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 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기회(期會)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 부분인 것 같음. 이두의 뜻은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말함. 'ㄱ의 발음은 君(임금 군)의 첫 소리와 같다' 라고 가르치는 방식임.


 조선 초기에는 이런 방식으로 한자를 가르쳐왔다고 하는 부분인 듯.


 이 글에서 최만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찾기 위해서 퍼온 본문 마지막 문단으로 가봤는데 간단하게 풀어보니까,


 '언문을 시행하면 똑똑한 놈들은 오로지 한글만 보고 한자는 공부 안 해서 한자 공부 한 놈이랑 안 한 놈 따로국밥이 될 거고, 한글만 보고 공부한 놈들을 관리로 뽑으면 나중에 과거보는 놈들이 한글만 공부할게 뻔해서 관리수준이나 국민 수준은 하향평준하 될 거다.'


 라고 말한 것 같음.


 그러니까 최만리의 상소는 상소가 아니라 예언서이고 이 예언은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맞아 떨어짐.


 그런데 난 이 문단을 읽으면 '야비하고 상스러운 글자'라는 부분에서 진짜 정신이 아찔해지는게, 한 나라의 왕이 직접 만든 글자를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식하다고 비난을 넘어선 쌍욕에 가까운 비난을 해대는데, 정말 이러한 비난을 상소에 썼는가에 대해서 궁금해서 알아봤음.


(밑줄 친 부분)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진짜로 저렇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


 저렇게 써놓고도 9명 정도는 그냥 의금부에 이틀? 갔다 오는 걸로 형벌이 끝났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최만리와 다르게 형량이 무겁게 나온 사람은 정창손과 김문이 있는데, 정창손은 '삼강행실 뿌려도 효녀열녀 집안 안 나오는 건 어차피 모든 것은 사람하기 나름에 달렸는데 언문으로 만들어서 뿌린다고 한들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한다' 는 말을 해서 그렇다고 하고, 김문은 언문 제작 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안 하겠다고 해서 둘은 최만리보다 더한 처벌(정창손: 파직/김문: 국문)을 받은 거임.


 그러니까 세종은 학문에 대한 비난과 쌍욕은 관대했어도, 직무유기나 자기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막말은 못 참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footnote_view6 (한문으로 쓰여진 것은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