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가을 때였지, 중간고사 끝난 뒤였을거야. 저녁에 불어오는 가을바람 덕에 꽤 쌀쌀한 때였어.

시험 끝나고 난 뒤 첫시간에 국어 선생님께서 수행평가에 대해 공지하셨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맞춤법이 틀린 간판이나 현수막 등을 찾아서 사진을 찍은 뒤 맞춤법을 고쳐 보고서를 만드는 거였어.

아래 사진들은 수행평가 기준과 보고서의 양식이야.

나는 보통 시험을 2주 전부터 준비한단 말이지? 기말고사까지는 한 달도 넘게 남아있어서 1주일 정도를 노는데 허비했지.

내가 사는 곳은 인구 30만정도 되는 지방 중소도시야. 그래서 꽤 가까운 거리에 시장이 세곳이나 몰려있었지.


그때의 나는 더 찾으면 준다는 추가점수를 받을 생각도 없어서 8개만 찾자는 생각이었고, 맞춤법 틀린 8개 찾는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반의 다른 녀석들이 찾은 것과 겹치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는 급해졌지, 그렇게 제출 2주 전부터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잘 보이지 않는거야. 거의 주말 내내 찾아 해맸었는데 발견한건 서너개 정도였어. 겹치지 않는다고 해도 할당량의 절반정도였지.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려는 길에 같은반 여자애를 만났어. 그 애 손에는 검은 비닐이 들려있었지. 얼굴이 그리 예쁘지는 않은데 자꾸 눈이가고, 좋아하지는 않는데 관심이 가는 그런 애 있잖아. 그런 느낌이었어.


아무튼 그 애는 친구랑 같이 찾아본다고 했는데, 흩어져서 찾아보기로 했는데, 서로 엇갈려 버린 때 하필 그 친구 배터리가 떨어져 찾고 있다면서 나한테 봤냐고 물어보더라.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걔도 그 상황이 불편했던지 손에 들려있던 비닐봉지에서 꿀떡을 꺼내더니, 내게 먹을거냐고 묻더라고, 사실 꿀떡을 좋아하긴 하는데 뭔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라 거절했지. 그런데도 입에 들이밀더라고, 맛있더라. 말 그대로 꿀맛이었어.(꿀이 아니라 설탕과 깨가 들어가긴 하지만)


해 질 녘이었는데 세상이 아름다워보이더라.


젠장 이렇게 쓰고보니 편의점에서 계산하던 예쁜 알바랑 손 한번 닿았다고 손자 이름까지 짓는 찐따같네.


그 다음주에는 시장을 도는 것 보다는 안 가본 시내에서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시내로 갔지. 다행히도 시내에는 맞춤법 틀린 간판이 조금 더 잘 보이더라고. 그래서 안전빵으로 12개인가 13개를 찾았지.


만점은 반별로 제일 많이 찾은 2명씩에게만 돌아가서 받지 못했지만, 80점은 받았던 것 같아.


내가 찐따에 학교에서는 소심한 성격이라 그 뒤에도 걔랑 학교 축제같은걸로 엮이긴 했는데도 아쉽게도 진전이 없었어.


초등학생 때 벌칙게임의 벌칙으로 고백을 해온 여자애에게 속아 혼자만 사귀는 줄 알았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여자 대하는게 쉽지 않더라고.


여기까지 길고 재미없는 썰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