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Black barroca



1화 보러가기








눈이 세상을 덮는다. 계절은 금세 흐른다. 내가 치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초봄. 하지만 여기는 아직도 눈이 내린다. 금세 녹고, 봄이 찾아오겠지.


양팔에 의수. 무릎에는 보조대. 인공 턱.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괴해서일까.


아니, 죽지 못해서 살아있으니까.

어디에도 섞이지 못할 뿐이다.




가끔은, 가슴이 쑤셔서 건물 난간 위에 선다. 

빠아앙, 하고 지나가는 차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고 바람이 분다. 

이 풍경을 지아는 봤겠지. 



한참을 고민하다 내려온다.



결국, 나는 그랬다. 겁쟁이였다. 계속해나갈 용기도, 그만둘 용기도 없다. 도대체 어떤 각오였을까. 심정은 유추할 수 있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레텔. 너도 마찬가지야.





초목이 자란다. 금세 겨드랑이가 축축해지고, 코를 채우는 습기. 초목이 살짝 숨 죽는다. 하늘이 높아지고, 코를 찌르는 은행 내음.





그로니아에서는 큰일이 났다는 모양이다.

하하, 마치 이를 악물고 전승 축제를 보지 말라고 말하는 거 같네.





흐른다. 계속 흐른다.

시간만이 흐른다.



더 좋아질 일 없는 몸을 내버리고, 마음만이 시간을 타고 계속 흐른다. 그런데, 계속 생각만 남는다.



후회만이 남는다.




오늘은 어딘가 으슬으슬해서, 점퍼를 입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마음은 어디론가 도망갔는데, 몸은 살고 싶어서 지랄이다.




-샤레이드 도시 관리국에서 알려드립니다. 금일 날씨는⋯








턱이 붙어,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퇴원 후에도 힘들었다. 의수와 의족을 달고나자, 나는 쫓겨나듯 샤레이드로 보내졌다.


적당한 집과 적당한 일자리.


하지만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야, 그렇잖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양팔이 의수에 절뚝이는 병신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럴 때마다 난간에 오른다. 가장 높은 건물. 여기라면, 망설이다 실수로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프다. 아픈데, 살고 있다.

이제서야 그 탄식을 이해할 것 같다.

이럴 거 같으면, 처음부터 마음 따위 없는 게 낫다고.




하지만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안 된다고, 다독이며 내려온다.



그게 너무 추해서, 그냥 내가 살고 싶은 거면서.



그렇게 계절이 또 흐른다.

가끔씩 지아나 엄마, 그레텔을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고개를 돌리지만 돌아오는 건 경멸의 표정뿐이다. TV는 보지 않는다. 그레텔의 얼굴을 한 그 여자가 나오니까.




“⋯”




봄이 다가온다. 여기는 벚꽃은 없다. 그냥 좀 따뜻해질 뿐.

옷을 입는다. 절뚝이며 걷는다. 



돌아갈 곳은 없다. 돌아갈 수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계속 살고 있다. 정말 미쳐버릴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라, 가끔 머리를 쥐어뜯다가 의수의 차가움에 웃어버린다.







슬슬, 돈도 떨어져 간다.




-이걸로 약속한 건 다 했습니다. 이 이상, 알파트릭스가 당신을 찾을 일도, 대답도, 안 할 겁니다.




그러겠지.

그러시겠지.




그래서, 의족을 팔았다. 웃긴다. 슬개골이 빠진 곳을 잡아주는 보조구 하나가 얼만지 알아? 하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상대가 없다.


그게 웃겨서 웃었다.



나 하나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었구나. 그레텔의 목숨값은 이렇게 비쌌구나.




“아니, 그레텔만 그런게 아니라⋯”











다음엔 뭘 팔지.

그레텔, 난 네가 준 것을 팔아 살고 있어. 서서히 죽고 있어.

이 마음도, 팔 수 있을까.



팔고 나면 뭐가 남을까.

닳고 나면 뭐가 남을까.






절뚝이며, 길을 걷는다. 철도를 지난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웃는다. 그래, 재미라도 줘서 다행이네.


스쳐서, 건넌다.



그리고 문득,


















지금, 돌아보면⋯

상대방도 돌아볼 것 같아서,




-열차가 들어옵니다. 차단막 바깥으로 이동해주세요.




덜컹덜컹, 시야를 가리며 열차가 지나간다. 그럴 리 없다는 것처럼 선로를 타고, 돌아본 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스쳐 온 시간처럼 흐르다가, 꼬리가 끝난다.


차단막이 오르고,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하,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아직 아픈 가슴이 있다는 게 웃겨서, 한 번 더 웃고.

걷는다. 절뚝이며, 걷는다.





이번에는 뭘 팔지.

이 의수 중에 어느 쪽을 팔까.

그래,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오른쪽이 나으려나, 하지만, 감촉이 덜한 왼쪽이 나으려나⋯






“안녕.”




그때를 떠올렸다. 추잡스럽게 내리는 비. 쓰레기장 위에, 누인 너를.

고통에 신음하며, 떨고 있는 그 모습.


내가 내민 손, 우산에 반짝이던 그 눈동자를.


또, 이런다. 이젠 없는데.





감상을 팽개치고, 걸으려다가 미끄러진다. 볼썽사납게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비싼 값을 하는 거였구나, 그거. 무려 그레텔의 목숨값 중 하나였으니까.

당연하겠지. 괜찮아, 일어설 수 있다.


