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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의 프로필을 소개하자면

메이지 시절의 계몽가, 근대 사상가, 게이오대학 창립자, 언론인. 그리고 1만엔 지폐의 인물

참고로 게이오대학에서는 '센세는 후쿠자와 유키치 센세 한명 뿐이다.'란 이유로 교수들에게도 원칙적으로 '군'이라고 부름.



1. 일신독립해야 일국독립한다.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유민권론의 시초라고 불리게 된 이유-


2. 국가를 위해서라면 재산을 잃는 것분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다. 이것이 보국의 대의이다.

-1번과 같은 글에서 나오는 내용-


3. 국내에서 민권을 주장하는 것은 외국에 대해 국권을 펼치기 위함이다.

-1, 2번 내용에서 몇년 지나지 않아서 한 말


3. 사람이 태어날 때는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다만 학문에 힘써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귀인과 부자가 되며, 배우지 못한 사람은 빈자와 비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학문의 권유'에서


4. 교육을 장려하여 부의 원천을 얻는다는 것은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것

-나중에 본인이 한 말-

 

5. 농사꾼과 수레꾼에게 학문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기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은 삼나무 묘목을 심어놓고 돛대를 구하는 것과 같다.

-참고로 이 사람은 '학문의 권유'에서 의무교육론을 주장함. 나중에는 3학년까지는 의무교육론을 주장하다 그나마 나중에는 공장 다니는 아동에게는 교육시키지 말자고 또 입장을 바꿈 


6.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가난하지만 지식이 있는 자

-1889년에 관립대학을 폐지하고 빈곤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자며 한 주장


7. 메이지 정부는 이전과 다름없는 전제 정부, 인민은 여전히 무기력한 우민일 뿐

-'학문의 권유'에서


8. 메이지 유신은 인민이 자유의 취지를 갈망하여 폭압정부를 무너뜨리고 전권을 얻은 것 (중략) 지금의 정부는 인민에 의해 성립된 것.

-7번 글을 쓰고 1년 후에 본인이 쓴 글


9. 유신의 공신이 전권을 장악하고 국사를 독차지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일, 국회 개설운동을 전개하는 무리 중에는 비정상적인 광인과 어리석은 이들이 많다.

-8번을 쓰고 몇 년 후에 본인이 쓴 글


10. 천황제는 대상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이 귀한 것

-'문명론의 개략'에서


11. 천황제는 우민을 농락하는 요사스러운 술법

-후쿠자와 유키치의 천황제 인식, 근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들에게 천황제가 필요하다.'란 결론


12. 무릇 일본국에 태어나 자란 신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세일계의 제실을 받들고 그 은덕을 우러러보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말년에 게이오기주쿠의 '수신요령'의 서문 앞부분에 추가한 내용


13. 일본의 황실은 만세일계, 황위의 왕성함은 한르과 땅과 함께 무궁하다. (중략), 4천만 신민은 모두 황실의 적자이며, 일본 전국의 부는 황실의 재산일 뿐이다. 

-1901년 죽기 직전 쓴 천황제에 대한 글


14. 이 몸은 갑신정변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급진개화파의 관계가 깊었음을 증언해주는 자료는 많고, 갑신정변의 무기 조달을 맡은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도검과 폭약을 입수했다고 증언


15. 조선 한성에 주둔 중인 청나라 병사를 몰살시키고 (중략) 바다와 육지로 대거 청에 진입하여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갑신정변 때 군사개입론을 주장하며, 참고로 당시 일본 정부의 외교 정책 주류는 '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 보장'이었음.


16. 아시아 동방의 보호는 우리의 책임이다.

-'시사소언'에서


17. 혹여 사정이 긴박할 때는 거리낌없이 그 영토를 탈취해 우리 손으로 새 판을 짜는 것도 가능하다.

-16번과 같은 글에서


18.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가 어떤지 논할 때는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이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

-결국 이 기사 썼다가 자기네 신문사가 일본 정부에게 발행정지 맞음.


19. 바로 청의 국경을 넘어 들어가 (중략) 고집을 부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단지 만주 3성뿐만 아니라 청 400여 주는 결국 만청 정부의 소유가 아님을 각오해야할 것이다.

-청일전쟁 개전 초기 했던 말 


19. 마침내 북경성으로 쳐들어가 (중략) 그들의 황제를 포로로 잡고 군문에 항복하게 하는 것 외엔 없다.

-청일전쟁 중


20. 일본이 청에 요구해야할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 (중략) 일본인은 청일전쟁 후 고조된 청나라인 멸시를 삼가야한다.

-1898년에 쓴 글, 참고로 청일전쟁 때 가장 격렬하게 청나라 멸시 단어를 써가면서 거품 문게 후쿠자와 유키치의 언론사



후쿠옹의 말을 후쿠옹으로 반박할 수 있는 수준. 

당대에도 '거짓말은 후쿠자와, 허풍은 유키치'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말바꾸기가 예사라고 평가받았던 사람. 

근데 한편으로는 일관적으로 '문명개화론'에 경도되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제국주의자로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파악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기도 한 사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