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허억...!?"


헛숨을 들이키며 눈을 뜬 나는 비몽사몽한 정신을 부여 잡으며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니, 힘겹지가 않았다.


마치 내가 조금의 무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바람 같았다.


눈을 뜨고 있으나, 암전된 듯 짙게 내리깔린 어둠이 시야를 방해하여 눈살을 찌푸린 나는 눈 앞의 광경에 집중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어디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양탄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는 자신이 쿰쿰한 냄새가 자욱한 고딕풍 분위기를 자아내는 집무실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주위에는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우아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있었고, 시야의 정면에 있는 책상과 자신을 향해 뒤로 돌려져 있는 의자에 시선을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돌려진 의자가 정면으로 향하면서 드러난 이름 모를 존재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감히 무어라 표현하는 것조차 주제넘는 평가질로 여겨질 정도로 그저 아름답다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 미소녀는 고운 흑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나는 창세의 마신 '■■■■'라고 해."


분명 나에게 이름을 밝히는 것 같아도 그 부분만 묵음 처리가 되는 괴이한 미소녀의 분위기를 따라잡지 못한 나는 그저 멍청한 어투로 의문감을 표할 뿐이었다.


"네...?"


"아, 창세라는 호칭을 달았는데 마신인 점이 궁금해서 그래? 뭐, 별거 아니니 신경쓰지마. 그것보다는 갑자기 이런 공간으로 불려 온게 더 궁금하지 않아? 분명 방금 잠들기 위해서 눕고 있지 않았어?"


"그, 그런 것 같기도 한데...뭐랄까...제가 이곳으로 불려지기 전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한게 떠오르지 않아요. 생전의 지식은 분명히 있는데...그것만 누가 가져간 것 같은..."


자신을 마신이라고 칭한 미소녀의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느껴지는 의문이 눈 앞의 그녀가 한 일이 아닐까 싶어 말 끝을 흐린 나는, 자신을 의심하는 내 언행을 들은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짐짓 화를 내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걸 듣게 되었다.


"뭐야? 이 내가 친히 너에게 축복을 내려주려고 하는 상황인데, 의심하는거야?"


"아, 아니...그게 아니라..."


"흥! 내 기분이 나빠진 것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룰테니 각오하도록 해. 각설하고, 너는 이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능력을 골라서 새로운 육신과 이름을 가지게 될거야."


"...너무 급전개 아닌가요? 게다가 저 따위에게 축복을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는 현대에서 보람찬 삶을 살고 있던 흔해빠진 일반인인데...?"


"어차피 네 원래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그딴게 중요해? 그리고 네 기억을 내가 조작한게 아닐까 싶은 의심을 하는건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었어. 너를 이곳으로 온전히 부르려고는 했으나 중간에 누군가가 장난질을 친 것 같아..."


"......"


그 말을 끝으로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길어 보이는 다리를 꼬운 마신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단순해. 네 영혼이 흔해빠진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고 칭하기에는 너무도 밝게 불타고 있어서 내 눈에 띄었거든? 명계의 ■■■■■■■이 관리하는 사신들은 일처리를 좀 잘 못한달까? 그래서 친히 이 ■■■■님께서 너에게 축복을 내려 네 영혼에 걸맞는 삶을 살게 해줄까 하다가 결심한거야."


"...그렇군요. 가, 감사합니다?"


"아하핫! 감사 인사는 됐어. 너에게는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지대한 축복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찌 보면 심심풀이에 불과 하거든. 아무튼 이만 잡설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가자고..."


천천히 말 끝을 흐린 마신은 손가락을 튕겼고, 그러자 나와 그녀 사이의 허공에 반투명한 메시지 창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비어있는 메시지 창이 글자로 빠르게 채워져 나가는걸 보여 주었다.


"네 영혼 점수에 내 축복을 더하여서 본래의 영혼 보다 강인한 힘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거야. 차원 CORD-792M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였던 너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게임 캐릭터를 설정하는 기분으로 고르게 해줄게."


"아, 네..."


"일단 첫번째 화면이야. 보면 알다시피 네 영혼 점수를 소모하지 않은 채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나의 축복이니 감사히 여기려무나."


