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란스러운 것이 싫다.

 

27년이라는 내 짧은 인생 속소란은 곧 사건과 같은 단어였으니까.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야반도주를 한 날도.

 

혼자 남은 나에게 휘둘러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눈 뜨고 볼 수 없던 이웃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날도.

 

공립학교에서 부모 없이 자란 놈이라며 내 식판에 침을 뱉던 동급생에게 달려들던 날도.

 

그것이 자의던타의던 내 인생에 소란이 끼어든 날이면 여지없이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날 불쌍히 여기거나 하진 말았으면 한다.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진 못했다 한들 내겐 사회의 따듯함을 일깨워준 몇 명의 은인이 있고그들 덕에 지금은 제법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파트 타임이나 전전하던 내게 제대로 된 일자리를 소개해 주신 월세방 주인아저씨나.

 

레스토랑에서 내 성실한 태도를 높이 사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바에 날 추천해 준 매니저 형.

 

바텐더 일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말에 전문학교 동기가 강사로 있는 학원으로의 유학 루트를 알아봐 주신지금 일하는 바의 점장님 등.

 

매서운 사회의 찬바람 앞맨몸으로 내던져진 소년에게 뻗은 온정어린 손길 덕에 난 훌륭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근무 조건도 만족스럽고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뿐이다.

 

유학 자금도 차근차근 모으는 중이고다음 달이면 매니저로의 승진을 앞두고 있으니앞으로의 인생은 나름 탄탄대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만큼 현재 당면한 내 목표는 오직 하나뿐이다.

 

소란 따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조용하고 잔잔한 삶.

 

그러니까.

 

이런 거 말고.

 

그렇게이 몸이 또 한 번 중동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거지그때는 정말 아슬아슬했어.”

 

하아.”

 

다시 말하지만난 번화가의 한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예전 일하던 레스토랑의 매니저 형이 소개해 준 이 가게는 꽤 규모가 있는 바(Bar)샤레이드 지역 잡지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유명한 가게이다.

 

사람을 가려 받는 고급 바는 아니지만 앤티크 풍의 인테리어와 고즈넉한 분위기 덕에 손님들의 수준 역시 비교적 높았다.

 

최소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거나 옆자리 손님에게 집적대는 놈팽이들은 우리 가게에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진상이 어디 가게를 가려가며 찾아오던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날벼락이 바로 진상이거늘.

 

그리고 내 경험상 진상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이봐젊은이내 얘기 듣고 있나?”

 

바로 쉬지 않고 자기를 봐달라며 어필을 한다는 점이다.

 

배리어 아래에서 셰이커와 믹싱 글라스를 정리하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어쩌겠나나는 직원이고 저 사람은 손님인 것을.

 

예예듣고 있습니다휴전 중인 적대국의 고위 관료를 납치한 테러리스트를 홀로 소탕하셨다는 얘기 중이셨지요?”

 

제대로 듣고 있었구먼난 또계속 아래를 보면서 손을 꼼지락거리길래.”

 

나는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양손에 쥐고 있는 제조 도구를 선반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아무렴 제가 손님이 하는 말을 씹고 딴청을 피웠겠어요?, 하고.

 

맞은편에 앉은 손님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잔에 담긴 마티니를 한 모금 삼켰다.

 

그럼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

 

염병또 있어?

 

이내 손님이 손가락을 딱튀기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이건 내가 동아시아에 갔을 때 일인데.”

 

그 뒤로도 손님의 레퍼토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우주 위성 병기로 전쟁을 일으키려던 음모를 저지한 이야기.

 

핵테러를 벌여 유럽을 위협하려던 소련의 장성을 막아낸 이야기.

 

국가 간의 전쟁을 야기하고 그것을 독점보도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던 미디어 그룹 회장의 계획을 산산조각낸 이야기.

 

도대체 무슨 놈의 이야깃거리가 그리도 많은지.

 

나는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는 손님을 실눈으로 흘겨봤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가 하얗게 센 걸 보면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대 이상.

 

셔츠 위에 걸친 재킷은 낡았지만 잘 손질되어 퍽 고급스러운 티가 났다.

 

저거톰 포드잖아.

 

디자인이 기성품 같지는 않은데 설마 맞춤 양복인가?

 

생각해 보자.

 

술집에서 허풍이나 늘어놓는 진상이 주문 제작 양복을그것도 톰 포드 브랜드를 입고 있을 확률은?

 

난 눈앞의 손님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내렸다.

