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가 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기억해 내는 힘이 아닌 잊는 힘이야말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것이라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 의도친 않았지만 살짝 오래 살고 있는 나에게 있어선 더더욱.

그렇다하더라도 이미 맺어버린 인연과 그 과정에서 생겨난 애증, 혹은 애정의 깊이에 상관없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놀 거야.'



쓸데없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런 장난 같아 보이는 선언을 했던 소녀의 얼굴을 이 세계로 넘어와서 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밀어두고픈 그 진실을 다시금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   *   * 




그녀를 다시 마주한 것은 그러니까...... 언제였지?


[요, 요정님 이제 저희 인생에 모험 같은 건 없는 거겠죠......?]


[다, 당연하죠! 뭘 물어보는 거에요, 민서 양! 요정 님도 양심이 있다면 우리 같은 소시민에게 더 이상의 시련을 내리진 않을 거라고요!]


생각났다.

리플레이서 신디케이트와의 전투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화포를 푸는 순간이었지.


한참 전에 보고를 받았기에 프리덤 라이더즈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긴 했다.


물론 알고 있던 얼굴을 봤다고 해서 딱히 어떤 감정이 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직전 세계를 거치기 전까진 있는지도 모를 수많은 행인들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나마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던 이전에도 대화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으니까.


안 그래도 이미 오래 전에 사람에 대한 감정이 말라버린 내게 그 정도의 옷깃 스친 수준의 인연은 인연이라 하기도 뭐하다. 프리덤 라이더즈에게, 정확히는 임시 리더인 그녀를 따로 불러 입사 제의를 한 것도 그저 사람이 부족한 김에 싼 값에 휘두를 수 있는 자원 좀 채워볼까 하는 속셈으로 건넨 것일 뿐이었다.


[......잠시만요, 임시 리더라뇨. 제가요? 큰 힘과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그 귀찮은 직함을?!]


[아닌가? 민서 양을 불렀을 땐 자네가 리더라며 자네와 이야기 하라고 했었다만.]


[그 여자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아니 애초에 저한테 먼저 물어보셨어야죠, 사장님!]


[누굴 먼저 불렀듯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거란 예감이 드는 건 둘째치고, 일단 대답을 듣고 싶은데 말이지.]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런 계약을 맺으면 정기적으로 현장에 나가 싸워야하고 쉴 시간도 빼앗아 갈 거 잖아요?]


[......자네들, 일단은 정규 라이센스를 보유한 카운터 팀 아니었나?]


[훗, 무르군요 사장님! 세상엔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답니다! 회사 생활이라니, 제 신념과는 3광년 정도 동떨어져 있다구요! 후후후...!]


[그런가? 아쉽군. 회사 재정이 개선된 덕분에 월급을 꽤나 넉넉하게 챙겨줄 수 있는 형편이 됐는데 말이지.]


움찔했다. 태연한 척 했지만 분명히 움찔했다.


[4대 보험은 기본에 인센티브, 보너스, 정기적인 유급휴가, 본사 지하에 위치한 사우나 무료 이용권......]


단어 하나하나를 늘어놓을수록 빙글빙글 눈이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젠 아예 대놓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말은 저렇게 청산유수처럼 늘어놨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리더의 사망 이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사기까지 당하고 열정페이에 시달렸지. 안 그래도 니트 기질이 강한 그녀들에겐 그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더 없이 끔찍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장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리라.


[그 밖에도 일용직 갑판 청ㅅ... 가 아니라 대형 크루즈 여행권을 비롯해 회사 소속 카운터들에 대한 각종 혜택들이 제공될 예정이었지만 입사를 원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군. 방해해서 미안했-]


[자, 잠깐. 잠깐만요?! 에이 사장님 제가 꼭 일하기 싫다는 건 아니고 임시지만 팀의 리더로서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순식간에 계약서에 사인을 맺고 프리덤 라이더즈를 회사에 정식으로 합류시킨 지 한 달. 팀별로 격차로 준 몇 주 간의 특별휴가 기간이 지나 이전처럼 이터니움 채굴 업무나 침식체 사냥 같은 일상 업무 환경이 돌아왔다.


리더가 돌아오고 정식 라이센스를 발급받은 알트 소대는 그 영향인지 근래 굉장히 의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높은 성과를 얻고 있고, 

자신의 힘에 눈을 뜬 유미나 역시 팀원들과 순조롭게 임무를 진행 중에 있으며, 

펜릴 소대장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화풀이 대상이 되는 머신-갑-로보 Mk.2의 수리비도 여전히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 한 달 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전 세계의 메이즈 전대를 다시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거나, 생각도 못한 딸이 생기거나 하는 식으로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꽤 자주 일어난 사건이 있다면, 회사 어딘가에 숨 죽이며 짱박혀 있다가 펜릴 소대장과 알트 소대장에게 번갈아가며 끌려가는 히로세 양의 모습이겠지. 


지금처럼 말이다.


"자, 잠깐만요! 왜 다이브 하는데 매번 저까지 끌고 가는건데요?! 저보다 훌륭한 팀원들에 다른데서 파견 나온 카운터들까지 많잖아요!"


"시끄럽다. 너 같은 케이스는 썩을 제자 놈으로 충분해. 활용 가능한 자원이 휴게실 소파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는 꼴을 내가 보고 있을 것 같나?"


"그리고 히로세 양을 예의주시해달라는 사장님의 특별 부탁도 있었거든요. 그런고로, 얌전히 협조 좀 해주세요?"


"속였구나 사자아아아앙!!!!!!?"


사자후를 내지르며 양 팔을 잡히고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마치 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자식 공부 시키려는 엄마한테 끌려가는 상황의 그것이었다. 이미 그 상황이 익숙해진 나를 비롯한 다른 사원들과 직원들은 '또 시작이네' 하는 식으로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끌려가며 울먹이는 그 모습이 황당하다기보단 이젠 귀여워보일 지경이었기에.


그러니까, 그녀는 딱히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게으르고, 빈둥거리고, 귀찮은 일이 발생할 끼미를 감지하고 주도면밀하게 빠져나오고, 어떻게든 노는 시간을 1초라도 더 만드는 데 있어선 주시윤과 맞먹을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르다. 힐데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보는 건 분명 그와 그녀의 협업 빈도가 날로 늘어나고 발전해가는 탓이겠지.


몸에 밴 니트 성향을 제외하면 귀엽고, 온화하고, 발랄한 성품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제 몸보다 큰 대검을 무리 없이 휘두르고 다니는 주제에 은근히 겁이 많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물러서지 않는 끈기가 있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일단 자리를 맡게 되면 어떻게든 맡은 임무를 사수해낸다.


그 모습은 분명히,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과 비슷했다.



[......뭘 꼬라보는 거야?]



첫 대면부터 그렇게 내뱉은 그 때의 그녀의 모습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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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애캐 아키 소재로 써봤는데 수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캐릭터성으론 뉴비쟝 영원한 친구 아이리에도 밀리지 않는다고 보는데.....


다음편은 밀린 과제 좀 하다가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