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 2년(484) 위로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동성왕)를 크게 격파하였다.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당대에 북위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84년, 488년, 490년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 장수왕의 침입으로 왕이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원의 맹주였던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북위의 백제 침공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당시 백제와 북위는 전투가 펼쳐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육상으로는 고구려가, 해상으로는 황해가 있었다. 따라서 북위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북위와 백제 간에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북위가 만약 백제를 공격하려고 육로를 선택했다면, 고구려북위의 군대가 자국 땅을 지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다. 육로로 통해서 고구려를 지난다면 북위군평양성 인근을 지나간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다수의 병력수도 인근지나가게 해줬다는 기록한국은 물론 중국사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북위가 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 백제와 교전을 펼쳤는가? 라는 의문점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다만 북위의 병력상당히 강력했고 백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성왕남제에 보낸 표문에 기록된 백제군 지휘부들의 면면에서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 등 백제의 대성팔족의 일원들이 참여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들 귀족이 직접 참가해서 군대를 지휘했다고 본다면 백제도 상당한 정예병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북위의 침공 루트에 대해서는 가장 유력한 학설은 해로 공격설이다.
 490년 전투동성왕남조에 직접 보낸 표찰에서 목간나의 공적 부분가장 큰 근거로 꼽힌다.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인데, 는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고, 는 성문 혹은 누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공격자인 북위군에게 성문이나 누각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면 臺舫은 각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단어누선(樓船, 대규모 병사의 수송이 가능한 군사용 선박)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 침공의 원인이 고구려의 음모였는지, 아니면 백제의 요서상업기지와의 갈등이 심화되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조의 동맹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 공격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