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destinychild/9169249

에서 이어지지만 굳이 안 읽어도 됨

















"스위리!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이 앞에 잠깐 다녀왔어."

3시가 막 지난 시간.

햇빛이 비추는 창문 옆에서 책을 읽고있던 메티스는 현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글쎄, 아까 산책을 나갔는데..."

악마의 옆에 붙어서 재잘재잘대는 시트리의 모습은 같은 여자인 메티스가 보아도 사랑스러웠다.

하늘하늘한 드레스에 귀엽게 묶은 양갈래머리. 거기에 달콤한 목소리까지.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새빨개진 악마의 귀를 본 메티스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낸 메티스는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한창 책의 내용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메티스는 시계를 보고선 책갈피를 끼워두고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주인. 나 카페 좀 다녀올게."

"학교에 있는 카페?"

"응. 오늘 베르들레가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어."

"또 다른 데로 새려는 건 아니지?"

"안 늦게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악마는 손을 흔들고 나가는 메티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해주었다.

"메티스 많이 큰 것 같지 않아?"

"...나한테 물어본 건가?"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주피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말고 아무도 없잖아. 네가 메티스 빗속에 갇힌 거 우산 씌워주고 온 게 엊그제 같은데."

"그 때랑 비교하면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런데 자네는 언제쯤 성장할 생각인가?"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화살에 뜨끔한 악마는 다른 주제로 얘기를 돌렸다.

"아, 늘 밤세계 가는 거 안 잊었지?"

"안 그래도 말하려 했네. 곧 나갈 시간 아닌가?"

"맞아. 슬슬 나갈 준비 하자."

고개를 끄덕인 주피터는 벗어놓은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고선 한 손에는 가방을 챙겼다.



"일 있다고 불러서 시키는 게, 고작 이거야?"

베르들레가 준 메이드복과 모자를 쓴 메티스는 손에 주문표와 볼펜을 들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다른 일이 있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다 하면 알바비는 주는 거지?"

"물론입니다. 주인님한테는 비밀로 해드리죠."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 이 옷 입으면 정말 인간들한테도 보이는 거야?"

"네. 카페 드 페티의 직원들도 모두 그런 옷을 입습니다."

"신기하네... 아, 손님이다."

짤막하게 말 한 메티스는 새로 들어와 앉은 손님의 앞에 가 메뉴표를 건넸다.

베르들레는 혹시나 그녀가 마음을 읽는 능력을 써 제멋로 주문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메티스는 얌전히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왔다.

"잘 하던데요 메티스. 주문은 뭔가요?"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민트초코케익 하나 달래."

"......"


이후 식혜를 내놓으라는 손님, 잘 모르면서 에스프레소 원액을 달라는 손님, 물만 잔뜩 마시다 나가는 손님을 맞은 메티스의 이마에는 푸르스름한 혈관이 튀어나와있었다.

폭발 직전인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걱정된 베르들레는 다음 아르바이트생이 오기 30분 전에 메티스를 불렀다.

"메티스, 이제 그만 가봐도 됩니다. 오늘은 정말 신세를 졌네요."

"그래? 후우... 정말 따끔하게 말해주고 싶은 거 몇 번이나 참은 거 당신도 알지? 그럼 난 옷 갈아입고 올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별난 손님들이 많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메티스가 내민 옷을 받아든
베르들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작은 상자와 함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케익입니다. 스트레스에는 단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 힐드가 그러더군요."

조심스레 그걸 받아들은 메티스는 짜증으로 가득찼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품 속에 봉투를 넣고 한 손에 상자를 든 메티스는 카페 일로 짜증이 난 건 잊은 채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주인이랑 같이 먹어야지.'

주피터의 얼굴도 떠올랐지만 조각케익이라 양도 적을뿐더러 그라면 먹지 않을 거라 생각한 메티스는 오늘 번 돈으로 뭘 할지 생각했다.

'화분을 하나 살까? 책도 새로 하나 사고싶은데.  아니면..."

즐거운 고민과 함께 집에 도착한 메티스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주인, 나 왔어!"

"뿔쟁이는 집에 없어!"

"응? 오늘 주인 아르바이트 없지 않아?"

손에 딸기우유를 꼭 쥔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바이트 간 건 아니고, 마객상점에 다녀온다고 그랬어."

"그러면 좀 늦겠네. 나한텐 늦지 말라더니."

가볍게 투덜거리며 상자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려던 메티스는 다비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다.

'저 상자가 궁금한 거구나.'

"상자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

"응. 맛있는 거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묻는 다비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 메티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맞아. 안에 있는게 뭔지 맞추면 다비한테도 좀 줄게."

