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찢을듯이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잠이 깬 이수연은

얼굴을 여전히 베갯속에 파묻은 채 손으로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가까스로 알람을 껐다. 


간밤에 마신 술기운이 남아서 징징 울리고 있는 머리에 손을 짚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만성 피로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질질끌고 힘겹게 욕실로 향했다.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자는 습관 덕에 그대로 욕실에 들어선 

이수연은 여전히 몽롱한 정신도 깨울 겸 찬물로 세수를 하고 고갤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들반들 했던 피부는 다소 푸석해진 것 같고,

눈 밑의 다크 서클도 더 짙어진 것처럼 보인다. 


..쯧!


언제부터였을까, 거울을 보는 일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건.


화풀이하듯 수도꼭지를 풀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단숨에 날아갈 정도로 뜨거운 물을 온몸에 끼얹는다. 


사실 짐작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관리자가 말도 없이 사라진지 몇달이 지났고, 자연스럽게  그와 갖던 잠자리도 끊겼다. 

요컨대, 양기 부족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녀의 추측이었다.

한창 그와 몸을 섞던 동안엔 피부도 반질반질했고 몸매도 지금보다 훨씬 탱글탱글하고 탄력적이었다.

알게모르게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생리 주기도 불규칙해졌다.

마지막으로 온 게 몇달 전쯤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잊자, 이수연.’


온몸이 시뻘게질정도로 뜨거운 물을 맞고 있자니 부정적인 생각이 점차 씻겨져내리는 기분도 드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 남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그저 필요로 할뿐.’


그녀는 스스로를 암시하듯 되뇌이며 샤워를 끝내고 나와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속옷을 아무렇게나 꺼내 집었다.


속옷의 디자인과 위 아래 색을 신경쓰지 않은것도 몇주가 되었다. 

팬티를 입고 나서 브래지어를 차던 이수연은 또 브래지어가 작아진 것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살이 찐것은 아니다.

세탁이 잘 못 된것도 아니다.

이수연은 이상하게도 최근들어 점점 가슴이 커지는 것을 느꼈고, 지금 작게만 느껴지는 이 브래지어도 구매한지 얼마 안 된 신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남자 사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젖가슴이 나이도 잊은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또 성장했다는 사실 또한 그녀에겐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은 오직 관리자가 그녀를 사랑한다 착각했던 짧은 순간 뿐이었고, 그녀 인생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 폭유는 전장에서 페널티에 불과한 지방덩어리일뿐이었다.


“..읏..?!”


출근은 해야하겠고, 당장 더 큰 브래지어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플 정도로 작아져버린 브래지어에 젖가슴을 욱여넣던 이수연은 유두 부근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곤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설마.’


불안한 마음에 브래지어 컵 안쪽을 확인해 본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샤워하고 나서 물기를 분명히 닦아낸 후에 착용했음에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만큼 선명한 젖은 자국. 

확인차 젖가슴을 꾸욱 쥐어짜본 그녀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수연의 유두에 맺힌 희끄무레한 물방울은 젖, 즉 모유라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었다. 


당황, 황당, 분개 그리고 이외에도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태풍처럼 할퀴고 지나갔다. 


출산 전에도 모유가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런 이들도 대부분은 출산직전, 임신 말기에나 분비된다고 했다. 

배가 불러온 걸 보나, 역산을 해보나 그녀는 절대 임신 말기가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출산경험이 있거나 그쪽으로 박식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인 상식정도는 갖고 있었기에 갑작스레 흘러나오기 시작한 모유는 그녀의 상식과 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그녀의 체질이 변화되었다는 것.

그게 스스로의 변화이든, 누군가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냥 모유가 나오는 체질이 된 것만으로도 절망적이지만, 그보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녀가 임신까지 했을 경우였다. 

그녀는 지난 몇달간 생리가 안 온것이 스트레스때문이 아니라 임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필사적으로 되짚어 본다.

이수연의 기억속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피임을 신경쓰는 쪽은 주로 그녀 쪽이었다. 

귀찮으니 대충 하자던 관리자와 무슨일이 있어도 콘돔은 해야한단 그녀와의 치열한 의견대립. 