[마신 ■■■■의 축복]

|마신의 가호[EX]

|항거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기간이 너무 오래되면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창세의 지식 • 언어[EX]

|세상의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통달하게 된다.

|상태창[EX]

|영혼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능력과 특전, 패널티 등의 확인이 가능하다.


"이것들만 있어도 뭐가 뭔지 모를 세계에 떨어진다 한들 괜찮을 것 같네요."


"우후후...당연한 것 아니냐? 이 ■■■■님을 뭘로 보는게냐? 아무튼 설문조사 같이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시간도 넘쳐 흐를 정도로 많으니 네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모습과 힘을 신중하게 골라보도록 하거라."


"네."


몇몇 부분의 기억만 전혀 나지 않아도,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보람찬 삶을 살고 있었다 한들 그래봤자 소시민이다.


특출난 재능 하나 없이 그저 남들 보다 더 아래의 위치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느낌의 삶 보다는, 눈 앞의 마신이 기본적으로 내게 준 힘만 가지고도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러면..."


메시지 창에 집중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말 끝을 흐린 나는 메시지 창 너머의 마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내가 원하던 나의 모습을 설정하는 것에 푹 빠져 들고 말았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르겠다.


마신이 앉아있는 의자 너머에 있는 창문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유성이 끊임 없이 떨어져 내릴 뿐인데다가 이 공간 안에서 만큼은 생리 현상이 전혀 필요 없었기에 모르는게 당연할 지경이었다.


한참동안 메시지 창에만 시선을 둔 채 동공과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내가 마침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본 마신은 가벼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다 골랐느냐?"


"네.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 자신의 새로운 삶의 육신에 대한 설정을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그게 무슨...?"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든 대가를 치룰 것이라고 했었지? 아하핫! 네가 다시 태어날 새로운 육신에 여러 패널티를 달아 두었으니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게 어떤가?"


"......"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는 마신의 말에 나는 자신을 마신이라고 소개 했던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던 실책을 곰씹으며 다시 한 번 상태창을 열어 그녀가 조작한 뒤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상태창]

|이름 : ■■■

|종족 : 수인[늑대]

|성별 : 여성

|메인 클래스 : 무직

|서브 클래스 : 무직

|근력 : D-

|체력 : SS

|민첩 : B

|지혜 : E

|매력 : SSS

|행운 : E

|마력 : X

|성력 : X

|칭호 : X


[스킬창]

|마신의 가호[EX]

|항거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기간이 너무 오래되면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창세의 지식 • 언어[EX]

|세상의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통달하게 된다.

|불로불사[SSS]

|늙지 않게 되며, 자연적인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끓어오르는 피[SS]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하루만에 모든 상처가 회복되는 재생력을 가지게 된다.

|전투광[SS]

|전투를 무수히 많이 경험할수록 드래곤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강해진다.

|경국지색[S]

|인간형 생물체들 중에서 최상위에 해당하는 미모를 가지게 된다.

|완전한 신체[S]

|식사와 수면, 생리 등 기본적인 신체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여성[S]

|항상 깨끗하고 완벽한 보지가 어떠한 물건이든 꽉 조일 정도로 받아 들이게 되며 임신의 통제가 가능해진다.

|고유 보구 • 미정[S]

|자신의 영혼에 연결되어 언제든 소환이 가능한 무기의 사용이 가능하게 된다.

|무기의 달인[S]

|모든 무기에 대한 재능과 전투에 관련된 것의 습득 속도가 매우 빨라지게 된다.

|완전 회복[S]

|정신과 육신의 상태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한다.[6시간마다 1회&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시 자동 사용]

|상태이상 무효화[S]

|질병, 허약, 최면, 지배, 조종 등 부정적인 상태이상을 무효화 한다.

|늑대인간의 피[A]

|어둠 속과 달빛 아래에서 신체 능력이 더 강해진다.[보름달 아래에선 모든 스탯이 최소 A로 상승]

|살기 감지[B-]

|적대적인 타인의 살기를 감지할 수 있다.

|예민한 감각[C]

|오감이 더욱 뚜렷하고 선명해진다.

|확장된 시야[C]

|일반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을 보도록 시야를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임신 통제[C-]

|본인의 의지로 임신 가능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야생의 적응[C-]

|수인으로서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동물 친화[D]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며, 명령을 내리면 가능한 선에서 실행 해주려고 하게 된다.