"정말?"

"대신 세 번 안으로 못 맞추면 안 줄 거야. 자, 시작."

"과자!"

"땡. 비슷한 거야."

"어... 사탕?"

"땡. 사탕처럼 달긴 한데, 사탕은 아니야. 이제 마지막 한 번이야 다비."

마지막이라는 말에 눈을 질끈 감은 다비는 눈을 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초콜렛!"

"땡. 정답은 케익이야."

"히잉... 그럼 다비 케익 못 먹는 거야?"

"원래는 그런데, 열심히 했으니까 절반만큼 나눠줄게. 접시랑 포크 가져와."

"정말? 앗싸!"

메티스는 다비와 작은 조각케이크를 나눠먹으며 카페에서 있던 얘기들을 해주었다.

후배한테 고백하다 차인 남학생과 개를 데리고 들어왔다가 놓쳐버린 손님들의 얘기를 해주며 야금야금 케이크를 먹으니 어느새 접시 위에는 찌꺼기만 남아있었다.

"다 먹었다!"

"맛있지? 다음에 카페 가면 또 달라고 해볼게."

"응! 그리고 손님들 얘기도 또 해줘. 엄청 재밌다."

"그래? 알았어. 이제 가서 놀아."

다비를 보내고 접시와 포크를 설거지하던 메티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현관을 돌아보았다.

"주인, 주피터! 둘이 같이 나간 거였어?"

"메티스, 일찍 왔네."

"어, 그런데..."

영 좋지 않은 둘의 표정을 살핀 메티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별 일 없었네."

"간만에 먼 길 다녀왔더니 피곤해서 그래. 주피터, 들어가서 쉬고있어."

"알겠네."

평소보다도 더 무뚝뚝한 주피터의 마음이 궁금했던 메티스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커피를 끓이기 위해 파란 주전자에 물을 담으며 악마를 바라보았다.

주피터처럼 굳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당황하고 반쯤 넋이 나간 표정에 메티스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커피 타줄테니까 잠시만 기다... 주인. 그 상처는 뭐야?"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식탁 앞에 앉으니 그의 목에 있는 상처가 보였다.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피가 옅게 흐르는 걸 본 메티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주전자를 올려두고서 상처 위에 손을 댔다.

"다친 것부터 말했어야지."

"어.. 고마워.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악마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커피를 두 잔 타 식탁 위에 올린 메티스는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오는 길에 누구랑 싸웠어?"

"밤세계에서 길잃은 차일드한테 시비가 걸려서. 그게 다야."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악마를 빤히 바라보던 메티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달칵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나한테는 말 못 해줄 얘기야?"

화나 보이지는 않지만 진지한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던 악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둘의 커피잔이 바닥을 보일 때 쯤이 되어서야 악마의 얘기는 끝이 났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주피터는 자존심이 세니까... 그럴 만도 해."

"나는 정말 신경 안 쓰는데 쟤는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더라. 표정이 너무 굳어있어서 오는 길에 한 마디도 못 했어."

"주피터 성격 알잖아. 혼자 잘 이겨낼 거야."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며 다 마신 커피잔을 치우는 메티스의 등을 보며 악마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닐 것 같은데..."




악마의 우려대로 주피터는 며칠동안이나 기운이 없어 보였다.

워낙에 무뚝뚝한 남자라 대부분의 차일드들은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 했지만 메티스나 악마의 눈에는 그가 상심해있다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이럴 줄 몰랐는데 꽤 오래 가네."

"네가 주피터를 잘 몰라서 그래. 쟤가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음... 그런가?"

소파에 앉아 주피터에 대한 대화를 하고있던 와중, 다비가 큼지막한 가방을 가지고 살금살금 걸어왔다.

"메티스. 이것 좀 봐."

다비는 눈을 빛내며 손에 든 가방을 자랑스레 내밀었다.

"야, 너! 주피터 가방에 손 대지 말랬지!"

"바보 같은 뿔쟁이. 훔친 거 아니거든? 주피터가 보는 눈 앞에서 가져왔는데 아무말도 안 했어. 그러니까 이건 훔친 거 아니야."

"아무 말을 했든 안 했든 그건 훔친 거야. 빨리 가져다주고 와라."

"못된 뿔쟁이 말은 안 들을 거지롱~"

"......"

다비의 손에 들린 가방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메티스는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비. 그거 주피터 가져다주고 와. 네 거 아니잖아. 자꾸 그러면 다음에 케이크 안 줄 거야."

주피터의 가방과 달콤한 케이크 사이에서 갈등하던 다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음엔 다비 한 조각 다 줘야 돼?"

"알았어. 빨리 가져다주고 와."