이렇게, 의수 두 개로 지면을 딛고, 주변을 붙잡고서 멀쩡한 무릎으로 일어서면 된다.

이제 나머지 하나도 팔게 되면, 이것도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거대로 웃기긴 하겠네.




"⋯“




손이다. 손.

내 눈앞에 놓인 손 하나.


오른손이 나왔다가, 부끄러운 듯 혹은 가리듯이 왼손으로 바뀐다.


울퉁불퉁, 시꺼먼 상처를 가리듯.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든다.






"⋯그때랑 반대네."





하지만, 마음은 달라서. 몸도 달라서. 마음이랑 몸이 머리가 전부 다른 생물처럼 제각기 움직여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손이 손을 향해 뻗는다.




입이, 어설픈 입이, 병신같은 발음이, 너의 이름을 담는다.




“그레텔⋯”





“응.”








“왜⋯”





살짝 옅어진 머리칼. 갈색에 가깝게 변한 머리. 처음 봤을 때처럼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에 커다란 나비매듭. 내 손을 잡고 일으킨다. 







“⋯있지, 나. 그때 헨델 네가 한 말 전부 다 알아듣지는 못해서⋯궁금해서⋯”



아, 꿈이다. 꿈이니까, 깨지 말아 줘.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으니까. 제발.




“늦어서, 미안해.”



뭐라는 거야.

네가 준 턱이다. 네가 준 몸이다. 네가 준 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 말해.



“아, 얼굴⋯ 보기 흉해서 좀 그러려나⋯”



그럴 리가. 그딴 게 뭐가 중요해.




“그레텔⋯”

“응.”




꿈이다.

꿈이야.


몇 번이고 상상했고, 몇 번이고 망상했다. 하지만 전부 꿈이었다.


그러니까⋯





“집에 가자. 같이, 같이 돌아가자.”

“응.”






그래. 돌아가자. 집에 가자. 설령 집이 없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더라도.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줄 빵조각조차 없더라도.

마녀가 쫓아와도.


돌아가자, 손을 잡고 같이 돌아가자.



여행은, 이야기는, 모험은, 하루는,





집에 돌아가야 비로소 끝나니까.







“그러자.”



하며, 너는 웃는다. 그때와는 다르게, 곤란한 듯이 미간에 모은 눈썹은 없다. 울음을 참으며 코끝까지 몰린 입술은 없다. 자연스레, 헤헤 그러자 하고 웃는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려다가, 멈춘다. 멈춘 손을 그레텔이 잡아 닦아낸다.






“가자.”

“어.”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걷는다.

나도, 앞이 흐리다.

걸을 때마다 흐려져서, 멋쩍게 웃으면 그레텔이 닦아낸다.



가자.

돌아가자.

응. 함께.













아, 하지만 단 하나. 말하지 않은 게 남았는데.





“아, 맞다. 모처럼이니까 밥 먹고 가자. 나 그거 먹고 싶어.”

“샤레이드잖아? 맛집, TV에서 봤었거든.”

“그러니까⋯어, 뭐더라⋯”

“뭐야아아, 아까부터 왜 그러고 있어? 할 말 있어?”




“⋯아니, 그래. 먹고 가자.”






넌 처음부터, 찌그러진 그 상태로도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이건 다음을 위해 아껴두자.

집에 도착한 다음에.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

“고생 많으셨어요. 이진 언니.”

“⋯?”

“아, 알아요. 왜 그런 선택을 했냐. 그거죠?”



“그건, 내 독단이었어. 놓아주려고 한 건.”

“그럼 안 되죠.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잖아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니? 그래서 마지막에 너랑 만나게 해달라고⋯”



“⋯”




“언니, 그때도 보셨겠지만, 전 그때⋯그 프로토타입들을 전부 처리했어요. 아뇨, 죽였⋯”

“그래,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전,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늘 그러죠. 사장님도 그래요. 자기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

“계속 걸렸거든요. 프로토타입들도 어떤 의미로는 저인데, 그걸 전부 처리한 저한테, 실은 마음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넓게 보면, 그⋯그레텔씨는 저랑은 다른 또 다른 저잖아요?”

“또 다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했어요.”

“그건⋯”

“근데, 대화해보고 알았어요. 그레텔씨는 제가 아니에요. 저랑 다른 사람이에요. 그레텔씨가 겪은 일을 제가 겪었다면 아마 전 세상을 저주하고 말 거예요. 하지만⋯그녀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거예요.”

“소원을 이뤄줬구나, 그 아이의.”

“네. 저는 소원을 이뤄주는 요정이니까요.”

“⋯지아야.”

“네.”


그 선택, 누구만 구하고, 나머지 프로토타입은 구하지 않은 선택은, 오만이고.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면서, 알기 쉽다는 것. 그런 와중에 흉터만은 남긴 것은 정말.


널 두렵게 하면서도, 안타깝게 한다고 이진은 말을 삼킨다.




“아, 근데. 이진 언니. 이상한 게 있어요.”

“어, 어어. 뭐가?”

“흉터만은 남겨달라고 하더라구요.”

“똑같은 얼굴은 싫대요. 제 얼굴 보기 흉한가요?”

“⋯후, 후후후후훗⋯”

“응? 제가 또 잘못했나요? 왜 웃으세요?”



아니, 하고 말을 삼키며 이진은 말을 남긴다.

그리고 입을 연다.



“그 마음을, 이해할 때쯤이면 넌⋯멋진 여자가 될 거야.”

“네?”

“그러길 바라.”


















블랙 바로크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