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은 1880년 1월 11일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암행어사로서 그는 국왕에게 밀명을 받게 되는데, 국왕으로부터 받은 봉해진 서신을 열어보니 ‘일본을 염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너는 일본의 선박을 빌려 타고 건너가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들어 낱낱이 탐지해서 조용히 보고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를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때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된 사람은 모두 12명이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출발하여 민정을 시찰하면서 3월 하순 경에 동래에 집결하였다


1880년대 동래



1880년대 부산


그리고 서신에서 지시한 대로 4월 10일 안네이마루(安寧丸)라고 하는 일본 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신사유람단에 뽑힌 사람들이 부여받은 관직은 동래부 암행어사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행은 일본에 도착해서도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숙소에 묵지 않고 자기 돈을 내고 여관에 묵었다.


1880년대 일본 여관



이들은 사적으로 일본을 둘러보고 오는 형식을 취했고, 이러한 이유로 당시 조선의 공문서에는 이들의 활동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나가사키 - 아카마세키- 오사카 - 고베 - 요코하마의 경로를 거쳐 4월 28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1880년대 나가사키




1880년대 오사카




1880년대 고베





1880년대 요코하마




도쿄

 



이후 이들은 약 74일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관서를 시찰하였다. 당시 일본의 조선 주재 공사가 일시 귀국하여 일행과 동행하였으며 외무성 대서기관인과 원로원 서기관이 접대를 하는 등 일본 측은 이들의 시찰에 적극 협조하였다.


이들이 시찰한 시설로는 각종 공장과 조선소, 조폐소, 우체국, 군부대와 경찰, 감옥 등 그리고 각종 학교와 도서관을 둘러보았고 여러가지 제도를 살펴보고 기록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맡은 바 조사 결과를 담은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기록들은 고종이 직접 열람하였으며 이후 이를 바탕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다 한다.



당시 일본의 각종 풍경들


주택가



상점



식료품점



기념행사



번화



방직공장



우체국



인쇄소



경찰서



조선소



철제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