을 쓰면 곧장 빠져나갈 수 있어. 아, 헨델은 하고 돌린 고개.
“크아아앗, 뭐야 이건!!!”
“물이 왜?!”
소방용 호스를 틀고 발사하던 헨델이 양복들을 밀어내고 있다.
날 보더니, 그걸 두고서 달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손으로 내리치는 경고등.
삐잉 삐잉
쇼핑몰 전체에 우는 벨.
‘현재 A2-32구역. 2층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내람객 여러분들은 신속히 직원의 안내에 따라 당황하지 마시고 피난 부탁드립니다. 반복합니다. 현재 A2-32구역 2층에⋯’
.
.
.
.
뛰었다. 달렸다. 나를 쫓아오던 헨델은 금세 지쳐 헉헉댄다. 그걸 놔두려다가 부축해서 다시 뛴다. 버스로 온 다리를 넘어, 그라운드 원의 중심가를 벗어난다. 나와 다르게 남자는 이미 한계였다. 더는 못 뛰겠다는 것처럼 손으로 날 밀치지만 데리고 뛴다. 갈 곳.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면 되지?
아⋯
머리는 냉정하게 움직여,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창밖으로 신기해서 내다본 풍경을 모조리 기억한 머리가,
언덕을 오르고
쓰레기장을 지나서
낡아빠진 맨션에 도착한다.
걸을 때마다 탕, 탕하고 무너질 것같이 우는 녹슨 계단을 올라 3층.
문을 열고, 닫는다.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처럼, 둘 다 젖었다.
우산 같은 건 쓸 겨를도 없었으니까.
헨델은 현관 앞에 주저 앉는다.
동시에 물이 참방하고 튄다. 녹색의 작은 타일. 나도 모르게 남자를 따라 주저 앉는다. 좁은 현관에 쓰러진 둘. 거센 호흡. 바깥은 비가 거세지는 소리. 나는 그다지 지치지 않았어. 몸이 힘들다는 감각은 없지만, 힘들어. 지쳤어.
“허억, 허억⋯”
“하악, 하악⋯”
숨 고르기로 대결이라도 하듯이 빗소리에 맞춰 누가 더 힘든지 퍼지고 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물이 좌르륵 떨어지며, 타일을 적시고 나한테도 튄다. 아, 이 랩스커트 트임 뜯어졌네.
하긴 그렇게 달렸으니까, 버틸 구조가 아니기도 하구⋯
텅, 촤르르르륵.
헨델이 집 안에 발을 딛자마자 쏟아지는 무게와 물. 강화마루가 아닌 장판이라 상관없을 거 같지만 그래도 저렇게 젖었으면 차라리 벗는 게⋯아, 아니아니아니 그런 거 아냐!
“먼저 씻을 거야?”
라고 돌아보며 입을 연다.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쫓기고 있다고. 그리고 네가 사준 옷. 오늘 하루 만에 다 상해버렸다고. 하며 올려다보는 시선보다 빠른 뱃소리.
꼬르르르륵.
“아, 아아아, 아니거든? 아니야. 이거⋯”
“먼저 씻어. 밥부터 차려야겠네.”
“아니라니까?!”
.
.
.
후에에에, 씻고 나니까 엄청 포근해. 뜨거운 물 좋아. 이런 걸 왜 안 쓰지. 그 시설에도 쓰지⋯
핫, 하고 정신이 든다. 그렇지. 썼겠지. 우리가 아닌 연구원들은.
우리는 결국, 시제품이니까⋯
필요 없었겠지.
그리고 그 세실리아 신한테도.
“대충 먹어.”
식탁 위에 앉자 보이는 건 진짜 대충. 밥 위에 올라간 갈색 점액질. 코를 살랑살랑 간질이는 향.
이게 카레⋯ 맞지? 생긴 건⋯ 윽⋯아냐. 하지만 따뜻해. 뺨을 때리는 온기. 아까 샤워하면서 축 젖은 머리칼에 스며드는 이 향과 온기에 저절로 스푼을 들어 올린다.
