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은 정장을 입고 공원을 청소하는 노인에게 신사복을 입은 심각한 얼굴의 남자가 걸어왔다.


"정말 한심하군."


 모자가 인상적인 신사복의 남자, 주피터가 말했다.


"꼴불견이야. 아주 가관이군."


 그는 구둣발로 낙엽을 짖밞으며 거칠게 말했다.


"아직도 포기를 안 했나. 추하게 버둥거리는 꼴이라니, 차라리 아무도 보지않는 산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는 게 어떤가."


 노인은 자신의 모자를 고쳐쓰며 허리를 쭉 펴고 투닥투닥 두드렸다.


"하아...거의 다 됐나. 배식이 몇 시였더라."


"하! 정말 뒷방 늙은이가 다 됐군. 항상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주던 최고급 식사만 먹던 게 엇그제 같은데."


 쏘아붙이는 그 날이 선 말에도 노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차일드는 일반인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주피터가 무슨 말을 하든 노인 구봉추에게는 소귀에 경잃기였다.


"난 네가 싫어."


 깔끔한 신사복과 고풍스러운 모자, 마치 귀족처럼 자신만만하고 격식을 차리던 그 답지 않은 투박한 어조였다. 매도의 대상은 그의 계약자다. 많은 차일드는 본질적으로 계약자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계약자가 이루지 못한 도달점이다. 즉, 차일드에게 있어서 계약자란 자신처럼 되고 싶어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 모든 차일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라고도, 형제라고도 할 수 있는 계약자와 자신 사이에 선을 명확하게 긋는 이는 많다.


"품격도 없고, 자존심만 남아서 땍땍 소리만 지르는 꼴이라니."


 주피터가 땅에 침을 뱉었다. 하지만 구봉추가 지나가면서 그것을 밟으려 하자 주피터는 화들짝 그것을 구두밑창으로 문질러 치웠다. 구봉추는 아슬아슬하게 그 침을 밟지 않고 지나갔다. 주피터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주피터의 주인이라고 부를만한 그 한심하고 멍청한 악마의 집은 항상 시끌벅적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 심했다.


 여러 차일드들이 비좁기 짝이 없는 방에 다닥다닥 붙어서는 그 바보 상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네 계약자라고? 엄청 잘 나가나봐."


"대단한데? 나중에 한 번 소개시켜줄래?"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멍청이들. 그까짓 계약자가 TV에 나왔다고 호들갑 떠는 꼴에 주피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래. 샛별이는 우리를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많아진다면 기쁠 거 같아."


 재계약이라도 했는지 차림새가 많이 바뀐 소녀가 기쁜 얼굴로 화면 속 아역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피터는 아무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장내에 끼어든 엄숙하고 근엄한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주피터에게 쏠렸다.


"아, 마침 잘 왔다. 아저씨도 한 번 볼래? 샛별이라고, 메티스의 계약자인데 유명한 아역 배우인가 봐."


 쓸데없이 밝은 드미테르가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주피터가 슬쩍 TV의 화면을 보았다. 메티스와 닮은 소녀가 가족들과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 보였다. 거슬릴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그것이 연기인 것은 알았지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돈까스야.]


[와아! 돈까스! 엄마 최고!]


[아이 참, 아빠는 싫어?]


[앗, 아니야. 아빠도 최고야!]


"같잖군. 계약자가 뭐 별거라고."


 들뜬 분위기에 고드름이 박힌 것처럼 모두가 조용해졌다. 다들 그 무자비한 말에 놀란 눈초리였다. 하지만 주피터 본인이 가장 놀랐다. 자신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아...미안...보기 싫었구나..."


 메티스가 말했다. 괜찮다는 듯 가장한 말이지만 당장 눈물을 쏟아내며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사과였다. 


"야, 너...!"


 드미테르가 그에게 삿대질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화를 내기도 전에 주피터는 거기서 등을 돌렸다.


"잘 아는군. 그럼 좀 조용히 해주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다시 나갔다.


"거기서!"


"난 괜찮아, 드미테르."


 쿵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미테르가 따라가려 했지만 메티스가 제지했다.


 언짢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선 주피터는 방금 나선 현관문을 살짝 돌아보았지만 곧 발걸음을 옮겼다. 마땅히 갈 곳은 없어 정처없이 걸었다.


=


"주피터 아니야? 여기서 뭐해?"


 우연히 주인이 일하는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었을 때 그의 한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


 주피터는 아무 대답도 없었고 고개를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그 자리에 멈춰섰다.


"산책 나왔어? 아니, 공원 가는 길은 이쪽이 아닌데."


"그냥."


"뭐?"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주인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그러지 말고 말해봐. 이래뵈도 너의 주인이니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주피터가 살짝 몸을 틀고 주인을 노려보았다.