 

괜히 제조 도구랑 선반에 놓인 술병이나 만지작거리는데 더는 딴청 피울 껀덕지도 없었다.

 

하릴없이 손님과 마주하곤 대꾸를 건넸다.

 

그럼지금도 그 첩보 조직 같은 데서 일하시는 겁니까?”

 

아니지지금은 더 대단한 일을 하지.”

 

손님은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짓하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계를 지키고 있다네.”

 

요즘 세상 참 야박하군.

 

아무리 노망이 났다고는 해도 늙은이를 술집에 갖다버리다니.

 

카운터라도 되시나 봐요? 태스크포스에서 일하세요?”

 

하하아니지세상에 위험한 게 어디 침식체 뿐이던가.”

 

손님은 여기 좀 보라며 손가락으로 술잔 옆 데스크를 툭툭 두들겼다.

 

이런 밝은 곳에 쌓인 먼지는 알아보기 쉬워치우기도 쉽지이렇게 옷깃으로 한번 쓱 문지르면 그만이니까.”

 

이내 팔을 들어내 뒤쪽 진열장을 가리켰다.

 

반면 저렇게 그늘에 쌓인 먼지는 찾아내기 어렵지구태여 다가가손전등을 비추고걸레로 여러 번 훔쳐내야 청소가 되지 않겠나.”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 이거지.

 

.”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잔에 남은 마티니를 마신 손님은 내 시선을 느끼자눈썹을 들어 올렸다.

 

볼 일 있나?

 

난 고개만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좋은 술이 참 많구먼주인장 취향이 아주 훌륭해.”

 

그렇죠. 이래 봬도 업계에선 나름 이름 좀 날리는 분이시라는데. 한 잔 드릴까요?”

 

그 말을 들은 손님은 나를 보곤 빙긋 웃었다.

 

자네가 사는 건가?”

 

그럼 그렇지이 양반 설마 지금까지 마신 술값도 없는 거 아니야?

 

적선하는 셈 치고 한 잔 주고 보내자.

 

이야깃 값이라 하죠.”

 

하하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구만보자그럼뭐로 할까.”

 

턱을 괸 손님이 웅얼거렸다.

 

와일드터키 레어브리드 12벨루가 골드라인레밍 마르탱 엑스트라그리고 또.

 

이 아저씨보는 눈은 좀 있군.

 

그래저걸로 하지맥켈란 레어캐스트 블랙.”

 

저거 엄청 비싼 건데.

 

진상 한 명 치우는 비용이라 하면 싼 거지.

 

남은 건 내가 집에 가져가면 그만이고.

 

난 선반에서 위스키를 꺼내며 물었다.

 

온더락(On The Rocks)?”

 

아니니트(Neat)

 

위스키 마실 줄은 또 아는군.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글렌캐런 잔에 위스키를 3분의 정도 따라 건네자손님이 우선 향을 음미했다.

 

예술적이군.”

 

이윽고 한 모금 삼킨 다음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이 동네도 많이 변했구먼예전엔 좀 더그러니까활기찬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사신 적 있어요?”

 

아니저번 휴가 때 와봤지한 6년쯤 됐나?”

 

엄청 오래전이잖아.

 

난 술병을 정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하죠살벌한 소문도 돌고

 

소문?”

 

그냥 인터넷 사이트에 돌아다니는 괴담 같은 건데요즘 실종 사건이 꽤 있다나 봐요자기 친구랑 연락이 끊겼다는 사람이 제법 있던데.”

 

경찰은 별말 없나?”

 

저야 모르죠말했다시피 그냥 소문이니까요그래도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에 오가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는 해요.”

 

매출도 좀 떨어졌고 말이지.

 

웬 종교단체도 새로 생겼고지식과 진리가 어쩌니 하면서.”

 

그거야말로 이상한 것 없는 일이잖나대전쟁 이후 새로 만들어진 종교가 어디 한둘인가.”

 

그야 그렇지만요우리 집도 한번 찾아왔더라구요.”

 

손님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잔을 몇 번 두들기더니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위스키 저렇게 마시는 거 아닌데.

 

잘 마셨네이만 일어나보지동네 분위기 어수선하다는데 자네도 일찍 일찍 다니게나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손님은 지갑을 꺼내더니 100 크레딧 지폐 7장을 건넸다.

 

나는 돈을 받지 않고 되레 손님을 쳐다봤다.

 

저기너무 많은데요마티니 한잔이면 40 크레딧이면 되는데.”

