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달려 숙소의 문을 쾅 닫으며 들어오자

나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왔다.

"메티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근데 나비는 언제 왔어?"

"아까 졸다가... 악마가 깨워서 데려다줬어."

"미안해. 혼자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놀아서."

메티스의 사과에 나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어. 그런데 주피터랑은 뭐 하고 온 거야?"

"그냥 잠깐 같이 산책했어."

"그랬구나... 둘이 어디 가길래 궁금했어."

그 말에 메티스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말했다.

"나 피곤해서 눈 좀 붙이고 나올게."

"응. 잘 자."

방으로 들어온 메티스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몸을 씻고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었다.

그렇게 머리도 덜 말린 채로 푹신한 침대에 들어오니

아까 자신이 한 행동이 떠올랐다.

"......"

메티스는 아직까지도 그 까끌까끌한 턱수염의 감촉이 생생해 저도 모르게 입술 주위를 매만졌다.

'주피터는 잘 들어갔을까?'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메티스. 아직 자?"

"으응... 나비?"

"구미호가 폭죽놀이 보러 가재. 못 보면 아쉬워 할 것 같아서..."

"폭죽놀이? 금방 나갈게. 잠깐만."

"응. 천천히 나와."



추운 밤공기에 대비해 스웨터 위에 털옷을 걸치고 나오니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구미호와 나비가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 늦은 건 아니지?"

"괜찮다는 것이다. 바로 이 앞에서 볼 거라는 것이다."

"이 앞?"

"응. 폭죽은 해변에서 터뜨리는데... 거긴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하긴. 둘 다 사람 많은 곳 싫어하지.'

"그럼 얼른 나가자."


나비와 메티스는 앞장서는 구미호를 따라서 밤길을 걸었다.

낮과 다르게 밤의 공기는 꽤나 쌀쌀해서

메티스와 나비의 뺨은 금방 빨개졌다.

"나비. 안 추워?"

"조금 춥네."

나비는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훌쩍거렸다.

"따뜻하게 입고 오지. 손 이리 줘 봐."

메티스는 영문도 모르고 내민 나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때. 좀 따뜻해?"

"응... 고마워, 메티스."

둘이 뒤에서 밍기적거리자

신이 나서 앞서나가던 구미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는 것이다."

"미안. 나비가 조금 추워 보여서."

"추워? 나비. 지금 춥냐는 것이다."

"조금... 그래도 괜찮아."

빨개진 나비의 얼굴을 본 구미호는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혀주었다.

"추우면 빨리 말하지 그랬냐는 것이다."

"구미호는... 안 추워?"

"이 정도는 끄떡도 없다는 것이다."

"고마워."


다시 신나게 걸어가는 구미호를 따라가니

얼마 가지 않아 임시 테이블과 의자를 펼치고 있는 악마와 주피터가 보였다.

메티스는 악마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주피터와 시선이 마주치니

갑자기 부끄러워져 눈을 돌리고 팔을 내렸다.

"폭죽놀이는 언제 시작하냐는 것이다."

"앞으로 15분 있다가 시작할 거야. 배는 안 고파?"

"아직 괜찮다는 것이다. 대신 맛있는 걸 대령하지 않으면..."

"폭죽놀이 끝날 때 맞춰서 가져다달라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큼지막한 가방에서 머그컵을 다섯 개 꺼내 올렸다.

"추우니까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

"커피라면 사양이라는 것이다. 춥지도 않고."

"커피는 아니고 코코아야. 아까 머큐리가 밤에는 추울 거라면서 가져다줬어."

"코코아?"

'...구미호는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메티스의 걱정과 다르게 구미호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잡고는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코코아를 마셨다.

메티스도 그 모습을 보며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다가 반대편에 앉은 주피터와 눈이 마주쳤다.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그의 입을 쳐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컵을 내려둔 그녀는 폭죽은 언제쯤 터질까 생각했다.

다른 넷도 메티스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별이 반짝거리는, 구름 한 점 없는 깜깜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폭죽놀이가 시작되었다.






"무슨 폭죽놀이가 30분 내내 하냐는 것이다."

"그래도 썩 보기는 좋더군."

메티스는 그 두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나비 얘는 또 잠들었네. 아까도 자더니?"

"나비 어제 조금 힘들었거든. 그래서 좀 피곤한가봐."

"어제? 왜?"

"그 얘기는... 이따가 해줄게."

악마는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쯤이면 와야 되는데... 아, 저기 온다."

악마가 고개돌린 곳을 쳐다보니

오토바이를 탄 오디세우스가 보였다.

"배달 도착했습니다. 맛있게 드시길. 뒷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치킨과 콜라, 맥주. 거기에 접시와 컵 식기를 순식간에 세팅한 오디세우스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

"저 차일드. 대단하군."

마음 속으로 동의한 메티스는 자고있는 나비를 흔들어 깨웠다.

"나비. 이거 먹고 들어가서 자든지 해. 배 안 고파?"

잠이 깨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나비의 손을 잡아 일으킨 메티스는

나비의 접시에 다리를 하나 집어 올려주었다.

"나비 술 안 마시지?"

"응. 메티스는?"

"나도. 맥주는 아마 저 셋이 먹을 거야."

이미 한손에는 맥주잔을 들고 한 손에는 닭다리를 잡고 뜯고 있는 구미호의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나비도 어색하게 그 모습을 따라해보았다.

"나비... 그런 건 따라하지 마."

