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나는 동네 족발집 문앞에 서 있었다. 즐겨 하던 카사가 패치를 조지고 다들 불족발 챌린지라는 걸 하길래, 인생 처음으로 불족발을 먹으러 와 본 것이다.


가게 안은 제법 넓고, 사람도 꽤 많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불족발을 주문했다.


메뉴판 사진 속의 불족발은 보기만 해도 속이 쓰릴 정도로 매워 보였다. 그 검붉은 색깔이라던가, 11/26 패치의 문제점을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니 어느새 음식이 나왔다.


무심코 두 손을 모으고는 '잘 먹겠습니다' 마냥 "박상연 개새끼" 라고 중얼거리자 옆 테이블에서 푸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단발머리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죄송해요, 순간적으로 그만. 그쪽도 카운터사이드 하시는 거죠?"


소리를 듣고는 웃음을 참느라 한껏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했건만, 여자는 그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엷은 미소엔 족발집이라는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기품 같은 게 있었다. 무슨 귀족 같았다. 여자는 대충 츄리닝을 걸치고 슬리퍼를 찍찍 끌고 있었는데도 그 전부가 우아해 보였다.


그냥 갑자기 팬드래건 같다, 라는 시답잖은 생각이 스쳤다. 그래, 딱 엘리자베스 팬드래건이었다.


"박상연 개새끼. 후후…."


그 팬드래건이 살며시 웃으며 덧붙였다. 욕설도 무슨 고급 홍차의 품종 같이 들린다. 그리고는 금새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팬드래건 특유의 그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네? 불족발 챌린지 맞죠?"


"아… 아, 네. 불족발 챌린지 하러 왔죠. 하, 하하하…."


"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시겠어요?"


"아, 아, 아아, 아뇨, 그… 사회적 거, 거리두기 해야죠…."


아, 이 미친. 나 갑자기 뭐라는거지.


"아, 사회적 거리두기, 중요하죠. 네."


침묵.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옆 테이블의 팬드래건은 차가운 표정으로 불족발마저 우아하게 먹는데 성공하고 있다.


나도 따라서 불족발을 한 점.


아.


시발, 더럽게 맵다. 허겁지겁 물을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걸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먹는 걸까. 정신없는 와중에, 팬드래건이 자기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그쪽은 이번 패치에서 뭐가 제일 마음에 안 드셨어요?"


이번 패치를 생각하니 나는 어느새 매운 것도 잊고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글쎄요, … 역시 지부 패치요. 제일 짧은 임무도 40분에, 긴 임무가 더 많이 나오니까 새 미션 보기가 불편해졌죠. 채용권 임무같은 것도 시간이 늘고. 갱신 기능이 삭제된 뒤로 유저들은 그저 확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쓸모없는 보상만 주는 임무는 아직도 너무 많고요."


"효율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손해 자체보다도, 그걸 개선이라고 포장하는 그게 더 문제같아요, 저는. 맨날 개선이 아니라 개악을 하니까 패치가 나올때마다 차라리 이전이 더 좋았다는 반응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저는 나유빈 기밀채용 출시가 더 맘에 안 들었어요. 개악은 한두번이 아니니까 그렇다 쳐도, 각성 캐릭터는 3개월에 2명 꼴로 출시하겠다는 말을 해놓고는 약속을 깼잖아요. 유저와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팬드래건도 덩달아 열받아서 열변을 토한다. 그렇게 서로 멀찍이서 접시만 보면서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 저 혹시… 박상연?"


"네? 아, 개새…"


"맞구나!"


말을 건 것은 정장을 입은 여자였는데, 보자마자 팬드래건 다음엔 이수연인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이며, 차갑고 세보이는 얼굴이며, 나이도 비슷해보이고, 결정적으로 오른쪽 눈에 두른 검은색 안대까지. 코스프레도 이렇게까지 비슷한 느낌이 나진 않을 것 같다. 팬드래건때보다 더 당황스러워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아, 이거요? 며칠 전에 눈병이 걸려서, 이왕 안대를 하는 김에 멋있게 검은색으로 했죠! 어때요, 막 이수연 같고 그렇죠? 박상연한테 스트라이크를 그냥…! 한방이면 어?! 한방이면 그냥…"


란다.


아, 생긴건 부사장 이수연인데 머릿속은 구 관리국 이수연이구나. 미친.


"그건 그렇고 둘이 불족발 챌린지 하시던 거죠? 왜 그렇게 떨어져 계세요? 같이 앉아요! 저도 불족발 챌린지 하러 온건데."


이수연이 무턱대고 팬드래건의 팔을 붙잡고 내가 있는 테이블로 끌고 와서 앉혔다. 그러고는 자기도 그 옆에 앉더니 불족발을 왕창 주문했다. 다 먹을 수 있나?


"근데 방금까지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


그렇게 우리 셋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림자 전당에 연습모드가 생겨야 한다던가, 나유빈의 인게임 퀄리티가 조금 부족하고 허전하다던가, 각성 유닛의 타임스톱 동안 타이머가 멈추게 해야 한다던가, 적성핵과 특수핵 교환비가 너무하다던가, 뉴비 육성을 막는 문제 중 하나인 초월 단계에 따른 레벨 제한을 없애야 한다던가, 육성을 위해 각종 재화 재료가 가장 필요한 뉴비는 오히려 난이도 때문에 낮은 난이도밖에 돌 수 없는 모의작전 시스템의 불합리함이라던가, 한계 융합 말고도 중복 구제 조치가 더 필요하다던가, 한계돌파 한 번에 융합핵 15개는 너무 많다던가, 유닛의 경험치 요구량이 너무 많아서 초반 육성이 힘들다던가, 기밀 채용권의 수급 방법이 너무 한정적이라던가, 퀄리티 좋은 bgm이 아깝지 않게 게임 내에 따로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건틀렛에서의 각성캐 제한이 필요하다던가, 물론 복각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스킨이 상시판매됐으면 좋겠다던가, 레이드와 다이브가 지부 미션에 의해 랜덤으로만 나오니까 이벤트 미션에 레이드 몇 회 완료 같은 거 안 넣었으면 좋겠다던가, 자유계약 등은 한 판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던가, 그로 인해 핫타임이 큰 의미가 없어 기간내 24시간 내내로 변경되었으면 좋겠다던가, 건틀릿의 강제화와 패작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다던가, 연습모드에서 뒤로가기를 누르면 로비로 가지는 점이 불편하다던가, 비사중학교라던가, 데미지 측정 가능한 더미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던가, 그림자 전당 진입 전 장비 파밍처가 필요하다던가, 태스크포인크의 사용처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던가, 10연차의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다던다, 그 시절 의복상품권이라던가, 뉴에이지는 명작이라던가, 뉴비를 위해 선별채용의 유닛 풀이 최신화가 되어야 한다던가, 빨간책 수급이 더 원활해져야 한다던가, 편성과 장비 프리셋이 있으면 좋겠다던가, 쿼츠 가치가 올라간 지금 상황에서 장비칸 사원칸 확장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가격 인하 내지는 크레딧 등의 무료 재화로 가능해지도록 변경되어야 한다던가, 옵션과 세트 옵션 맞추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라던가, 관리부 정렬과 필터 종류가 더 세분화되었으면 좋겠다던가, 지난 스토리 이벤트를 기간이 있는 복각이 아닌 상시로 열어준다거나 적어도 스토리 감상은 가능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던가, 스킬 텍스트가 더 명료해져야 한다던가 같은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면서 불족발을 맛있게 먹었다.



쓰고나니까 뭔지모르겠지만 마지막 내용이 핵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