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증오는 상대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허락할 만큼 녹록치 않다. 정의, 사랑, 도덕 따위의 역겨운 소리를 지껄이는 원수를, 영혼의 끝자락부터 조각조각 부숴 정신적으로 살해한 뒤에야 비로소 육체적 죽음을 허락할 수 있을 터.

 “앉으세요.”

 스스로가 먼저 상석에 앉은 파트리샤는 크로첸을 향해 손을 들어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크로첸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고, 이는 파트리샤의 다음 말을 이끌어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내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예. 충분히 강해져서, 이 손으로 당신을 찢어죽일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시간이. 당신이 트리스테인에서 그렇게 빠르게 정지작업(整地作業)을 해치울 줄은 몰랐거든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는 밀레시안은 대단히 위험하지요. 역시 에린의 수호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고서 파트리샤는 생긋 웃는다.

 “이제 좀 흥미가 생기지 않았나요? 당신이 내게 시간을 주는 대가로,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내어줄 것인지. 궁금하지요? 그렇다면 앉으세요. 만찬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모처럼 준비한 음식이 식어가고 있는걸요.”

 크로첸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아직 아무 것도 놓이지 않은 말끔한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조용하고 우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두려움을 알아라, 포워르. 희생을 각오한다면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단숨에 끝맺을 수 있다. 내게서 영원히 도망칠 수 있을 성 싶으냐?”

 “하지만 그 희생이 달갑지는 않을 텐데요?”

 이렇게 말하는 파트리샤는 크로첸 또한 자신의 신격을 감지했음을 알고 있었다. 평소 그 웃기지도 않는 책임감과 도덕심 때문에 신의 힘, 그리고 창조신의 유산 브류나크를 무기로서 휘두르지 않는 게 크로첸이었지만, 상대가 신격이라면 신의 힘을 아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는 인질이 잡혀있다고 해서 인질범의 요구에 계속 따르기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 만큼의 경험이 있고, 해야만 할 일이라면 아무리 꺼려지는 일이라도 행동을 늦추지 않을 현명함도 가지고 있다.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해 평소부터 지대한 관심으로 정보를 수집해왔던 파트리샤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질은 그 규모를 떠나 크로첸의 행동을 막을 결정적인 수단이 될 수 없다. 다만, 그 인질의 해방이 조건이라면 어느 정도의 교섭…그리고 기분 좋은 희롱까지는 가능할 것이었다. 파트리샤는 이를 위해 잔인한 여흥을 준비해두었다.

 크로첸은 무겁게 묻는다.

 “그 말은 즉 그대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겠다는 뜻인가?”

 “바로 그렇답니다.”

 서큐버스는 밀레시안의 복잡한 시선을 즐겼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결코 정상적인 만찬은 아닐 거라 각오하고 있긴 했으나, 크로첸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트레이에 은반을 담아 내온 요리사는 왕실의 고용인답게 정중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접시들을 올려놓았다.

 최고의 요리사가 최선의 실력을 발휘한 요리들은 좌우를 구분하여 깔렸다. 좌측은 일반적인 요리였으되, 우측은 왼 편의 평범한 요리를 흉내 내어 끓이고 굽고 삶아낸 인간의 육체였다. 좌우 모두 겉모습만으로 재료를 알 수 있도록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여 조리된 음식들이다.

 “우리 모든 노예들의 영을 지배하시는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신 주 파트리샤께서 특별히 명하시어, 빈객(賓客)을 위해 제 아내와 딸을 조리했습니다. 부디 입맛에 맞길 바랍니다.”

 조리장의 예의바른 말은 크로첸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파트리샤는 분신을 이루는 어둠의 에르그가 흔들리는 것에 놀랐다. 밀레시안의 격노가 실내의 모든 힘의 흐름을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엄청난 분노는 파트리샤를 기쁘게 했다.

 “드세요.”

 시선 닿는 곳이 부서질 것 같은 크로첸의 시선을 받아내며, 파트리샤는 다시 한 번 권했다.

 “남김없이 드세요. 알비온 해방의 첫 번째 조건이니까.”

 크로첸은 이를 악물었다.

 식기는 매끄러운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오래도록 망설인 끝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을 때, 문 밖 먼 곳에서, 작지만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한 절규가 들려왔다. 허우적거리는 신음과 비명 사이에 누군가의 이름이 두어 개 섞여있다. 피 끓는 애절함으로 부르는 그 이름은 아마도 이 식탁에 올라온 요리의 재료가 되었을 아내와 딸의 이름일 터였다. 크로첸은 식기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 적당한 때를 보아 조리장의 정신을 해방한 파트리샤는, 그러고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드시지 않을 건가요? 시간을 끌면 사람이 죽어요?”

 잠시 후 비명이 잦아들었다. 크로첸은 깊은 심호흡을 몇 차례 반복하다가 식기를 다시 거머쥐었다. 그것을 본 파트리샤는 흡족해하며 자기 몫의 식기를 들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하고 다시 조용하며 그 이상으로 패악스러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극도로 대조적이었다. 동남(童男)의 피를 음료로 하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맛보는 행복한 얼굴의 포워르와, 요리를 씹어 삼키면서도 이따금씩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밀레시안.

 준비된 양이 적지 않음에도 두 사람은 착실하게 접시를 비워나갔다. 한 사람은 미식의 즐거움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로지 책임감만으로. 파트리샤는 종종 즐거운 어조로 밀레시안에게 식사방법에 대한 조언을 주곤 했다.

 “아, 그건 연골도 먹어야 하는 거에요. 오도독거리는 식감이 아주 고소하지요.”

 그녀의 조언은 대체로 정상적인 요리 쪽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조언이 더해질 때마다 크로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토록 괴로운 시간이 지나간 이후, 파트리샤는 말끔하게 비워진 접시들을 보고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착한 아이군요. 포크와 나이프를 구겨 잡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크로첸이 이 갈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날 조롱하기 위해서만 준비된 자리는 아니었을 텐데?”

 “정확하게는 당신이 믿는 도덕이 무가치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자리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꼭 목숨을 빼앗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당신의 영혼을 꺾어버리기 위해서.”

 파트리샤는 피가 고인 잔을 여유롭게 흔들며 부연했다.

 “지금 직접 먹어봤으니 한 번 말해보세요.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준비된 요리들이,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었나요? 재료가 인간이라는 거부감을 차치하고서 보면 사실 별다를 게 없지 않던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도덕이란 인간의 것이고, 인간 위주의 편의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말이에요. 도덕이 감싸는 건 사실 인간뿐이지요.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편협한 궤변의 모음집. 그것이 당신네들의 도덕이에요.”



개씹 명작입니다.


연중한거 빼고요.


 CYOA 이야기: 정신적으로는 크로첸과 비슷하더라도 무력으로는 훨씬 약한 용사 플레이가 가장 이상적인 용사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