"어? 응..."

나비는 머쓱하게 팔을 움츠리고는 얌전히 치킨을 먹었다.




"흐... 잘 먹었다는 것이다. 악마. 나는 산책 좀 하다가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마음대로 해. 너무 늦게 들어가진 말고."

구미호는 휘적휘적 손을 흔들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비. 나비. 들어가서 자. ...나비?"

"나비 아까 맥주 먹어보고 싶다고 한 잔 마시더니 뻗어버렸어."

"끙... 이런 데서 자면 감기 걸릴텐데."

악마는 메티스를 흘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나비의 옆에 서서 말했다.

"나는 얘 데려다주고 숙소 들어가 있을테니까 둘도 너무 늦기 전에 들어가. 어떤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제서야 둘만 남게 되리라는 걸 알아챈 메티스는

다시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비를 업는 걸 도와준 주피터는 악마가 떠나가는 걸 보고나서

메티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메티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까는 잘 들어갔어?"

그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주피터는 할 말을 정했는지 표정을 굳히고선 대답했다.
"자네가 배웅을 열렬히 해 준 덕분에."

"주피터."

"말하게."

"술 취했어?"

"...그런 듯 하군."

피식 웃은 메티스는 천천히 주피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주인 말대로 위험하니까 딱 한 시간만 걷다가 들어가자."

주피터는 말 없이 그녀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해가 떠있을 때 걷던 해변과

달이 떠있을 때 걷는 해변은 분위기가 달랐다.

차분히 가라앉은 바다와 은은히 비치는 달빛을 보며 잠시 감상에 빠진 메티스의 옆모습을 구경 하던 주피터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모래사장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푸아악!"

"뭐, 뭐야? 주피터, 괜찮아?"

"괜찮네. 모래사장이라 다행이야."

"어두워서 위험하니까 조심히 걸어."

위험한 건 어두운 밤길보다 자신의 우수어린 눈빛이라는 걸 모르는 메티스는

작은 손을 내밀어 주피터를 일으켜세웠다.

"꺄악!"

하지만 체형차이 때문인지 이번에는 주피터를 일으켜세우던 메티스가 넘어졌고

주피터도 휘청하며 그녀의 위로 쓰러졌다.

"......"

"......"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뜨거운 그의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심장은 겉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콩닥거렸고

갈 곳 잃은 손은 저도 모르게 모래를 움켜쥐었다.

착각인지 현실인지, 그의 얼굴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착각이 아닌 걸 안 것은, 쓴 보리의 향기가 입 안에 퍼진 후였다.



잠시 후 주피터는 입술을 떨어트리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일어서려는 주피터의 목을 감고 끌어당기자,

다시 보리향이 입 안에 흘러들어왔다.

처음보다 조금 더 길었던 두 번째 입맞춤.

조금 부끄러워진 메티스는 눈을 감은 상태로 주피터를 살짝 밀쳐내고 옆으로 굴렀다.

"가,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놀랐잖아."

"아까 준 선물의 답례라고 생각하게."

"피. 답례 같은 소리 하네."

주피터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엎드려있는 메티스의 옆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이 참 예쁘지?"

"그렇군. 그 좁아터진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못 볼 광경이라 생각하니 조금 아쉬워질 정도로."

"주피터는 주인네 집이 싫어?"

차분한 눈빛으로 물어오는 메티스를 보며

주피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다네."

"응... 그렇구나."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한 메티스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밤바다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진 주피터는 예고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그 곳 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좁은 집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 곳은 메티스, 자네가 있을 곳이니까."

"......"

메티스는 잠시 주피터의 말을 곱씹더니

말 없이 주피터의 곁에 앉아 그의 팔에 기댔다.

"주피터."

"말 하게."

"당신이 주인의 차일드라서 다행이야."

그 말을 하며 눈을 살며시 감는 메티스.

주피터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아주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지?"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

"다음에 올 때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군."




"나비, 나 왔어."

"메티스."

나비는 어느새인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쿠션을 안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구미호는? 아직 안 왔어?"

"지금 샤워중이야."

그제서야 부엌의 탁자 위에 온갖 음식이 잔뜩 쌓여있는 걸 발견한 메티스는 외투를 벗고 나비의 옆에 앉았다.

"아까 주인이 잘 데려다줬어?"

"응. 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런데 나비 술 엄청 약하다. 한 잔 마시고 그렇게..."

뻗어? 하고 물으려는데, 이상하게 나비의 얼굴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나비. 아까 술 마시고 누운 거 아니었어?"

메티스의 질문에 나비는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나, 나비 너 혹시..."

어떤 생각에 닿은 메티스는 경악한 얼굴로 나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쿠션에 얼굴을 푹 묻었다.

"넌너ㅓ너ㅓㄴ너너너너 알고 그런 거야??"

"메티스! 왔냐는 것이다. 어라? 메티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갛냐는 것이다."

"모, 몰라!"

메티스는 욕실로 호다닥 도망치듯이 들어갔고,

거실에는 구미호와 나비만이 남았다.

나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본 구미호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씩 웃더니

한 손으로 캔맥주를 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메티스도 참 눈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부러 자리 비켜준 줄도 모르고."

"응... 악마도 아는데."

"그보다 나비. 오늘 볼 영화 골라달라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무서운 걸로!"

"응. 이따가 메티스 씻고 나오면 같이 보자."

그렇게, 아모스 섬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