[패널티]

|발정기[♥]

|수인으로서 한달마다 마지막 날에 섹스 생각만 하게 되는 발정기가 오게 된다.

|음란한 페로몬[♥]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대상으로 성적인 흥분을 하게 되는 페로몬이 분비 된다.

|암컷의 목소리[♥]

|놀라거나, 아프거나, 맞을 시 무심코 야한 신음 소리를 흘리게 된다.

|성욕 2배[♥]

|성적 욕구가 일반적인 정상인의 2배가 된다.

|감도 2배[♥]

|신체의 민감도가 일반적인 정상인의 2배가 된다.

|민감한 유두[♥]

|유두를 세게 꼬집히는 것만으로 약한 절정에 다다른다.

|허접 삼류 보지[♥]

|매우 약한 상대일지라도 보지에 자지가 쑤셔지면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항문이 약점[♥]

|항문이 보지와 마찬가지로 민감한 성감대가 된다.

|마조히즘[♥]

|받게 되는 모든 고통이 3배의 쾌락으로 전환되며, 성적으로 지배 되는 것과 모욕이나 굴욕에 흥분하게 된다.

|스팽킹의 노예[♥]

|엉덩이를 맞으면 쾌감을 느끼며 보지와 항문을 꽉 조이게 된다.

|샌드백 희망[♥]

|도구처럼 사용 당하거나 구타 당하는 등 성적으로 사람 취급 받지 못하면 성적 흥분을 느끼게 된다.

|성희롱 페티쉬[♥]

|성희롱을 당하는 것에 대한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성희롱 선호[♥]

|성희롱을 당하면 왠지 모를 안정감과 느긋함을 느끼며 저항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노출증 변태[♥]

|노출,추태 등 남에게 들키거나,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 성적 흥분을 느끼게 된다.

|강간 페티쉬[♥]

|자신을 억지로 강간해주는 것에 대한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스톡홀롬 증후군[♥]

|자신을 범하거나 성희롱 한 상대의 성적인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된다.

|청간 페티쉬[♥]

|야외에서 하는 성행위에 대한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질식 페티쉬[♥]

|성관계 도중 목을 졸리는걸 갈구하게 되며, 당했을시 성적인 쾌감이 3배 증가하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

|자지를 보면 신체가 섹스할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자지 냄새 중독[♥]

|자지의 냄새가 진할수록 빨고 싶다는 주체못할 일시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액 중독[♥]

|정액의 맛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보다 좋아지게 되서 갈구하게 된다.

|거근 숭배[♥]

|큰 자지를 가진 상대방의 성적인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진다.

|짐승의 암캐[♥]

|개에 대한 성욕이 이성을 대할때와 같은 수준으로 생기게 된다.


"히익..."


새로이 생겨난 내용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안색이 파리해진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마신을 바라보았다.


패널티는 종족을 수인으로 정해놔서 생긴 발정기 뿐이었으나, 무더기로 생겨난 것과 동시에 겉만 번지르르한 이름의 '완벽한 여성'이라는 쫀득한 보지를 가지게 되는 스킬을 얻은 나는 마신을 향해 항의를 하려고 했지만.


지금까지의 장난스런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 싸늘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는 마신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게 된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왜, 또 이 몸께 무어라 말을 할터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좋은게 좋은거 아니더냐? 애초에 남자나 여자로서의 인식이 전무한 너이니 금방 적응할게다. 그럼, 볼 일은 전부 끝난 듯하니 이만 내 집무실에서 나가보도록 하거라."


"...네."


잠에 들려고 하는 순간, 이 괴이한 곳으로 이동되어 생전의 기억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이름과 성별이라는 정체성을 잃게 된 나는 더 나아가 볼 일이 끝나자마자 관심을 거두는 제멋대로인 마신의 태도에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칭호 부터가 창세니 뭐니 하는 녀석이라 괜히 반항 해봤자 한 줌의 재가 되는 엔딩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에 얌전히 집무실 밖으로 발을 내뻗은 나는 형형색색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꺄아아악!?"


