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게시판

충무공을 모신 사당과 충무공의 후손인 충민공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충무공이 노량에서 전사한 후에 조선에서 충무공에 대한 대접은 어땠을까?


그래서 시작하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충무공 사후 이야기"다. 오직 노량에서 충무공이 전사한 뒤의 이야기만 다룰거고,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자료는 사용하지 않을 생각임. 그냥 재미로만 봐주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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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전사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선조 31년 11월 24일 을사 5번째 기사에서다.


정원이 아뢰기를,

"방금 군문 도감 낭청이 군문의 배첩(排帖)을 가지고 문틈으로 와서 말하기를 '군문이 즉시 본부를 내려 유 제독(劉提督)과 동 제독(董提督)은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부산으로 모이게 하고 진 도독(陳都督)도 또한 부산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李舜臣)은 전사하였으니 그 대임을 즉시 차출하여야 한다. 명령을 듣고 가야 하니 어떤 사람으로 차출할 것인지에 대하여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성명을 기록해 가지고와서 고하라.'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어 할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승지는 배첩(排帖)을 가지고 나아가 치사(致謝)하라. 통제사는 즉시 비변사로 하여금 천거해서 차출케 하라. 모든 일을 정원이 살펴서 시행하라."

하였다.


여기서는 별 내용이 없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선조 31년 11월 25일 병오 9번째 기사에서 진린(陳璘)이 충무공의 후임을 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진 도독(陳都督)의 계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19일 인시(寅時)부터 사시(巳時)까지 부산·사천(泗川) 등지의 적선(賊船)과 노량도(露梁島)에서 대대적으로 싸울 때 모든 장수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은 귀방에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니 굳이 번거롭게 덧붙여 말할 것이 없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운명하였습니다. 본관의 충성은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통제사의 직책은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순신(李純信)으로 승보(陞補)하는 것이 귀방의 전형(銓衡)에 부합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유념하여 조속히 결단하여 자나깨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여기서 통제사 이순신은 우리가 아는 그 충무공이고, 아래에 나오는 이순신은 무의공으로 알려진 분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해석해보면 삼도수군통제사가 전사했으니 그 후임으로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싸운 무의공 이순신에게 승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조선의 법률에 맞는지 모르겠으니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는 뜻이다. 이에 선조가 회신하기를 충청 병사로 있던 이시언을 임명해 보내기로 했으니 원하는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선조 31년 11월 26일 정미 3번째 기사에서 선조가 명에서 파견된 형개를 방문한다. 이 사람 직책이 엄청 복잡한데, 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 겸 리양향경략어왜 겸 병부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라고 한다. 내가 해석이 가능한 것만 따지면 흠차 총독이라는 것은 황제의 명을 친히 받고 온 최고 지방관이라는 것이고, 병부상서는 국방부 장관, 도찰원 우부도어사는 감찰기관의 수장급 직위다. 명 품계상 조선 국왕인 선조보단 아래지만, 막강한 권한이 있는 자리임. 그러니 선조가 신경을 쓴 것도 당연하다.


미시(未時)에 상이 형 군문(邢軍門)의 관사에 나아갔다. 상이 말하기를,

"3로의 왜적이 일시에 도망갔고 진 대인(陳大人)이 해상에서 대첩(大捷)하였으니 황은(皇恩)이 망극하고 또한 여러 대인의 공로입니다. 몸에 병이 있어서 즉시 찾아와 치하하지 못하여 황공합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황제의 은혜가 망극하고 또 어제는 절일(節日)이었으니, 배하(拜賀)를 청합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수고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자 군문도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군문이 말하기를,

