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 피에르




십자군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혈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전쟁으로, 한 번의 전쟁이 아닌 2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레반트 지역을 두고 일어난 여러 전쟁과 사건들을 싸잡아서 묶어놓은 개념에 가깝다.  

레반트 지역은 당시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성지일 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권과 중동, 북아프리카, 아시아 문명이 충돌하는 요충지이기에 레반트 지역은 매우 가치가 컸다.

말하자면 이 레반트의 지배권을 가진 문명이 종교적 성지와 아시아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레반트 지역은 이슬람 문명권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슬람 문명은 꾸준히 레반트를 넘어 유럽으로 넘어오려 시도했으며, 유럽 기독교 문명은 이를 저지함과 동시에 레반트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슬람 문명권이 우위였기에 이슬람 문명은 주기적으로 유럽을 침공하여 유럽인들을 노예로 사로잡고 약탈하였다.

특히 노예무역은 악명높아 1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막 독립하여 만만한 미국인을 납치하여 노예로 파는 일이 빈번하여 미국 역사상 첫 레이드인 1801년~1805년까지 벌어진 1차 바르바리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바르바리 해적들과 교전하는 미군)


어쨌든 요약하자면 레반트 지역은 매우 가치가 높으나, 이슬람 문명의 우세로 오히려 샌드 니거들이 유럽에 레이드뛰러 오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하고 이슬람 이교도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유럽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고, 이 마음에 불을 지핀 인물이 바로 은자 피에르다.

(은자 피에르와 그를 따르는 십자군을 묘사한 그림)

기베르 드 노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체격은 삐쩍 말라서 앙상했고, 늘 맨발이었으며, 양모로 만든 수도복과 두건이 달린 망토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이교도와의 싸움에 도움을 청한 동로마의 요청을 받아들여,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고 하며(기베르 드 노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1년 후인 1096년 은자 피에르는 프랑스 베리를 비롯한 유럽 곳곳을 순외하며 이교도를 타도하고 성지를 탈환하자고 호소하였고, 그의 강렬한 호소는 유럽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우르바노 2세의 석상)


은자 피에르의 카리스마와 열변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빈민들과 농부들로부터 귀족과 영주들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같이 십자군 원정을 외치기 시작했으며, 흉악한 범죄자들도 그의 말을 듣고 나면 금세 감화되었다고 한다. 피에르는 자신이 하느님이 내려준 편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내용은 모든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투르크인들과 맞서 싸우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마귀 들린 이들과 병에 걸린 이들을 고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그렇게 그를 지지하는 추종자는 꾸준히 모여 그 수가 수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민중 십자군이라 칭하며 성지로의 원정을 위해 로마 제국의 수도, 노바로마(콘스탄티노플, 오늘날 이스탄불)에서 집결하기로 하였다.


1차 선발대는 귀족, 고티에 생자부아가 이끌었고, 나머지 무리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근데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은자 피에르는 귀족과 빈민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근데 귀족하고 빈민 중 상식적으로 누가 더 많을까?


그렇다, 민중 십자군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기사나 귀족들도 있었지만, 절대다수는 신앙과 찬송을 무기로 삼은 거렁뱅이들이었고 재대로된 무기도 없어서 농기구나 몽둥이나 들고 있고, 심지어 싸울수조차 없는 아녀자와 노인들도 많았다.

괜히 이들이 민중 십자군이 아니다. 기반 없는 민중들이 종교적 신념에 충동적으로 모여 결성된 군대이기에 민중 십자군이지, 결코 재대로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중앙집권화가 되어있지 않아, 무기를 비롯한 군장과 식량, 그 외 생필품을 직접 조달해야 했는데, 이 거렁뱅이들이 그런 것들을 조달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없었다.

결국 민중 십자군은 말이 십자군이지 때지어 몰려다니는 거렁뱅이 무리에 불과했고, 이들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도둑질과 약탈을 일삼으며 유럽을 작살내놓기 시작하였다.

특히 피해가 큰 계층은 유대인으로,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았으며, 재산도 어느정도 있었기에 이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온갖 민패를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은 로마도 약탈하고 패악질을 일삼았지만 로마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들을 환대했고, 은자 피에르는 그의 호의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민중 십자군은 당대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제국이었던 동로마, 특히 그들의 수도 노바로마의 화려한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들이 와준건 고마운데, 좆또 쓸모없는 새끼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규율도, 기술도, 물자도 없는 이 새끼들이 이교도들과의 전투에서 학살당할 것은 뻔했지만 이들은 쓸대없이 사기는 높았다.

황제는 이들에게 십자군 본대가 도착할 것을 권하며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지만 이 병신들은 거절했고 이미 온갖 패악질을 일삼으며 여기까지 온 새끼들이니 또 패악질을 벌일 것은 뻔한 일, 결국 황제는 이들을 뜻대로 서아시아로 보내버린다.  