그리고 소용돌이에 몸이 빨려 들어가게 된 나는 그저 인영의 모습을 띄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며 내가 바라못지 않던 모습으로 변태 하는 광경을, 정면의 유리 조각 같은 파편들이 한데로 뭉쳐 거울과 같은 형상을 띄며 비춰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완전히 재탄생하게 된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나르키소스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짐승의 갈기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붉디 붉은 장미에 물을 들인 듯한 색에 길이는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인간의 귀가 있어야 할 장소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대신하여 머리카락 위로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낸 짐승의 귀가 과시 하듯 나있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다가는 빨려 들어 갈 것 같이 매혹적인 자주빛을 띄고 있는 눈과 도도해보일 정도로 치켜 올라간 눈매, 남녀노소가 보자마자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빼어난 미모.


일생동안 운동을 하며 살아 온 이가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자잘한 근육과 배에 8자 복근이 있는 것 치고는 단언컨대 여성...아니, 암컷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젖가슴은 크기 만큼 풍만한 부피를 자랑하기에 약간 내려왔으나 물방울의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다가 엉덩이는 머리 보다 커서 이상적인 여성의 육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 였다.


게다가 일반적인 여성이였다면 흠이라고도 볼 수 있는 180cm의 키에 진한 갈색을 띄고 있는 피부색 조차 주변의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볼 수 없는 모델로서의 매력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완전히 달라진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을 쏙 빼놓고 있던 나는 마신과의 첫 대면 이후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을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2화

쏴아아아-.


"으윽..."


전신에 떨어져 내리는 굵직한 빗줄기로 인해 짧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눈을 뜬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힘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죽음의 경험 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불로불사와 끓어오르는 피 같은 특성을 골라서 월등하게 뛰어난 내구도를 지닌 나는 빗물로 떨어질 체온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 보아 현재 상황을 파악해보기로 하였다.


한때는 오아시스 였었던 듯 몇 그루의 야자수 나무가 물이 범람한 곳에 쓰러져 있었고,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녹아들어 축축해진 진흙으로 그득한 허허벌판인 곳이라는걸 곰씹은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시야 아래로 비춰져 보였기에 옷을 구하고 사람이 있을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될까 싶은 고민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쏟아져 내리는 비에 축축히 젖은 땅 외에는 그 무엇도 없는 장소에서 옷 대용으로 삼을만한 것은 없었기에 나는 일단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가며 자신의 상황을 정리 해보기로 하였다.


일반적인 인간의 신체 였다면 금방 저체온증으로 죽을 정도로 차갑고 시린 빗줄기가 전신을 강타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죽음 만큼은 겪기 싫었던 내가 단단히 작정하고 고른, 기본적으로 생명체가 항상 마주해야 할 생명 유지 행위 같은걸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특성들을 잔뜩 고른데다가 상태 이상 무효화와 완전 회복 같은 것까지 획득하여 지금 당장 매우 강력한 괴생물체와 전투하는게 아닌 이상은 이렇다 할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도 잠시.


약 30분 정도 걸었을 때에 나는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이 얻은 이 육신은 먹지도, 자지 않아도 되지만...


"좆같이 춥네..."


더위나 추위, 배고픔이나 목마름 등은 평범하게 느껴지는지라 점차 허기가 지고 살이 에릴 정도로 추워 짧은 욕설을 내뱉게 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걷는 것도 지루하다고 느껴질때 쯤부터는 고개를 들어 마시지 않아도 될 빗물로 목을 축이며 다리를 끓임 없이 움직였다.


더 나아가 체력이 부족할 일은 없는 완벽한 신체를 이용하자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달리며 차가워진 신체를 조금이라도 달아오르게 하였고, 마침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벌판에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그래서...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마을 같은거라도 볼 수 있는거지...?"


지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리는 굵짓한 빗줄기로 인해 시종일관 어두운 주변으로 인해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에 대한 파악도 하지 못하는 상태인 나는 이젠 얼마나 뛰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였다.


그동안 봐온 것은 끝이 없나 싶을 정도로 장대하게 펼쳐진 진흙 벌판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축축한 벌판에는 게 라던가, 조개 등 나름 눈에 띄는 생명체가 있기 마련이건만.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그딴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저 달릴때마다 움푹 들어가는 진흙의 감촉 뿐이었다.