 

손님은 얼른 가져가라고 손을 휘적거리며 씩 웃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 술을 얻어 마실 수야 있나남은 건 킵해주게다음에 또 마시러 오지.”

 

뭐야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네?

 

지폐를 받아 든 나는 병에 이름을 적어둘 요량으로 마커를 꺼내 들고 물었다.

 

그러시다면야.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손님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존 도(John Doe).”

 

때려치울까진짜.

 

 

 

마감을 끝마치고 정문 앞 셔터를 내리자 어느덧 새벽 1시가 훌쩍 넘었다.

 

사람 한 명 없는 거리는 휑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예전에는 이 시간대에도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인파가 꽤 있었는데.

 

요즘 좀 흉흉하긴 한가 봐.

 

대로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자머리 위 가로등이 깜박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왜 저래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불이 꺼질 때마다 어둠에 잠기는 골목길을 보고 있자니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을까 하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렇지만 여기 말고 큰길로 돌아가면 20분도 넘게 더 걸리는데.

 

피로에 전 몸과 어두컴컴한 골목길.

 

저울질을 해보니 빠른 귀가 쪽으로 추가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골목길로 접어들자 때마침 가로등이 퍽 소리를 내며 완전히 꺼졌다.

 

에이씨재수 없게진짜.”

 

괜히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한쪽 벽에 붙어 걸음을 재촉하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자 사람 같기도 하고.

 

취객인가?

 

라이트를 그쪽으로 비추며 큰 소리로 말을 걸어봤다.

 

거기 누구세요무슨 일 있어요?”

 

바닥에 토를 하고 있었는지 입을 벌리고 꺽꺽대던 남자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순간 움찔거렸다.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벽에 여러 차례 머리를 찍어대는 것 아닌가.

 

어디 다친 거에요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남자가 뒤돌아 나를 보았다.

 

눈이 풀리고 입가에는 침을 줄줄 흘리는 게 딱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라이트형제는독일의오토릴리엔탈이글라이더시험비행도중추락사한것을계기로비행기연구를시작했습니다독자연구가막히자미국스미소니언재단을찾아가과학자들에게자문을구했고이후오랜연구끝에1903년최초의동력비행기플라이어1호를타고짧은비행에성공하였는데.”

 

뭐야미친 사람인가.

 

남자가 내게 손을 뻗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영문 모를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미국의글렌커티스가라이트형제와유사한기술로뒤늦게특허를내며공장을차렸고두사람이자신의기술을도용했다며소송을걸었습니다라이트형제의조국인미국또한커티스의주장에힘을실어주었으며조국에실망한오빌은형윌버가죽은뒤프랑스영국독일을전전하며연구를이어나갔습니다.”

 

사내는 곧 고개를 뚝뚝 꺾더니 입을 쩍 벌리고 자기 목을 조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겁에 질린 내가 몸을 돌리고 달아나는데 무언가가 날아와 내 발목을 잡아챘다.

 

시야가 휙 돌아가더니 둔탁한 충격과 함께 등에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커헉.”

 

마른기침을 뱉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검은 촉수가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남자의 입가에서 촉수 몇 가닥이 뻗어 나와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게 보였다.

 

미친시발저게 뭐야.

 

곧 사내가 머리째로 촉수를 휘두르며 나를 끌어당겼다.

 

으악!”

 

보도블럭을 붙잡고 버텨보려 했지만애꿎은 손톱만 부러져 피가 흐를 뿐이었다.

 

곧 나를 붙잡은 사내가 내 등을 짓밟고는 침을 뚝뚝 떨어뜨렸다.

 

오빌이죽은뒤십년도지나지않아미국에서는라이트형제붐이일어났습니다2차세계대전의승리이후자국의이름값을드높일수단의일환으로미국은라이트형제를선택했고1955년두사람의위인전이출판되었습니다미국은영국에서전시중이던플라이어1호의반환을요구하였습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촉수가 달린 남자의 입.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골목길에 갑작스레 총성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니 저 멀리서 누군가가 한 손에 서류 가방을다른 손엔 총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게내가 일찍 일찍 다니라고 말하지 않았나젊은 친구.”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곧 옆에 다가와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저기.”

 

술집에서 만난 그 손님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촉수를 구둣발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봉변을 당했구먼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게나.”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손님이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금방 정리할 테니까.”

 

 

 

부러진 것 같지는 않은데금이 갔을지도 모르니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손님이 내 발목을 이리저리 만지며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통화를 마치고 태연히 총을 손질해 다시 가방에 집어넣던 그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애써 혀를 움직여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거다 진짜였어요술집에서 말한 거.”