"주인이면 다인가? 그래봤자 계약자와 거래했을 뿐인 타인일텐데. 어차피 너희들은 영혼만 있으면 되지않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주피터도 알고 있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군. 너희들도 그렇고 계약자들이라는 것들도 마찬가지야. 바보 같은 소원을 위해서 너처럼 한심한 악마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꼴이라니."


"혹시 걱정돼?"


 주피터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네 계약자가 걱정되는 거야?"


"그렇지 않다."


"그러지 말고 알바 끝나면 같이 보러가자. 모나에겐 재계약하러 간다고 말해두면 두팔 벌리고 '어서 다녀오세요 주인님~'하고 보내줄 거야."


"필요없다고 했잖나." 


"거기 앉아서 1시간만 기다려줘. 부탁할게."


 주인은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따뜻한 캔커피를 들고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내가 쏘는 거야."


"내가 이런 걸 마실 것 같나?"


"어쩔 수 없어. 여긴 카페가 아니라 편의점이라고."


 그는 캔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다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다시 나온 그의 앞에 캔커피는 없었지만 주피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


 홀로 공원 구석에서 국수를 먹고 있던 노인의 앞으로 두 남자가 찾아왔다.


"또 왔냐, 꼬맹이."


"네. 식사 중이셨는데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 됐다. 일단 그 계약인지 뭔지나 다시 하자."


 노인이 국수를 옆에 내려놓았다. 미지근해져서 야외임에도 김이 서리지 않았고 면발도 불어터져 있었다.


"어르신, 그렇게 계약하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이 정도로는 부족해!"


"회사를 되찾는다고 하셨죠?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없어. 하지만 너랑 계속 계약하다보면 떠오를지도 모르지."


"언제까지 이 한심한 문답을 계속할 셈이지?"


 주피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어르신."


 주피터의 눈치를 살핀 주인이 진중한 목소리로 노인을 불렀다.


"뭐냐. 오늘은 계약하러 온 게 아닌가보지? 항상 같이 다니던 그 아가씨들도 안보이고."


"계약은 할게요. 하지만 평소와는 좀 다를거에요."


"다르다고? 돈이라도 받을거라면 까짓거 내주마. 내가 회사만 되찾으면..."


"그게 아니에요. 소원을 말할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에요."


"뭐? 그럼 누가 한다고..."


 주인이 주피터를 똑바로 쳐다봤다.


"소원이 뭐야?"


"뭐? 지금 뭐하는 짓이지?"


 주피터가 말했다.


"다시 물어볼게. 소원이 뭐야?"


"지금 뭐하는 게냐?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노인이 말했다.


"이러려고 날 데려왔나? 그럴싸하게 말해놓고는 마땅한 계책도 없었나?"


"주피터, 너의 주인으로써 물어볼게."


"뭐하는 거냐고? 아까부터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계약하기는 할 거냐?"


"계약자는 계약자, 차일드는 차일드. 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가 노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주피터와 노인이 크게 움찔했다.


"그럼 어째서 너는 아직도 그 모자를 쓰고 있는 거야?"


 그가 노인의 모자에 반대쪽 손을 뻗었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피터는 멍하게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피터, 너의 욕망은 회사를 되찾는 거야?"


 모자를 잡고 그것을 벗기려는 그의 손을 주피터가 낚아챘다. 모자로 가려진 주피터의 얼굴 아래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그런 게 아니겠지. 내가 아는 너는 그래. 회사나 복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녀석이야."


"그게...뭐 어떻다는 거지. 회사를 되찾든 말든, 회사를 빼았을 녀석들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나랑 아무 상관없다."


"맞아. 그리고 그게 계약자의 바람이겠지. 너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니까."


 그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어르신의 욕망은 정말로 회사를 되찾는 건 가요?"


"뭐? 당연한 소리 아니냐! 아까부터 자꾸 허공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귀신이라도 있냐?"


 그가 웃었다.


"어르신은 귀신을 믿어요?"


"...설마 네가 귀신이었다, 뭐 그런 소리라도 하려는 거냐? 그렇다면 믿어주지. 귀신이든 뭐든 상관없어. 내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해주마."


"정말로 그게 소원이라면." 


"정말이고 자시고, 내 소원은 그거 밖에 없어."


"이상하지 않아요? 그게 소원인데 왜 아직도 이루지 못했죠?"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야! 지금 놀리는 거냐! 이런 늙은이라고 무시해?!"


"이런 늙은이라뇨. 이런 늙은이가 어떤 늙은인데요?"


"너...!"


 노인이 그의 팔을 뿌려치고 뒤로 물러섰다. 


"뭐긴 뭐야! 이런 잡일거리나 하고! 하잘것없는 음식이나 먹고! 내 땅에서 쫒겨난! 한심하고 비참하고, 그리고 또...!"


"또?"


"아무런 품위도 없고, 자존심만 남은 얼간이지..."