"정신 나갈 것 같네..."


괴이하게 생긴 괴물이라던가, 허기짐과 입가심 대용으로 씹어 먹을 게 조차 보이지 않는 벌판을 그저 뛰고 또 뛰자니 정신적으로 지쳐서 이제는 걷기 시작하게 된 나는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그런데 도대체 몇시에 떨어진거지? 비가 계속 내려서 아침인지 밤인지 조차 모르겠네..."


그래도 나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동했다는 느낌이 든 상태인 나는 혼잣말을 얼마나 중얼거린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처음 떨어진 장소로 돌아가자니, 여기까지 이동한게 아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괜시리 정반대 방향으로 이동했으면 얼마 가지 않아 마을 비스무리 한거라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은 후회가 들었다.


걷고, 달리고, 계속해서 이동하며 이젠 그저 다리를 움직일 뿐인 기계가 된 기분으로 멍하니 앞으로 나아간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오...!?"


탄성을 내뱉으며 조금이라도 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운 아미를 찌푸린 나는 이름 모를 형체에 시선을 집중했고, 이내 그것이 전 생에서 보아왔던 '자동차'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기계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빗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동차를 향해 있는 힘껏 진흙을 박차고 달려나가며 소리 쳤다.


"저기요오...! 여기 사람 있어요...!"


다행히도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이리저리 휘적이며 소리치던 나는 내 존재를 인식한 자동차가 점차 속도를 줄인 끝에 내 앞에 당도하는 것을 마주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


전 생에서 봤던 덤프 트럭의 근미래식 업그레이드 버전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자동차 내부에 있을 사람은 잠시 내 행색을 살피듯이 매우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쏴아아아-.


하지만 미친듯이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빗줄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받아들일 뿐인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것 같다고 판단한 누군가는 결국 자동차에서 내려 말을 걸어 왔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차에 타라!"


"아, 네."


잠시 후 무사히 자동차의 운전석 바로 옆 좌석에 착석하게 된 나는 차 내부의 히터인 듯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있는 에어컨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댄 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중이였다.


자신을 태우는데 들인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곧장 엑셀을 밟아 진흙밭을 나아가기 시작하는 운전석의 남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인 특유의 헤어 스타일인 레게 머리를 하고 있었고, 한가지 특이사항으로는 왼쪽 눈이 있을 장소에 의안으로 추정되는 기계가 장착되어 있었다.


따스한 바람과 자신이 건네어 준 겉옷을 둘러서 노곤해진 나와 이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전방에 시선을 둔 채 넌지시 말하였다.


"너, '낙오자'지?"


"...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내린 낙오자가 아닌 이상에야...'헤리온'의 정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을리가 없잖아. 다행히 나와 마주쳐서 살긴 살았지만...수인?이니까 그리 대접은 좋지 못하겠군."


"......"


"특히 생명의 은인에게 자기소개도 안한다면 말이야."


"아, 아...! 그, 저는 카린이라고 해요."


[진명 : '카린'으로 등록되셨습니다.]


[새로운 스킬 - '창세의 마신의 화신[EX]'을 획득하셨습니다.]


[특정 상황에 따라서 퀘스트가 생성되며, 이를 통해 보상 혹은 패널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이름 모를 남성에게 이 세계에서 쓰일 내 이름을 밝히자, 시야에 반투명한 메시지 창들이 떠오르게 되어 읽어보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들어서지 않았다.


"나는 파이토스라고 한다. 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거다만...'랜드 데이'가 뭔지 아나?"


"...아니요."


"낙오자가 맞군. 지금 많이 당황스러울거야.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착하다고 볼 수 있으니 너를 도와주도록 하마."


"도와...주신다고요?"


생판 처음 보는 나를, 그것도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이들을 통칭 '낙오자'라고 부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자가 다짜고짜 도와주겠다느니 뭐니 하니 당연하게도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하하!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 이 제오닉 대륙의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면 경계심을 좀 풀려나? 그러니까..."