호다닥 달려가는 다비를 보며 악마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말 죽어라 안 듣는 애가 웬 일이래. 근데 케이크는 무슨 소리야?"

"저번에 베르들레네 카페 갔을 때 선물로 받은 거 나눠줬어. 원래 주인이랑 먹으려고 했는데 집에 없길래."

"그 날이구나. 근데 주피터 녀석, 가방까지 다비한테 뺏기고 뭐 하는 거야?"

질책 같지만 걱정이 잔뜩 섞여있는 목소리에 메티스도 슬슬 주피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주피터가 나왔다.

"주피터. 가방은 돌려받았어?"

"...쥐방울만한 서큐버스가 던져두고 가더군. 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네."

"너무 멀리 나가진 마라."

그렇게 주피터가 나가고 한참 뒤, 악마가 놀랄 정도로 벌떡 일어난 메티스는 무언가 다짐을 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 나 나갔다 올게."

"어... 너도 너무 멀리 나가진 말고."

"알았어. 금방 올게."




홀로 집을 나온 주피터는 과거 다비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쥐방울만한 게 자꾸 가방에 손을 대서 주인보고 관리를 잘 하라고 했었지.

그걸 시작으로 자신이 악마나 차일드들에게 했던 수없는 말들이 떠올랐다.

대부분 듣기 싫었을 말이라는 걸 안다.

그런 말들을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무말도 안 하는 것보단 직설적인 말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언행의 바탕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스스로한테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며칠 전 그런 자부심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실수였을까. 아니, 그걸 실수라고 하는 것은 자기위안이다.

보잘 것 없는 떠돌이 차일드가 악마에게 일격을 가하는 걸 허용한 건 악마의 나약함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자만이 부른 사고였다.

뒤늦게 사고를 수습하려해도 이미 일은 저질러져있었다.

악마는 연신 괜찮다고. 자신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지만

주피터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로 차마 악마를 쳐다보지 못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잘난 듯 말하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

끝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주피터는 가까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언제부터 헐떡거리고 있던 걸까.

뛰지도 않았는데 목끝까지 올라온 숨을 간신히 고른 주피터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처럼 쨍쨍하지는 않지만 눈부신 햇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그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동안 찾으려 다녔는데, 여기서 궁상떨고 있었구나."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감은 눈 위로 햇빛이 약해진 걸 느낀 주피터는 낯익은 목소리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

"...메티스."

주피터의 앞에 선 소녀는 하얀 양산을 쓴 채로 처음 보는 복장을 하고 서있었다.

"이 옷 당신한텐 처음 보여주는 건데, 별로 안 놀라네?"

"......나를 욕하러 온 건가?"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주인에게 들었겠지. 아니, 자네에겐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으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당신 말이 맞아. 마음을 읽은 건 아니고 주인한테 들었어. ...주피터. 옆에 앉아도 돼?"

"마음대로 하게."

양산을 주피터에게 씌워주며 앉은 메티스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 때 생각난다. 왜, 주피터가 나 우산 씌워준 날 있잖아."

"......"

"내 앞에서 우산을 들고 있던 당신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잘... 모르겠군."

"주피터는 나랑 다르게 참 강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음...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

추억을 잠시 회상하던 메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이 있었어도 당신이 금방 이겨낼 거라 생각했어. 내 기억 속의 당신은 그런 남자였으니까."

"잘 아는군. 이번 일로 알게 돼서 다행이야. 난 그리 잘난 사내가 아니네."

까칠한 그 말에 화가 나 일어날 줄 알았던 메티스는 오히려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나는 당신이 그저 잘났다고만 생각했어. 근데 요 며칠동안 보니까 아니더라고. 그렇게 굳세고 단단해 보이던 당신도 살짝 금이 간 걸로 무너지는, 누구나처럼 약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그리고..."

구름에 가려져 약해진 햇빛 아래의 소녀는 숨을 살짝 들이 쉬고 곧은 시선으로 주피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알 것 같아. 당신이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는지."

말을 마친 뒤 메티스는 천천히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주피터는 픽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자네는 내가 넘어져있을 시간도 주지 않는군."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치게 넘어져있었어. 집에 가면 주인한테부터 사과해. 당신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크흠. 사과하는 건 조금..."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그래주겠나? 그런데, 정말로 이 옷은 처음 보는군."

"주인한테도 한 번 밖에 안 보여준 거야."




재잘재잘 떠들며 집에 함께 돌아온 메티스는 주피터가 먼저 들어가는 걸 보며 양산을 접어 장에 넣어두었다.

"주인! 주피터가 할 말 있대!"

자신의 말에 당황한 주피터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메티스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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