 노인이 주저앉았다.


"소원이 있어요?"


"소원..."


"네. 정말로 악마에게 빌고 싶은 진짜 소원이요."


"내...소원은..."


=


 주피터는 자신과 똑닮은 차일드와 대치하고 있었다. 복장도 체격도 비슷했지만 눈빛과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저건..."


"마아트 때와 비슷하네."


 계약자가 새로운 소원을 품는다면 그에맞춰 새로운 차일드가 태어난다. 마아트의 계약자는 신으로부터 안식을 원해서 싸구려 창녀처럼 악마들에게 영혼을 마구 팔았다. 그리고 그녀의 신을 대변하는 차일드와 끝없는 안식을 향해 달려가는 차일드 둘이 생겼다.


"그렇다면 저게 지금 그의 소원인가?"


"글쎄? 경험상으로는 진심이 아닐 거 같아."


 마아트는 안식을 원하여 계약자의 영혼을 남김없이 분해시키고 완전한 종식을 추구했다. 그것을 제지하려는 또 다른 마아트는 서로 대립한 끝에 이기고 그 망집을 정화시켰다. 주인은 이긴 쪽이 더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에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증명해봐. 네가 진짜 주피터라고. 이래뵈도 너의 주인이니까, 끝까지 지켜봐줄게."


"같잖군."


 주피터가 단칼에 선언했다.


"저런 쓰레기에게 내가 질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쓰레기?"


 반대쪽의 주피터가 반응했다.


"그렇게 고상한 척, 고고한 척하고 있으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그는 발광하듯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계약자의 분노, 고통, 그리고 복수! 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쓰레기는 네가 쓰레기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깡통 같은 녀석!"


 그의 옷이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곳곳이 해지고 검붉은 얼룩이 퍼졌다. 가방은 쩌적거리며 금이가고 얼굴은 악귀나찰처럼 흉흉한 기색이었다.


"나는 저 왕좌에서 이 역겨운 시궁창에 빠진 것에 대한 분노다. 애초부터 내가 진짜고 너는 허울 뿐인 가짜야. 지금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그놈들에게 복수하러 가겠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주피터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답했다.


"유언이 쓸데없이 길군."


 반대쪽의 주피터가 가방을 내던지고 첫 발을 내딛었다. 그에 호응하듯 주피터도 가방을 내려놓고 자세를 잡았다. 


 주피터는 노련한 권투 선수처럼 거리를 재며 주먹을 던지고 스탭을 밟았지만, 반대쪽은 짐승처럼, 혹은 광인처럼 달려들었다. 손톱으로 활퀴고, 이빨로 물어뜯고, 온몸을 내던졌다. 주먹이 얼굴에 박혔고 코뼈가 부러지며 피멍이 들고 찢어진 입과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두 남자는 서로 엉키고 뒹굴며 먼지를 일으켰다.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 뜯었을지도 모르고, 비교적 약한 쇄골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둘 다 일 수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들이박았다. 단단한 것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무너졌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피칠갑을 한 얼굴에 귀신 같은 표정과 함께 일어나 비틀거리며 상대를 향해 주저앉았다. 피로 물든 장갑이 목을 감으며 눈을 까뒤짚고 조였다. 둘 다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어섰다.


"하아, 하아...이제...끝이다..."


=


 노인, 구봉추와의 재계약이 끝났지만 주피터의 모습은 바뀐 것이 없었다. 엉망진창이었던 몰골이 다시 말끔해졌을 뿐이며 복장은 여전히 기품있는 신사복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구봉추가 물었다.


"뭐가요?"


"계약을 하고 나면 그 뭐냐, 항상 머리가 빠릿빠릿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잖아."


"글쎄요? 저랑 계약한다고 딱히 원하는 걸 얻는 건 아니라고 말씀은 드렸잖아요."


"뭐, 그렇긴한데..."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어? 아, 그래. 잘 가거라. 다음에 또 보자꾸나."


"...진짜 그냥 가도 되요?"


"무슨 소리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안녕히...다음에 뵐게요."


 그가 떠난 뒤 구봉추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미지근했던 국수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그는 조용히 그것을 먹었다. 마지막 국물까지 모두 마시고 만족스럽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자신의 옆에 차갑게 싶은 캔커피가 놓여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까진 없었던 것인데 그 꼬맹이가 주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웃음이 났다. 


 캔커피를 따고 그것을 들이켰다. 항상 자판기 커피만 마셨기에 조금 사치스럽단 기분까지 들었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구봉추는 어쩐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평소 공원의 쓰레기가 더 적어서 일이 쉬워졌다거나, 까지도 않은 빵이나 삼각김밥 따위가 벤치에 놓여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에게 향하는 얼굴들은 점점 유하게 변하는 것 같았고 심지어 그에게 농을 건내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은 공원에서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 방송사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공무원이 찾아와 말하길 그 사람들이 알아서 다 치우고 갈 것이니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적적할 뿐이라 사람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공원에 나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부지런하기 보단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듯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구봉추는 그들이 잘 보이는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 쩔쩔 매는 것 같은 기색이더니 곧 조심스럽게 완장을 차고 앉아 있던 감독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감독은 머리를 짚으며 무언가 욕지거리를 한 모양새였다. 