“난 씻을 테니까, 넌 알아서⋯”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헨델이 내 뒤로 걸어간다.
아, 맞아. 그걸, 잊으면 안 된다고 머리가 움직인다.
“자, 잠깐만.”
“⋯뭔데, 말하지만 제대로 차릴 틈이 없었단 건⋯”
제일 중요한 거다.
계속 들었던 의문이고.
고개를 돌린다. 헨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변함없는 그 갈색 눈동자. 내 앞의 카레보다 옅지만, 공허한 그 눈동자.
“그⋯넌 왜 안 물어봐? 왜 쫓기는지⋯그런 거⋯”
“⋯”
멎는다. 들리는 건 바깥의 빗소리뿐. 착잡한 장판, 습기를 잔뜩 머금은 건 헨델의 젖은 머리뿐이 아니라는 것처럼 발의 감촉이 일러준다. 그런 뒤에 후우우, 하고 깊은 한숨.
“네가 말 안 했으니까. 그리고⋯”
“숨기고 싶으면 모자가 아니라, 머리를 자른다든지 아예 확 이미지 체인지를 하는 게 좋겠네.”
“뭐⋯너 알고 있었어? 내가⋯”
“처음에는 어느 부자가 만든 더치와이프인 줄 알았어.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었으니까.”
“사람을⋯무슨, 더치? 뭐?!”
“하지만 아니지. 넌 살아있고, TV에 나오는 회장이랑은 다른 사람이잖아?”
“⋯그, 그치?”
응? 잠깐, 이거 유도신문 비슷한 건가?
“아, 아니거든? 그, 그, 그, 알파트릭스 회장이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거든?”
“⋯넌 어디 가서 말을 아끼는 게 좋겠네. 난 어디 회장이라고 뻥끗도 안 했어.”
“이이이이~”
역시 유도신문이잖아!
이 변태 새끼.
탁탁, 발걸음이 멈춘다.
“그리고, 넌 아까 내가 말했는데도 속옷 왜 안 입냐?”
“⋯”
이이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
이 변태가!
“다 젖었잖아!!!”
화풀이처럼, 카레를 스푼으로 뜬 뒤에 입에 집어넣는다. 그게 듣기 싫다는 듯 화장실 문이 닫힌다.
/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룹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헛소문에는 강경히 대처할 계획에 있습니다.”
“실례지만, 그 대처 외에 진짜인지 아닌지⋯”
모처럼 손을 들어 올린 재킷 남자의 말을 끊으며 그녀는 입을 연다. 명색이 기자회견장이다. 그런 곳에서 기자의 말을 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무례한 행위. 하지만 그녀의 입술. 일말의 근심조차 없는 미소, 우아한 말투가 모든 걸 찍어누른다.
“헛소문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이 강경한 대처를 취하겠다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싱긋, 하고 웃는 웃음에 회견장이 얼어붙는다. 명백히 말투는 격식이 떨어졌다. 어투만을 따지고 본다면 거의 시비를 거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우아하게.
“그럼⋯구체적으로 어떤 대처를 취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 날갯짓 사이를 파고드는 한 여성. 베이지 계통의 흰 재킷. 소매는 옅은 핑크. 그 아래는 짙은 색 스웨터. 새까만 머리칼 아래의 날카로운 무테안경. 주변의 바람을 모으듯이, 어쩌면 그녀 자체가 폭풍의 눈이 된 것처럼 침착하게 말을 잇는다.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목격 정보, CCTV에 찍힌 영상, 다수의 정황, 목격 증거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대처하시겠다는 건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당돌하다.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의 기자들은 그 기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 하고 납득하지만 놀라기도 했다. 그야 당연했다. 관리국 소속의 오피셜 서포트임을 증명하는 재킷을 입고 있는 기자. 단 하나밖에 없다. 캐시. 기상 조절기를 두고 일어난 환경단체와 정치권의 유착을 파헤쳤던 인물.
그런 그녀는 지금 필요 이상의 이름값을 얻었다. 기자의 명망이 높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취재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 기사에 의해 손해를 본 조직이 노리기 쉬우니까.