그래, 여기까지의 기억은 비교적 선명했다. 


하지만 유독 그가 연락이 두절되기 전 날의 기억만큼은 흐릿했고, 기억이 흐릿한 만큼 불안감은 커져갔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관리자와 섹스한 기억이 흐릿한 이유는 그가 가져온 술 탓이었던 것이 떠오른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급스러운 술이라는 말에 바로 경계심을 내려놓고 부어라마셔라 했던 자신에게도 과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평소에 그렇게 피임에 신경쓰던 여자가 인사불성이 됐다고 곧바로 질내사정해버리는 것 또한 도덕적으로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사실 애초에 그로부터 도덕성을 기대한 것이 어불성설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내, 책임을 물을 남자가 어디 있는지 도통 감도 못 잡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따윈 무엇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주먹은 분노를 표출할 길을 잃고 힘이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싸튀충같으니라고.


이수연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이 나이에 임신이라니, 그것도 결혼도 안한 여자가..

배가 불러오기라도 하면, 아니 그 이전에 새어나온 젖 때문에 입고 있는 셔츠가 젖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망신은 불보듯 뻔했다. 


특히 그 불여시 같은 서윤의 눈이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이수연은 눈을 질끈 감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서윤이라면 이수연의 명예를 땅에 처박기 위해서 근거 없는 악의로 가득 찬 소문들을 날조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은 온통 혼돈으로 가득했지만 부사장의 직책을 역임하고 있는 그녀는 늘 다른 사원들의 귀감이 되어야만 했기에, 일단 지각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수연은 행여 업무중에 모유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브래지어 위에 붕대를 몇겹이나 두른 뒤 평소보다 더욱 꽉 끼는 블레이저를 입고 출근길에 나섰다. 







회사까지 걷는 동안에도 몇번이나 가슴을 확인하던 이수연은 먼저 도착해 있던 레나의 인사를 받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 덕분에 여전히 약간 땀을 흘려 젖은 것을 제외하고 셔츠는 집을 나설 당시의 뽀송뽀송한 상태 그대로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원들이 출근하기는 다소 이른 시간, 이수연은 

웬수같은 사장실을 지나, 부사장실로 향하다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하는 자신의 현 상황에 문득 부아가 치밀어 침이라도 뱉어줄 요량으로 평소에 그녀와 관리자가 날마다 몸을 섞던 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사장실 뒷편, 책장너머 숨겨져 있는 비밀 장소.

표면적으로는 머신 갑의 충전소로 되어 있지만 사실 그 정체는 테라브레인실이었고, 가구라고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널찍한 침대 하나 있는 살풍경한 방이었으며, 관리자가 이수연과 섹스를 일삼던 방이었다. 


몇 달 전부터 누구도 오지 않는 사장실의 문을 연 이수연은 잠시 옛 추억에 멈칫했지만 그 아련함은 그녀가 맘 속에 품고 있던 분노를 이겨내지 못했다. 


관리자를 향한 그녀의 격한 감정은 최소한 그가 버려두고 간 컬렉션들을 부숴버리기 전까진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먼지 쌓인채 사장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머신 갑 트로피 하나를 높게 치켜 든 이수연은 그걸 박살내기 직전, 뭔가 인기척을 느꼈다. 


그건 그녀가 카운터, 그것도 그녀 정도 되는 고등급 카운터가 아니었더라면 지나쳤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애초에 관리자가 테라브레인실을 섹스의 아지트로 삼았던 것도 그 방의 뛰어난 방음, 그럼에도 훌륭한 통기성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수연의 신체능력은 보통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녀는 머신갑 트로피를 살포시 내려놓은 뒤 귀를 기울였다. 


분명, 그녀의 청각은 아까와 비슷한 소리를 포착해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소리, 

그녀도 저 테라브레인 실 문 너머에서 질리도록 내고 들었던 소리,


남녀가 격렬하게 몸을 섞으며 물고 빠는 신음 소리.




--------


아마 2편 내지 3편 완결입니다!

쓰고 싶은 소재는 많은데 요즘 너무 바쁘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