"왜적이 이미 도망쳤으니 국왕은 기쁩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부산의 왜적도 이미 진채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기쁨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2백 척은 모두 이미 바다를 건너갔고 남은 왜적이 조금 있다고 합니다. 만약 오래 머물러 있을 계획이라면 어찌 진채를 불태웠겠습니까. 제가 이미 3로의 장수에게 분부하여 일시에 군사를 집합시켜 섬멸하게 하였습니다. 귀방의 수군 총병(水軍摠兵)은 누구입니까? 속히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신임 총병은 이시언(李時言)입니다. 지금 전라도 지방에 있는데 즉시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이시언은 쓸 만한 사람입니까? 또 수로(水路)를 환히 알고 있습니까? 이순신은 마음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다가 끝내 전사하였으니, 저는 너무도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국왕께서도 사람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소서. 또 그 아들을 기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순신과 같은 사람은 얻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더욱 애통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소방이 7년 동안 난리를 겪어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므로, 소방의 힘으로는 실로 왜적을 섬멸하기 어려운데, 대인의 성산(成算)으로 흉적이 도망치거나 혹은 참획(斬獲)되어 동방의 한 지역이 재생(再生)의 목숨을 잇게 되었으니, 대인의 덕을 갚을 길없고 황은이 망극합니다. 또 등 총병(鄧摠兵)은 소방의 일로 만리나 되는 험난한 길을 와서 해상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운명하였으니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시언은 소방에서 훌륭한 장수로 일컫고 있습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이는 황제의 위엄이고 국왕의 복입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등 장군의 일은 저도 슬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영(李寧)과 노득공(노得功)도 모두 운명하였으니 참으로 슬픕니다. 금번의 전투에서 많은 왜적의 목을 베었고 중로(中路)의 왜장(倭將) 36명도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하고, 군문이 또 말하기를,

"진 총병(陳摠兵)은 용맹한 장수입니다. 또 수전(水戰)을 잘하여 노량(露梁)의 전투에서 심안도(沈安道)의 목을 베었으며, 유 총병(劉摠兵)도 또한 비란도(飛闌道)의 목을 베었고 또 왜인의 편지 20축(軸)을 빼앗았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대인들이 소방의 일에 모두 마음을 다하였지만 진 대인(陳大人)이 가장 힘써 싸운 것은 전일 불곡(不穀)이 대인께 고하였습니다. 현재 해상의 승리는 진 대인의 공이고 또한 대인께서 장수를 잘 기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한산도(閑山島)도 이미 수복(收復)되었으며 전라도 지방에는 왜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황제의 위엄이 미치는 곳마다 차례로 평정될 것입니다. 다만 왜적은 교활하기 짝이 없으니 남아있는 적들이 남해(南海)·거제(巨濟) 등 육지 가까운 지역으로 들어가 점거할까봐 매우 걱정됩니다. 만약 이 기회를 틈타 수륙(水陸)으로 진격하여 단번에 무찌른다면 거의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사기(事機)를 잃지 마십시오."

하였다. 군문이 이어 패문(牌文)의 초고(草稿)를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4로(路)의 장수들에게 분부한 글인데 발송한 지 이미 3일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편선(片船)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인데 어찌 사기를 그르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 패문을 보건대 대인의 성산(成算)에 더욱 탄복하겠습니다."

하고, 상이 이어 승지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금번 중로(中路)의 군대가 왜적과 화친을 약속하고 잔꾀를 써서 적을 물러가게 한 것이다. 지금 이 패문을 보니 이는 대인이 스스로 해명하려는 계책이다."

하였다. 상이 예단(禮單)을 증정하니 군문이 받지 않았다. 다시 청하자 그제서야 받았다.


여기서 명의 고위직으로 파견된 형개는 이순신의 제사를 지낼 정도로 이순신을 고평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조에게도 이순신의 제사를 지내라고 권하지만 선조는 이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간다.


이 기사를 보고 선조는 배알도 없냐고 깔 수도 있는데, 명이 구원군을 보내준데다 조선이 명에게 개기기 어려운 입장임을 고려하면 선조가 명의 고위직 앞에서 명 군대에게 공을 돌리고 명을 칭찬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나쁘지 않은 처세라고 볼 수도 있음. 물론 배알도 없다고 봐도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라 그걸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리고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 기사에서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을 정리해 보고한다. 여기에 사관이 논평을 붙이는데, 이 논평이 매우 직설적이다.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 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記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하니, 진린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린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쓴 것이라고 할 정도로 사관의 논평이 직설적이다. 실록에 실린 사관의 논평은 실록을 편찬할 때 실린 것이긴 해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종종 편향된 관점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한국 역사,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깊이 배운 사람에게 이만큼 공감가는 평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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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너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1편은 여기서 끝.


다음 편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니 2편도 관심 가져줘.


그리고 사람 성씨에 들어가는 그 노라는 한자가 왜 금지어냐? 노득공의 노가 그 노인데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오다 금지어 걸려서 한글로만 표기했다. 그 부분은 양해바람.


수정. 제목이 너무 길어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