•《》•《》•《》•《》•《》•《》•《》•《》•《》•《》•《》•《》•




시간이 흘러 파이토스라는 자가 나에게 알려준 제오닉 대륙에 대한 정보를 풀어 보자면 이러했다.


제오닉 대륙력 2146년, 전 인류는 불길한 별의 기운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상륙의 날 - 랜드 데이'라고 불리우는 그 날, 청아한 푸른 빛을 띄는 바다가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불길하기 그지 없는 검은 바다에서 지상으로 올라 온 괴생명체들로 인해 수많은 연안 도시가 괴멸했다.


각 나라가 지닌 막강한 군력으로 사건은 얼추 마무리 되는 듯 했으나, 괴생명체들이 제오닉 대륙에 끼친 피해는 무지막지 했으며 녀석들은 끊임 없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또 올라와 자연스레 약소국들은 전부 멸국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강대한 힘을 가진 국가들은 서로 힘을 합쳐 괴생명체들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오리엔트 연방'을 결성했다.


제오닉 대륙 경제 상호 지원 동맹국 연방 - 통칭 오리엔트 연방은 랜드 데이로 인한 난민을 흡수하여 거대해진 모아드 제국에 의해 결성된 공동체이며 복수의 정부가 자치 단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랜드 데이 때 괴이한 지각 변동 마저 일어나 현재는 검게 물들은 바다로 인해 떨어져 있는 각각의 나라들의 영토가 움직여 합쳐지게 되었고, 정 가운데에 속한 모아드 제국을 필두로 수많은 속국들이 그 주위를 둘러 싼 상태의 대륙은 마치 검게 물든 바다에서 튀어 나오는 괴생명체를 막기 위한 인류의 미래와도 같았다.


모아드 제국이자 오리엔트 연방국의 수도와 괴생명체...아니, '비스트'를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연안 국가들의 사이에는 피난 지구가 위치 해있는데, 피난 지구들 중 가장 유별난 곳에 위치한게 바로 현재 우리가 가고 있는 헤리온이라고 한다.


내가 강인한 신체가 없었다면 진즉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정도로 차갑고 굵은 빗줄기가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헤리온은 피난 지구들 중 가장 발달한 도시임과 동시에 모든 나라들과 비교해도 기이학적인 곳이라고 한다.


무기 제조 회사인 미르 코퍼레이션이 도시를 장악하여 비스트로 부터 지켜주는 대신, 여러 나라들 중 계급 구분이 확실한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넓디 넓은 도시의 특정 부분을 위로 올라갈 수 있게끔 계층이란 것을 만들어 상류 계층이 하류 계층을 지배하는 구조였고, 랜드 데이 이후로 가끔씩 제오닉 대륙에 떨어지게 되는 낙오자들이 주로 헤리온의 주변에 떨어지게 되어 그 인구가 모이다 보니 끝없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비가 내리다 보니 낮밤 구분 없이 밝은 네온 사인이 켜져 있어 세간에서는 '라이트 시티'라는 이명까지 가진 헤리온에 자신이 아는 해결사에게 데려다 준다던 파이토스가 말하기를.


지상으로 올라 온 비스트들의 심장에는 알 수 없는 광물이 섞여 있었는데, 그 광물을 해석해 본 과학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에너지 원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 - 에테르가 담겨 있어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과학 발전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에테르가 담긴 광물을 이용하면 인류 역시 비스트에 맞설 정도로 강해지지 않을까 싶어 오리엔트 연방이 주도하는 인체 실험이 벌어졌다.


그 결과,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인 '솔라리스'.


심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살아 있는 광물이라 불리우는 솔라리스의 주변에 몰려 있는 비스트들을 처리하고 솔라리스를 채굴하는 프로토 타입의 '마이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스트의 불안정한 솔라리스를 통해 마이너로 각성한 이들의 첫 채굴로 더 강하고 다양한 테리토리를 보유한 마이너들의 탄생이 앞당겨졌지만.


프로토 타입의 마이너들은 불안정한 비스트의 솔라리스로 테리토리를 쓰다 보니 자신을 제어 하지 못하고 광화하여 별칭 '딜루젼'이 되어 랜드 데이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다시 한 번 일어난 참극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이너를 비스트와 동일시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연안 도시에만 살게 된 마이너들은 개돼지 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고, 현재의 연안 도시는 마이너와 빈곤한 사람들이나 범죄자가 판치는 범죄의 도시나 다름 없게 되었다.


