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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https://arca.live/b/dogdrip/21498011


저번 시간에 충무공 사후에 이덕형이 치계하고, 사관 논평이 있었던 부분까지 봤음.


계속 이어서 보자.


아, 선조는 이순신이 처음 실록에 언급된 녹둔도 전투 때만 해도 녹둔도는 원래 위험한 곳인데 거기서 둔전을 했으니 약간 불리한 전투가 있었다고 패전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합리적이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전쟁 스트레스로 미쳐간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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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에 대해 선조가 굉장히 가혹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충무공이 죽은 뒤에는 그래도 꽤 빨리 태도가 바뀐다.


벌써 11월 30일이 되면 대접을 전교함. 선조 31년 11월 30일 신해 6번째 기사임.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순신에게 증직(曾職)하고 치부(致賻)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우라. 또 그의 아들이 몇 명인가? 상(喪)이 끝난 뒤에 모두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옳다. 해상(海上)에도 사우(祠宇)를 세워야 하니 이 한 조항은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그 밖에 전사(戰死)한 장수들에게도 모두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혹 증직할 만한 자에게는 증직하되 차례대로 거행하라."


증직이라는 건 죽은 뒤에 벼슬과 품계를 추증하는 일이고 치부라는 건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대해 직접 부의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우라는 건 사당인데, 이 경우에는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주기적으로 제사를 거행하는 사당이다. 대표적인 사당은 서원 소개글에 있는 통영 충렬사가 있음.


그리고 조선에서는 충절을 다하고 죽은 인물에 대해서는 자손 대대로 벼슬을 내리고, 인사 기록에 이 사람은 충신/공신 XX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표시해서 인사고과를 따질 때도 특별 우대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이순신이라는 충신에 대해서 그 아들은 모두 이순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채를 하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 우대(가산점)보다 훨씬 우대함. 그냥 특채니까.


선조 31년 11월 30일 신해 7번째 기사를 보자. 바로 예조에서 보고를 올림.


예조가 아뢰기를,

"형 군문(邢軍門)이 이순신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여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냈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게 하려고 하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순신의 직품은 정1품이었으니 자연 법전(法典)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합니까, 아니면 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또 등 총병(鄧摠兵)이 한 곳에서 같이 죽었으니 또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시체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아직까지 확실히 알지 못하니 우선 상구(喪柩)가 서울로 올라온 뒤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아래에서 마음대로 결정하기 곤란하기에 아울러 재가를 여쭙니다."

하니, 예조가 알아서 하라고 전교하였다.


형 군문은 지난 연재글에 나온 형개라는 인물임. 그리고 여기서 예조가 알아서 하라는 걸 방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예조는 인사 업무부터 이런 의전, 외교,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전부 담당하는 관장부서다. 그러니까 너희가 잘 보고 처리하라는 이야기일 수 있음. 왕이 여기서 이래라저래라 하다가 삼사에 꼬투리잡히면 또 즈어어언하 하니까. 나는 일단 전문가에게 넘긴 거라고 봄


그리고 이후로 계속 이순신의 장례, 대접 관련한 논의가 이어진다. 선조 31년 12월 1일 임자 5번째 기사임.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지난날 한산도에서 승첩을 거두어 큰 공을 세웠고, 주사가 패몰된 뒤에는 잔파된 나머지를 수습하여 기계와 군량을 전날과 다름없이 준비하였습니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의 괴수를 불에 태워 죽이고 전함 2백여 척을 포획하기까지 하여 의기를 동남지역에 크게 떨치자 적추는 혼비백산하여 밤에 도망쳤으니, 국가를 회복시킨 공에 있어서 이 사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지만 숨을 거두면서도 조용히 처치하였으니 옛날 명장의 풍도를 지녔다고 이를 만 하였습니다. 이제 성교를 받들어 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자식들도 모두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충의를 격려함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해변에 사당을 세우는 일은 좌수영 본진에 설립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전사한 장사들에게 휼전(恤典)을 내리는 일도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는 이 당시에 전쟁 수행을 위해 국무와 전쟁 사무를 총괄하고 있는 최고 기관이었다. 그 기관에서 이순신의 사당을 세워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게 하라고 요청하고, 선조도 이를 받아들인다.