그녀도 그런 부류다. 카운터겠다, 이렇게 된 거 관리국 소속이면 안전하겠다며 오피셜 서포트에 들어간 그녀다. 관리국은 알파트릭스 그룹에 관해서 완전히 무관계라며 어느 정도 비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그녀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그러네요. 그건⋯”
“아뇨, 회장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장 옆의 여성이 마이크를 든다.
옆의 회장에 비하자면 옅은 색의 머리칼. 하지만 나긋나긋한 그녀의 말투와는 다르게, 단호한 어투와 붉은 눈동자. 그녀가 가지는 말의 의미는 크다. 무려 현 회장의 말을 대신하는 것 외에도.
그녀는 전 회장이 있을 무렵에, 그룹 내의 비서실장으로 유명했으니까.
동시에 이런 환경에 익숙하다.
“증거에 대해서는 유언비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상에는 조작된 흔적이 있습니다. 그 점은 이미 경찰에 의뢰를 맡긴 상황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이 현 회장님의 선출이 그룹 내의 파워게임이고, 그것이 살육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아, 물론. 주주들의 압력에 의한 게 아니냐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씀드리죠.”
“영상은 전부 조작된 것이며, 각 그룹 내 불미스러운 일들은 그저 사고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점이 그저 사고가 아니라면 주주들, 아뇨 어떻게 대주주가 현 회장님을 지지하겠습니까? 잘 생각해보시죠.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그룹 내 사장들의 능력은 그리 쉽게 잃어도 될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주주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한 회사의 CEO가 갑자기 없어지는 겁니다. 주가 하락을 면할 수 없죠.”
“하지만 대주주가 다른 주주들과 연합하여 그 부분을 더 많은 투자로 알파트릭스 그룹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선출된 게 현 회장님이시고요. 클론이니 뭐니, 유언비어로 깎아내리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룹의 의견은 변함없습니다.”
“여기 계신 신지아 회장님이라면 그룹을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선출된 것입니다. 그러니, 관련 증거도 없는 공격에 관해서는 알파트릭스 그룹은 철저하게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건 기만이었다.
결국, 질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캐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붉은 눈동자가 그걸 막아 세운다.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너도 적이다’라는 식으로 노려보고 있다.
무언가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캐시는 직감적으로 느낀다. 넘게 된다면, 그다음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녀, 이진이 말한 대주주라는 무게를 알고 있다. 수수께끼의 손. 자금도, 권리도 출처 불명이나 관리국도 정부도 구태여 캐내려 하지 않는 것. 알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파고들기에는 소재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캐시는 답하지 않고, 기자 회견은 끝이 난다.
얼음 같은 회견장에, 웃는 건 단 하나.
신 회장, 신지아 단 하나뿐.
그렇게 이례적인 배꼽 인사를 남긴 후에 회견장을 떠난다.
.
.
.
또각, 또각, 힐 4개가 복도를 울린다.
“회장님, 그 소문 건에 관해서는 일단 네트워크 쪽은 이렇게 처리하면⋯”
“언니도 참. 저 아직 회장으로써는 역부족이니까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네, 아니, 응⋯지아야?”
태블릿을 들고 다가가던 이진이 물러선다. 신지아는 그 예쁜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하고 이진을 바라본다.
“⋯내가 맡아서 처리하는 걸로 괜찮아?”
“그럼요. 이진 언니라면 잘 해내실 거라고 생각해요.”
걷기 시작한다. 그 발걸음에 맞춰 이진도 따라 걷는다.
“사장님이 말씀하셨거든요. 사람을 믿고 맡기는 것도, 위에 선 자의 역할이라고요. 아, 그치만 언니 혼자서 처리 못할 거 같으면 곧바로 말씀해주세요? 이 건은 사장님이 도와주신 만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신지아가 돌아본다. 안타까운 듯이 돌아보는 그 눈빛에 이진은 아, 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있어⋯ 지아야.”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믿고 맡길 테니까, 언니 편한 대로 얼마든지 처리해주세요.”