 

고개를 푹 숙이고 실실 웃던 손님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렴난 허풍을 싫어한다네.”

 

아니비밀 요원이란 사람이 그렇게 아무 데서나 자기 얘기를 퍼뜨리고 다녀도 되는 거예요?”

 

손님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 있나? 자네가 어디 내 말을 진지하게 들었던가? 웬 술주정뱅이가 헛소리한다고 치고 한 귀로 흘려넘겼지.”

 

원래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자네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말이야.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오늘 교훈을 하나 얻어가는구먼술집에서 만난 허풍쟁이는 사실 굉장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겉보기로 판단하지 말 것.”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저기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냐니?”

 

아니보통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목격자를 끌고 가서 처리하고 그러니까요혹시 저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닌지.”

 

설마 죽이는 건 아니겠지기껏 구해줘 놓고.

 

규정대로라면 데려가서 기억 소거 조치를 해야 하는데기껏 새로 사귄 술친구를 백치로 만드는 것도 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에 내가 무심코 되물었다.

 

백치요?”

 

사소한 부작용이지.”

 

뭐가 사소해멀쩡한 사람 폐인 만들어 놓겠다는 게.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날 손님이 장난스레 웃으며 달랬다.

 

걱정하지 말게나자네가 뭘 아는 것도 아니고그저 사건에 휘말린 것뿐인데 그럴 필요까진 없지그냥 기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만 하면 될 거야비밀 잘 지키고.”

 

만약 떠벌리고 다니면요?”

 

그럼 내가 찾아가는 거지맥켈란 한잔으로 맺어진 우리 우정도 끝나는 거고.”

 

웃으며 말했지만그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손님이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냥 오늘 일은 재수 옴 붙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게나자네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이쪽 일에 관심 두면 피곤하기만 해자네가 잘 지내고 있어야 내가 또 맡겨둔 술을 마시러 갈 것 아닌가?”

 

그 술.

 

그거 점장님이 갖다 버리라던데요.”

 

아니비싼 술을 왜?”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세상에 누가 존 도(John Doe)를 사람 이름으로 써요당연히 장난친 거로 생각하죠가명을 댈 거면 좀 성의 있게 만드시던가.”

 

멋있지 않나바람처럼 왔다가바람처럼 사라지는.”

 

노땅 같다고요아재.

 

이거 큰일이군그 술 진짜 마음에 들었는데.”

 

턱을 짚고 끙끙대는 손님에게서는 조금 전 총을 쏘며 뛰어다니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간단한 일 가지고 뭘 저렇게 끙끙댄대.

 

그냥 대충 아무 이름이나 적어서 넣어둡니다어차피 얼굴은 제가 알고 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은 내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손님이 곧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모건아니지.”

 

뒤이어 빙그레 웃고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가져다 대었다.

 

퍼시벌헤이스팅스 퍼시벌(Hastings Percival)."

 

 

 

소란이 한차례 휩쓸고 갔어도 내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병실에 찾아와 어려운 말이 잔뜩 적힌 서류 더미에 서명을 받아가며 이런저런 협박을 늘어놓은 게 전부였다.

 

가끔 출퇴근 길에 신문 가판대나 골목길 어귀에서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선글라스 낀 양복들이 날 지켜보긴 했지만.

 

어디 끌려가거나 하진 않았으니 다행이지.

 

난 여전히 술집에서 칵테일을 만들고손님들의 사소한 고민거리를 들어주며 살고 있다.

 

퇴근길에편의점에서 간단한 안줏거리나 챙겨다가 집에서 염가에 사둔 양주를 홀짝이고.

 

자기 전에 핸드폰으로 드라마나 유튜브 영상을 보며 낄낄대곤 하는 평범한 삶.

 

그저 가게 선반에, H.Percival 이라 적힌 맥켈란 레어캐스트 블랙 한 병 위로 먼지가 쌓여갈 뿐이다.

 -----------------------------------------------------------------------------------------------------------------------------------------------------------------------------------

*존 도(John Doe) : 영어권 국가에서 신원 미상의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


**헤이스팅스 퍼시벌(Hastings Percival) :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속 등장인물인 아서 헤이스팅스. 탐정인 에르퀼 푸아로의 친구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왓슨 격 인물 +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일원 퍼시벌. 성배의 기사라고도 불림. 새디어스 모건의 본명으로 추정됌.

 


오리진 1주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