이후 이순신이 언급된 글은 진린이 이순신의 후임을 빨리 보내라고 요청하는 기사, 이순신이 수군을 수습하긴 했지만 지금 개판이라 왜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하는 기사, 노량해전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한 기사다.


그리고 다시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 5번째 기사에서 이덕형이 이순신에게 포장(칭찬하여 장려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이덕형이 직접 내려가서 보고한 내용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이순신을 잘 모를 때는 원균 보고서가 계속 들어오니 머리는 좋아도 인성이나 용맹함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직접 내려와보니 아니더라.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하니 나라에서 포상을 내려 본받게 해야 한다."

이러니 선조가 비변사에 계하하는데, 이 말은 승인을 해서 비변사에 나는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논의해봐라. 하는 소리다.


같은 날 이덕형이 통제사를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하는데, 이순신 사후에 진린과 무의공이 장병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고 있으니 빨리 제대로 된 통제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선조 31년 12월 11일 임술 7번째 기사에 장례 이야기가 나온다.


예조가 아뢰기를,

"아무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등 총병(鄧摠兵)의 치제관(致祭官)은 이미 차출하였으니 곧 내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이순신(李舜臣)의 상구(喪柩)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牙山)의 장지(葬地)에 도착할 예정으로, 등 총병의 상구와 한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치제하는 차례에 있어 서로 구애되지 않을 듯 하므로 본조의 낭청을 먼저 보냈습니다. 이축(李軸)을 오늘 내일 사이에 재촉해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 장수를 먼저 제사하고 다음에 우리나라 장수를 제사하는 것이 예의상 옳을 것이다. 상구가 한 곳에 있다 하여 선후의 절차를 따지고, 각기 다른 곳에 있다 하여 중국인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를 것이라고 여겨 우리나라 장수를 먼저 제사하려고 하는 것은 도리상 온당치 못한 듯 싶다. 등 총병에 대한 치제관을 속히 먼저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축은 사람 이름이다. 관리로 있던 사람임.


하여간 이 내용을 보고 또 선조가 나쁜 사람이 될까봐 덧붙이면, 이 글에서 선조는 악의로 저러는 게 확실히 아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고, 중국의 관리는 조선의 관리보다 비슷한 품계면 항상 더 높게 쳐주었다. 그러니까 더 높은 신분이라는 의미임. 그런데 신분상 더 높은 중국 관리를 먼저 제사하지 않고 우리 맘대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제사하다 걸리면 곱게는 안 끝나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 벌써부터 예조도 서로 다른 곳에 있으니까 순서 상관없을듯요? 라고 물어본 거니까.


그리고 해가 넘어가 선조 32년 1월 6일 정해 1번째 기사에서 다시 이순신이 언급된다.


상이 용산(龍山)에 있는 조 지현(趙知縣)의 관소에 갔다.

상이 이르기를,

"세배가 늦어 미안하오이다."

하니, 지현이 말하기를,

"멀리 임어하시어 감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양곡의 방출을 맡아 우리나라가 많은 덕을 입었습니다. 다만 공억(供億)과 같은 작은 일에도 뜻에 맞게 못하였으니 부끄럽소이다."

하니, 지현이 말하기를,

"무슨 덕될 것이 있겠습니까. 비축한 양곡이 떨어지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갑자기 조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미리 조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승지 남이신(南以信)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대인이 만약 양곡의 수량에 대해 묻는다면 호조판서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인이 양곡이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이신이 아뢰기를,

"판서가 새로이 임명되어 자세히 모를 듯 싶습니다. 아마 떨어진 것은 대미(大米)일 것입니다. 당소미(唐小米)는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지현이 자리에서 소첩(小帖) 한 장을 써서 상에게 올렸다. 내용에,

"제가 양곡의 방출을 절약하여 각 장관들로부터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저(當宁)에게 정청(呈請)하여 의주(義州)에 있는 관량(管糧)을 조달하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제가 돌아갈 때 사용할 말과 인부를 미리 정돈시켜 주십시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대인이 이곳에서 양곡을 맡아주시어 많은 혜택을 입었는데, 지금 서쪽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서운하외다. 대인이 돌아가시면 누가 대신 맡게 되오?"