둘 사이에 계속 실랑이가 있다가 감독이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 멀리 앉아있던 구봉추와 눈이 마주쳤다. 


 곧 감독의 옆에 있던 사람이 구봉추에게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구봉추가 먼저 말을 걸었다. 상대의 표정이 매우 곤란해보인 것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저기...혹시 잠깐 괜찮으시면 저희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어르신?"


"네? 제가 무슨..."


"아! 절대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되거든요. 저희가 영화를 찍는데 그냥 앉아계시는 역할을 맡은 분이 아파서 못나오셨어요."


"제가 그런 일을 해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진짜 괜찮아요. 원래 어르신 역이 필요했거든요. 진짜! 진짜 그냥 앉아만 계시면 되요. 힘들면 바로 말씀하셔도 되구요."


 구봉추는 선뜻 그 일을 맡았다. 배역은 어린 여자아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역할로 주조연이 아닌 미장센으로 소품이나 다름없었다.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여자아이가 풋풋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에 절로 조용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일은 3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감독이나 스태프가 정말 고맙다면서 그의 마다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적지 않은 돈을 쥐어주었다.


=


"어, 왠일이야? 아저씨가 TV를 다 보고."


"..."


 주피터가 바닥에 앉아 작은 TV를 쳐다보는 것이 보이자 드미테르가 물었다. 주피터가 모두의 앞에서 지난 일을 사과한 뒤로 서먹하던 사이도 다소 풀어졌다.


"무슨 다큐멘터리나..."


"영화일세."


"영화? 고전 명작 특집 같은 건가."


"계약자..."


 주피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자가, 나오는 영화일세."


"풋!"


 드미테르가 웃었다. 그리고 주피터가 뭐라하기도 전에 크게 소리쳤다.


"다들 나와봐! 주피터가 자기 계약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어!"


"뭣?! 잠깐...!"


"진짜야? 그 주피터가?"


"이거 진짜 대박인데!"


 콩알만한 집구석에 차일드는 또 어찌나 많은지 거실이 가득찼다.


"...주피터."


"아..."


 메티스가 작게 들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저번에는 미안했다, 정말로..."


"괜찮아. 벌써 몇 달 전 일인데 뭘."


"그래. 그랬지..."


 주피터는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이 영화는..."


"네 계약자도 나오나보지?"


"응. 평가가 좋은 영화였어. 나도 아직 못 봤는데 이번에 같이 보자."


 계약자가 나온다는 이유로 다른 차일드들은 그들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했다.


"오 나온다! 근데 샛별이가 나오는데?"


"아니, 저기 저 할아버지가 주피터 계약자 아니야?"


"그런가?"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임여?"


 마야우엘이 말했다.


"저 할아버지 지금 유명함. 저 할아버지랑 샛별이가 나타내는 의미는..."


 즉슨 영화에서 그들의 역할은 절망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인간적인 품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영화의 평가가 무척 좋아서 중요한 장면에서 나온 구봉추도 나름대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졌다.


"품격, 인가..."


 주피터는 그 때를 떠올렸다. 또 다른 자신과 피를 튀기는 사투의 한 때. 결과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기백에서는 확연히 밀렸고 자신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패배에 근접했던 순간에는 정말로 자신이 가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은 틀림없이 계약자의 분기점이었다. 자신도 그 자도 모두 계약자의 소원이고 의지였다. 그리고 구봉추는 언제나 회사를 되찾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첫 계약에서 태어난 것은 그 흉흉한 분신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도 자신이었지만 아직도 한 가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일부로 죽어준 것이 아닐까.


 그도 주피터의 내심처럼, 아니면 그 이상으로 계약자의 마음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다 모여서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악마님~악마님도 같이 앉아서 영화보자. 주피터랑 메티스 계약자가 나온데!"


"뭐? 샛별이는 그렇다치고 그 어르신이?"


 주피터의 생각은 주인의 등장과 함께 저편으로 흐트러져 사라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피터와 메티스 사이에 앉았다.


"너희 둘의 계약자가 같이 나온다고?"

 

"응. 악마도 옆에서 같이 보자."


"그래. 주피터, 옆에 앉아도 될까?"


"...이미 앉아놓고 뭘 물어보나."


"까칠하긴."


 말은 그랬지만 그 표정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주피터를 보면서 입꼬리가 실실거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조그마한 TV 화면 구석에서 신사모자를 눌러쓴 기품있는 노인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