“⋯”
그렇게 걸어간다. 거침없이, 나비가 봄날의 날갯짓을 하듯. 앉은 곳이 사자 콧등이든, 혹은 금방 쓰러지는 나뭇가지이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태연히, 우아하게 날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만약에”
“네?”
“이건 만약인데, 그⋯쓸데 없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이진 언니의 말이 쓸데없는 게 있을 리가요.”
이진은 불안했다. 아니,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의 포지션은 애매했다.
스파이도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도 못했다. 눈앞의 현 회장. 그 등극의 일등 공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고, 오히려 적대하는 입장에서도 애매했다. 그렇기에 불안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아이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오른다. 그걸 눈앞에서 봤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라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중간하다.
“그⋯제가 어릴 적에 말이죠⋯ 아니 내가 어릴 적엔⋯”
“네, 듣고 있어요. 언니.”
“흔히들,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다. 그런 건 대학 가면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공부하라고 가르쳤어. 하지만 중간에 관리 실패가 있었지.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졌어. 하지만, 그룹은 여전했고.”
“아, 언니의 입사 때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지아야.”
이르듯이, 이진은 지아를 바라본다.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갸웃거리며 이진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무섭다. 감각적으로는 그렇게 느꼈다. 이진은 무슨 색으로도 물들 수 있고, 어떻게든 받아칠 수 있는 저 인간 외의 느낌이 무섭다. 하지만, 겉은 그 언제나의 서툰 지아다. 그 간극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입을 연다.
“그렇게 기다리고, 시간이 지나길 고대했던 내가 맞이 한 건 전혀 다른 현실이었어.
매미가 땅속에서 우화할 날을 기다리며 꿈을 피웠지만 맞이한 건 3개월의 방황인 것처럼.”
“⋯”
“넌 그런 존재가 무슨 생각을 할 거 같아?”
신지아는 오른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조명을 받아 뭉개진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 이진은 자신이 죄를 범한게 아닐까 싶은 감정에 빠진다.
“안타깝지 않을까요? 억울하고?”
“그래⋯지아야.”
넌 그걸 하는 거야. 그걸 내가 하는 거야. 그걸 알아줬으면 해.
그건, 이진의 배려심이었다. 어쩌면 어른 특유의 일러주고 싶은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고 놓쳐버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것들. 동시에⋯ 이진의 거부감이기도 했다. 지아가 만들어진 존재라면, 그녀들도 마찬가지다. 사살한 개체와 보관되어있던 개체에서 하나가 빈다. 세실리아 신의 성격상 뭐 하나 남겨 놓을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도망쳤다. 그걸 이제 잡아서, 없애야 한다.
지아를 위해서.
”하지만 태어난 이상, 밖으로 나온 이상 매미는 날고 우는 수 밖에 없을거예요”
“⋯슬프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건 저도 알아요. 제가 했던 일의 의미두요.”
“이진 언니. 이건 언니한테 맡기지만, 너무 힘들 때는 저한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전 언니한테 엄청 많이 배웠어요. 그러니까, 제가 어디에 있든 언니를 대하는 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그것 자체가 슬픈 일이라고. 만약 모른다면 일러주면 끝이지만, 알고 있는데 했다는 건. 그걸로 구겨진 너의 표정이, 감정을 깨우친 지아의 표정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이진은 깨닫고 만다.
없애야 하니까, 자기모순을 견디며 해냈다. 줄곧, 기댈 곳 없이 배척받기만 한 괴물이, 자신의 마음을 깨닫자마자 한 것이 그거다.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그 마침표를 내가⋯
“미안해. 내가 확실하게 해낼게. 뒷일 없이.”
“네, 부탁할게요. 아, 맞다. 사장님을 보러 가야 하는데. 혹시 스케줄 한번 확인 해주실래요?”
그건 못 찍겠는데 지아야?
라고 말을 삭히며, 이진이 태블릿을 신지아에게 들이민다.
18시에 그룹 파티 참가. 지아의 표정이 순간 구겨진 것을 이진은 보았다.
그 때문에 웃어버리고 만다. 이런 얼굴을 할 줄 아는 아이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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