인류사에 재앙이 판쳐 혼란하기 그지 없는 시대는 그래도 시간이 흘러 나름의 안정화가 된 현재.


그래도 오로지 지닌 힘과 돈, 권력만을 내세우는 헤리온에서는 마이너의 취급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인류가 보기엔 괴물인 마이너일지라도, 여러 세계에서 오게 된 이종족 낙오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지구의 근미래 버전 인류들이 공상 과학에서 나타날 법한 괴물들로 부터 싸우기 위해 더더욱 발전한 세계에서 낙오자라고 불리우는 판타지 세계의 종족이 한데 뒤섞인 도시인 헤리온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나마 나에게 있어서는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한다.


"그런데 헤리온이 아니어도 다른 나라들이 많다고 쳐도 대륙 이곳저곳에 비스트라는 괴물이 있는데, 파이토스씨는 왜 이런 큰 트럭을 가지고 위험하게 이동하던거 였어요?"


"나는 비스트의 부산물을 수획해서 파는 걸로 돈을 벌고 있거든. 수익이 꽤나 짭짤한데다가 나름의 인맥을 얻어 나쁘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근데 넌 한 성깔 할 것 같은 눈매를 가진 주제에 왜 이렇게 꼬박꼬박 존댓말하면서 순종적이냐?"


"파이토스씨 말대로 생명의 은인에게 지랄할 쓰레기는 아니거든요."


"...내가 너 같은 낙오자만 노린 노예상이면?"


"그런 사람이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이에게 친절하게 여러가지 정보를 말해준다고요?"


"지금의 너처럼 방심시켜서 호감을 얻은 뒤에 파는 영악한 족속이라면?"


"...지금 스무 고개 하자는거에요? 파이토스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그리 틱틱대세요?"


"...아니 난, 그냥...헤리온 내에서는 조심하라는 얘기지. 네가 너무 쉽게 사람을 믿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 빠르게 친해져서 미주알고주알 대화를 나누려는 내 순박한 태도가 걱정이 되었는지, 지레 겁을 주려는 파이토스의 말에 나는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하였다.


"이래 보여도 웬만한 사람은 힘만으로 찢어 죽일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빈 말이 아니라 검을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근력과 소멸되는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절대 죽지 않을 육신을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이정도 자신감은 가질 수 있었다.


"아까 내 설명 못 들었어? 여기서는 활 보다 강력하고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적을 죽이는 총이라는 원거리 무기라던가, 테리토리라는 괴상망측한 이능력을 가진 사람이 수두룩한 곳이라고?"


"알면서 한 말이에요. 제가 수인이라서 어디 판타지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여도, 파이토스씨가 말한 총이나 이능력 같은게 있는 곳에서 왔으니까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야...아, 저기 보이는군. 저곳이 헤리온이다."


"...저게 헤리온?"


"도시라고 해서 좀 작게 생각했지? 헤리온은 웬만한 나라 보다는 크니깐. 하하하!"


시야의 좌우측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랄 정도로 넓은데다가 뉴욕의 빌딩들보다 높아 보이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헤리온의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게다가 장벽 보다 높아 보이는 곳에 위치한 대지는 아마 파이토스가 말한 '계층'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처럼 순하게만 있어도 도시 입성은 쉬울거다. 웬만한 강자들도 꺼릴 정도로 강력한 무기와 방어구를 두른 경찰들이 1계층에 깔렸거든. 뭐,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시비 거는 녀석을 가만히 참고 있으라는건 아니니 너무 활개치지만 말라고. 정확히는 내가 소개해줄 녀석만 잘 따르고 다닌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헤리온과 이 세계, 제오닉 대륙에 적응하게 될테니 말이다."


아닌 척 했었지만, 사실 파이토스가 트럭의 백미러를 통해 내 얼굴과 가슴, 보일듯 말듯한 사타구니 부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정도로 착한데다가 강인한 신체가 아니었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를 나를 구해준 은인이니 파이토스에게 이렇다 할 경계심은 들지 않았다.


