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기자조선]을 침략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자 곧 그만두었다.. 조선후가 예를 시켜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이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곧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라고 전한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연나라에 이어서 고조선이 칭왕을 하자 양국간의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결국 3세기 초에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침공함.

이 전쟁으로 인해 고조선 세력은 요동땅을 빼앗기고 청천강(살수강) 이남으로 후퇴함.

긍정적인 면도 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청동검의 양상이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교체되었고,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한반도로 옮겨지면서 고조선식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 남부에까지 퍼지게됨. 고조선의 문화와 인구의 남부 유입은 전에 비해 더욱더 활발해졌는데 이는 세형동검의 분포가 한반도 중남부에도 활발히 퍼져 있는것을 통해 유추 가능함.

고조선-연 전쟁은 고구려때까지 요동의 주도권을 중국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한계점이 있지만 고조선이 한민족의 시조로 자리잡는데에 기여했다는 의의도 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