자, 이제부터 귀찮으니 킹갓위키의 설명을 복붙하기로 하겠다.

더 자세히 알 고 싶은 사람은 나무위키 은자 피에르, 민중 십자군 문서를 보도록 하자. 


한편 룸 술탄국의 17살의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이 이들 민중 십자군에 대해서 들은 것은 1096년 7월 즈음이었다. 그간 서유럽인 순례자들이 룸 술탄국을 거쳐 성지에 간 일이 하루이틀은 아니었지만 정보에 따르면 그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으며 젊은 20대 여자들과 노인들도 수천 명이나 섞여 있다는 보고였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사람들을 보내 민중 십자군을 감시하게 했고 니케아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8월에 들어서 점차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은자 피에르란 이름도 보고가 되었고 이들이 무슬림을 멸망시키기 위해 왔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또한 알렉시우스 황제가 보낸 해군과 용병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룸 술탄국은 놀랐다. 하지만 십자군의 노략 행위는 룸 술탄국 전체를 둘러볼 때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룸 술탄국은 민중 십자군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룸 술탄국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들은 니코메디아 지역의 기독교도 주민들을 죽이고 노략을 자행했다. 이들은 시비토트 지역의 동로마의 옛 군사 기지들을 점거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동로마의 해상 보급도 가능했고 주변이 비옥한 지역이라 약탈로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독일과 프랑스 출신 민중 십자군들의 행보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마침내 프랑스 출신 민중 십자군들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들은 니케아 자체에 공성전을 벌어진 않았지만 니케아 주변을 약탈했다. 민중 십자군들이 아이들을 꼬치에 꿰어 불에 굽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등의 소식을 접한 킬리지 아르슬란은 경악하여 기마병을 보냈지만 민중 십자군들에게 격퇴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신하들을 본 술탄은 흥분하여 보복하려 했지만 막료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니케아를 공격한 프랑스 민중 십자군들은 약탈한 재물을 동로마 장사치들에게 팔아 짭짤한 수입을 얻었고 이에 눈이 뒤집힌 이탈리아 출신 레이날드가 지휘하는 6천 명의 독일 민중 십자군들이 2주 후에 제리고르돈 요새를 점령하고 그 인근을 노략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킬리치 아르슬란은 9월 29일 재빨리 병졸들을 이끌고 제리고르돈으로 달려갔다. 투르크 병사들은 요새로 가는 수원을 끊었고 십자군들은 목마름에 미쳐 죽어갔다. 소변도 먹었지만 사치스러운 음료였다. 결국 민중 십자군들은 투르크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무참하게 섬멸되었다. 대부분의 민중 십자군은 개종을 거부하고 장렬히 죽어갔지만 애초에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레이날드는 항복하고 개종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레이날드가 개종은 물론이고 민중 십자군 동료들에 맞서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자 매우 놀랐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와 중앙 아시아로 보내졌다.

한편 투르크 척후꾼들은 시비토트의 은자 피에르와 프랑스 민중 십자군들에게 레이날드가 제리고르돈과 니케아를 점령하고 막대한 약탈품을 얻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십자군들은 매우 흥분했고 당장이라도 니케아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데 제리고르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이 제리고르돈의 최후를 알렸다. 십자군들은 크게 놀랐지만 곧 순교자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다시 흥분했고 2만 명의 십자군들이 니케아로 가기 시작했다. 10월 21일에 이들은 매복해있던 킬리치 아르슬란의 투르크군과 조우하여 처참하게 박살났다. 노예로 팔 수 있는 젊은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자 성노예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살육되었다. 2천 ~ 3천의 생존자들이 근처의 성으로 탈출하여 농성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동로마 해군을 두려워하여 무리하여 이 성을 공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들은 살 수 있었다. 한 유력한 십자군 인사가 콘스탄티노플로 달려가 구원군을 요청했고 알렉시우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해주었다. 투르크군은 동로마의 등장에 돌아갔다. 은자 피에르는 이 살아남은 극소수 생존자들 속에 있었단 기록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마침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는 기록이 공존한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수만 명의 민중 십자군을 섬멸하고 얻은 막대한 재물에 의기양양하여 니케아로 철수했다. 


이렇게 신앙심에 불타는 어린 양들은 죄다 주님의 곁으로 갔고, 민중 십자군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체, 십자군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말하자면 프롤로그랄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상한 아저씨 말보다는 공권력의 말을 듣자는 거다.

공무원들은 그래도 가려서 뽑은 사람들이라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아는 것도 많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황제의 말대로 조금만 더 기다려 1차 십자군에 합류했더라면 분명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니라.

1차 십자군은 십자군 원정 사상 최고의 성과를 내었음으로 이들은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일텐데 참 안타깝기 그지 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눈부신 활약을 묘사한 그림으로 본문을 마치겠다.


(유대인들을 산체로 불태우는 민중십자군)


난 어느 국가의 민주당인지 밝히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