방금 전 나눈 대화처럼 정말로 나에게 부정적인 일을 하려고 들었다 한들, 이름모를 마신의 가호 덕분에 적어도 한달 후에는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헤실헤실 웃으며 따뜻한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나는 파이토스가 내게 외투를 건네어 줬으나 나 역시 큰 키에 여자 치고는 한 덩치 하기에 입어봤자 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어서 그저 가슴에서 보지 까지만을 가리도록 위에 걸친 채 창문 밖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헤리온의 정문에 들어 선 파이토스는 이미 트럭을 등록해둔 상태인 듯 별다른 제지 없이 곧장 문 너머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사실 다른 어중이떠중이 같은 낙오자 였으면 그저 헤리온에 들어 갈 수 있게만 해주고 끝냈을거다. 그런데 넌..."


"전?"


"너무 눈에 띄어...솔직히 하류층이라서 예쁜 여자를 좀처럼 보기 힘들긴 해도, 너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는 단 한번도 본 적 없는데다가 미모에 걸맞는...그러니까,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끌릴 정도의 몸매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버려두긴 좀 그럴 것 같더라고. 다행히 내 트럭은 외부에서 안쪽의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창문의 썬팅을 짙게 해서 다행이랄까."


확실히 파이토스의 말마따나 썬팅이 매우 짙어 바깥에서 안쪽의 확인이 불가능한 수준의 트럭 덕분에 도로를 지나다니며 보이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이 갈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일단 널 안전한 녀석에게 맡기도록 하마. 중간에 네가 녀석을 떠나는건 상관 없지만, 헤리온의 정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붙어 있는게 좋을게다."


"호의 감사해요."


"아니야. 그저 먹고 살려고 비스트의 부산물이나 주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눈요기 하난 제대로 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와 맨 처음 마주했을 당시의 나신이 떠오른 듯 그의 볼이 약간 붉어진 것을 옆면으로 확인한 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가 이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아, 생각해보니 지금 네 상태가 말이 아니로군. 녀석과 마주하면 그 놈이 당황할게 분명하니 내가 옷 하나 사주도록 하마."


"눈요기의 대가 치고는 너무 주시는거 아니에요?"


"그러면..."


내 물음에 말 끝을 흐리며 무언가 고민을 하는 파이토스의 속내는 너무도 뻔해보였다.


보답으로 나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게 뻔히 보이는, 나에게 순진하다는 둥의 말을 했던 파이토스가 되려 순진해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다리를 벌릴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마신에 의해 이런 새 육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전 생에서의 기억이 마치 깨져나가 몇 개의 파편이 흩어진 것 같은...그 중에서도 내 자아 정체성이 무엇인지 잊혀진 현 상황에서 헤프게 굴 생각은 없었다.


'뭐, 최소 한 달 내로 올 발정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려나...'


게다가 내가 이 세계에서 앞으로 누군가에게 불리며 살아 갈 이름을 결정한 순간, 마신에게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 창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가 나를 시뮬레이션의 캐릭터 처럼 눈여겨 보고 있을 확률이 클 것이다.


'야겜하는 감각으로 보는거겠지...'


마신이 나에게 준 온갖 음탕한 패널티들의 내용을 조금만 훑어봐도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할 이는 하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 옷가게에서 트럭을 세운 파이토스가 잠시 다녀온다는 말을 하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파이토스가 내가 입을만한 옷을 사러 다녀오는 동안, 지금까지 그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한 결과.


"대충 사이버펑크랑 중세 판타지가 섞인건가? 평범한 사이버펑크 세계라고 하기에는 비스트인지 뭔지도 있는데다가 방사능의 영향 같은거라고 보기는 힘든 수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줄 정도로 '낙오자'라는 시스템도 있고..."


일단 파이토스의 말대로 그가 소개해줄 이와 함께 하며 앞으로 이 세계에서 무얼 하며 살아갈지, 목표는 뭘로 잡을지에 대한 고민은 복잡해진 현재의 머리 상태로는 무리이니 잠시 눈을 지긋이 감은 나는 그가 돌아올때까지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각각 약 17kb, 22kb인데 노벨ㅍㅇ에 올리면 ㄱㅊ을것 같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