하니, 지현이 말하기를,

"아무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남들의 원망만 샀으니 돌아가려고 합니다. 진 경력(陳經歷)이 저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이곳의 창관(倉官) 남근(南瑾) 등과 통관(通官) 현사백(玄士白)에게 상을 내려 노고에 보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상이 명한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때 한 사람이 지현의 곁에 서 있다가 지현을 통하여 소지(小紙) 한 장을 올렸는데, 그는 바로 황응양(黃應陽)의 매자(妹子)라는 자였다. 그 소지의 내용은 대개 '황응양은 양 경리의 문하관(門下官)으로 동쪽 일에 노고가 많았으나 양공이 탄핵을 받자 응양에게까지 누가 미쳐 요양분수도(遼陽分守道) 장야(張爺)가 옥에 가두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구씨(舅氏)의 노고를 생각하여 당저 노야(當宁老爺)에게 부탁해 하루빨리 풀려나도록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하는 것이었다. 지현이 그 사람의 뜻을 전하여 고하기를,

"분수도가 별달리 조정의 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경리의 일로 황응양까지 가두었다 하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이오.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겠소이다."

하고, 이어 작별하고 나와 입성하였다. 이어 좌 유격(左遊擊)의 관소로 가서 술 두어 순배를 들고 나왔다. 이어 이부총(李副總)의 관소로 갔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을 물리친 것은 곧 황은이며 대인의 공 또한 많았습니다."

하니, 부총이 말하기를,

"이는 국왕의 큰 복이십니다. 제가 지난해 울산(蔚山)의 싸움에서 눈비를 무릅쓰고 싸웠고 금년에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러한 사정을 유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이까.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다만 대인의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소이다."

하자, 부총은 두서너 번 거듭 자신의 공을 자랑하였다. 상이 더욱 공손히 치사하니, 부총이 말하기를,

"제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청사(靑史)에 '삼협장(三俠將) 이방춘(李芳春)은 양장(良將)이었다.'라고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만족합니다. 음식을 먹은지 오래되면 배가 고프고 물건이 오래되면 못 쓰게 되지만 선명(善名)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저절로 공론(公論)이 있게 마련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인의 말씀이 지극하오. 대인의 공에 대해 과인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감격할 뿐이외다."

하였다. 부총이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은 충신입니다. 이러한 자가 십여 명만 있다면 왜적에 대해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배신 권희(權憘)는 저를 따라다니며 노고가 많았습니다. 그의 말이 길에서 죽었으므로 제가 왜마(倭馬)를 사도록 하였더니, 희가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비록 도보로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짓은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은 황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중조(中朝) 관원의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통관(通官)도 3년이나 저를 따라다니며 노고가 매우 많았으니 특별히 포상하여 주십시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부총이 말하기를,

"맨 먼저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평양(平壤)에서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두 번째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도산(島山)에서 곤궁에 빠뜨렸으며, 세 번째 심안도(沈安道)를 해중(海中)에서 무찌르자, 이 왜적들이 천병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10년 동안은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음 편히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 왜적을 물리친 여흥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가 천은(天恩)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작별하고 나왔다.


이 기사에서 선조는 새해를 맞아 명에서 온 사람들을 방문해 새해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명 장수들 중에도 이순신을 고평가 하는 사람이 있어 특별히 가져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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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까지.


나름 조선의 정부 관료와 명에서 파병된 관리들은 이순신을 높게 평가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조도 이 고평가에 대해 굳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거나 하진 않음.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을 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