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이 있는 캐릭터라는게 작문서들의 공통된 의견임(나도 아주 깊게 공감하는 부분이고)

어디서 읽었는지는 까먹었지만, 한 작법서에 이런 글귀가 인용되어 있었음.

"완벽한 인물은 완벽하게 지루한 인물이다."

생각해보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인 경우는 결코 없음.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은 겁쟁이에 약골이고, 마블의 아이언맨은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임. 리제로의 스바루는 스스로의 무능함이 콤플렉스이고, 심지어 슈퍼맨조차 크립토나이트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고, 그렇기에 다른 '불완전한 존재'에게만 공감할 수 있음. 인간이 어떻게 신에게 공감할 수 있겠어?




'헌신적이고 이타적이며 강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성녀'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는 있어도, '이입'하고 '공감'할 수는 없는 캐릭터임.

그런데 여기에 '그 성녀는 스스로의 사소한 실수에도 지나치게 엄격해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악몽을 꾼다' 라는 내용이 첨가되면, 성녀는 신이 아니라 한낱 인간이 되는 거임. 우리와 같은, 그래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다들 한 번쯤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느끼고 거기 절망하거나 분노한 적이 있기에, 고민으로 인해 밤잠 설친 적이 있기에 우리는 성녀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됨. 고민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절망의 방향은 다르더라도, 본질적 동질성 때문에 말이지.

PTSD에 시달려서 술 없이는 잠 못 드는 경찰, 동생이 죽는 걸 목격했기에 어린이는 결코 해치지 못하는 암살자, 자식의 죽음에 사로잡혀 그를 되살리는데 집착하는 과학자...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이입할 수 있고, '인물'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결국 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거임. 그것이 바로 몰입이고,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지.

또한 이 결함이 곧 목표로 작용하기도 하고 말이야. 위의 과학자의 경우엔, 자녀의 죽음이 주는 충격에서 '추스르고 일어서는' 정상에서 벗어나, '집착'이라는 결함을 획득했기에 '자식을 살린다'는 목적을 얻게 됨.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선역이 될 수도 악역이 될 수도 있고. (물론 목적은 따로 있고 결함은 방해물로만 존재하는 작품들도 있지. 하지만 그것조차도 목적의 성취를 위해 결함과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목적-결함의 단단한 상관관계 하에 있음)

결함을 치유하고 목적도 이루는 경우, 우리는 '대리만족'이라는 형태의 쾌감을 얻음. 아이언맨이 아크리액터를 적출하고 동시에 페퍼를 구한다는 목적도 이룬 아이언맨 3편이 그렇고, 스바루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에서 벗어나는 리제로 시즌2의 첫 번째 시련이 그렇지. 길베르트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심을 키우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애니판도 그런 형태릐 이야기고.

결함을 그대로 안은 채 목적을 이루는 경우, 우리는 자존감의 향상을 경험함. 마음챙김 같은 데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처럼 말이야.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은 바이킹의 우람한 근육이나 용맹한 성격같은 걸 타고나지 않았음.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근육이 붙거나 성격이 호탕해지거나 하지 않았고.

하지만 그 나약함이 상처입은 투슬리스에 대한 동질감을 불러일으켰고, 유약한 성정이 드래곤을 죽이는 걸 막았지. 그랬기에 둘은 친구가 될 수 있었어.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에서 프레디는 에이즈를 치료하겠다거나 그런 시도를 하는 대신, '그러니 죽기 전에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겠다'는 태도로 라이브 에이드에 임하고, 용기를 내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감.

장자의 제물론에 나온, '다리가 부러졌기에 전쟁에 끌려가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처럼, 단점이 장점으로 변하고, 그렇기에 스스로의 단점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 역시 단점투성이인 우리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지.


아예 실패할 뿐인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의 핵심은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이야. 그 어떤 비극의 주인공도 정해진 파멸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아.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맞서 싸우지만, 늪이 사람을 끌어당기든 천천히 파국으로 치닫지.

이때 느끼는 감정은 카타르시스임.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고,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에게 투사함. 함께 아파하고, 함께 절망하지.

여기서 세 가지 심리적 효과가 나타는데, 하나는 공감을 통한 연대감과 소속감의 형성, 다른 하나는 나의 내적인 고통이 인물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밖으로 표출되면서 느끼는 해소감, 마지막 하나는 저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임. 카타르시스는 이 세가지의 복합적인 작용이고. 이것조차도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필연적인 결함 때문이지.





혹자는 요즘 범람하는 먼치킨물은 예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음.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함은 항상 중요한 소재로 남아있음.

오버로드의 아인즈는 인간세계에서 늘 피식자였던 스스로의 위치 때문에 오히려 착취자, 가해자들의 관점임 '약육강식'에 집착하고, 자신과 나자릭을 위해 이세계인들을 학살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됨. 그의 행동 기저엔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선망과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아인즈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됨.

전생슬의 리무르 템페스트는 슬라임으로 시작했음. 걔가 끊임없이 성장하며 먼치킨이 되어가기는 해도, '슬라임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간다고?'라는, 개천에서 용난다 형태의 대리만족이란 점에서 기존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애초에 '주인공은 불완전하다'는 법칙에 대한 메타적 접근같은거라, 인물이라기보단 기믹에 가까움. 말하자면 현대미술이지. 그래서 '스토리'를 전개할 때는 항상 사이타마가 아니라 다른 '불완전한 인물'에 중심을 두잖음? 무면 라이더라던가, 제노스라던가, 소닉이라던가. 사이타마가 중심으로 들어올 때는 그 모든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는 소위 '사이다'용 장치로서 사용되거나, 아니면 결함이 있는 인물인 '과거의 사이타마'거나, 아니면 마치 신과 같은 무력을 지닌 그의 '감정', 즉 인간스러운 면모를 드러낼 때 뿐임. 누구나 무료함을 느끼니까.


아무튼 뭐, 결함이야말로 인물의 MSG다 그런 말이 하고 싶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