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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순신에 대한 대접 연재는 이걸로 끝날거야.

순조, 고종, 순종 때만 남았기 때문에 오늘 이 글이 마지막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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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시기, 이순신에 관련된 기사는 순조 1년 3월 2일 무인 2번째 기사로 시작한다.


하교하기를,

"금년은 현황제(顯皇帝)께서 붕어(崩御)하신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다. 이제독(李提督)의 사우(祠宇)인 선무사(宣武祠)에 장신(將臣)을 보내어 유제(侑祭)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독의 봉사손(奉祀孫) 이효승(李孝承)에게 부총관(副摠管)을 제수하고, 충무공(忠武公)의 봉사손도 또한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고, 기성(箕城)의 무열사(武烈祠)의 석상서(石尙書) 등 여러 사람들을 제사하는 곳에 일체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현황제는 명 신종 만력제를 말하고, 이제독은 이여송, 석상서는 석성을 말한다. 충무공은 당연히 이순신. 이 기사는 명 신종 만력제가 조선에 원병을 파견해준 것을 기리는 의미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공이 큰 이여송, 석성 등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여송과 이순신의 후손을 특채하라는 지시다.


다음으로 졸기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글인데, 누군가가 죽었을 때 사관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쓴 글이다. 순조 3년 1월 1일 정묘 3번째 기사다.


행 호군 이한풍(李漢豐)이 졸(卒)하였다. 이한풍은 덕수(德水)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이다. 지위가 원융(元戎)에 이르렀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법(法)을 받들었으며, 한사(寒士)와 같이 옷차림이 소연(蕭然)하고 수신(帥臣)들 가운데 가장 조수(操守)가 있었다고 한다.


이한풍이라는 사람의 졸기다. 그런데 이 졸기는 좀 이상하다. 이한풍은 호군(護軍)인데, 호군은 정4품이다. 조선 전기에는 실직으로, 대궐내에 설치된 호군청(護軍廳)에서 직숙(直宿)하며, 궁성 4대문 밖의 직숙과 광화문의 수호책임 및 도성 내외의 순관(巡官)을 맡은 직책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산직이 된 관직이다.


※ 실직 : 직사(職事)가 있는 문신·무신의 종9품 이상의 관직. 일명 현직(現職)·정직(正職)·현관(顯官)·실관(實官) 또는 유품관(流品官)이라고도 함. 여기서 직사는 직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 산직 : 고려·조선시대에 직사(職事)가 없었던 관직.


그런데 정3품 이상인 당상관도 아니고, 당하관, 그것도 산직에 있는 사람에게 졸기를 써주는 건 이상한 일이다. 왜 써준 건지 모르겠다.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해서 써줬다기에는 이순신 후손이 한둘도 아니고...


다음 기사는 통영에 대한 기사다. 순조 8년 1월 10일 정미 2번째 기사를 보자.


전 통제사 이당(李溏)을 소견하고, 통영(統營)의 폐단에 대해 순문하였다. 이어서 군총(軍摠)이 어떠한가에 대해 하문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1만여 명 되는데, 절제(節制)가 육군에 견주어 훨씬 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수조(水操) 때 홍령기(紅令旗)는 곧 황조(皇朝)에서 이순신(李舜臣)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있는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선(戰船)은 몇 척인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크고 작은 배가 5백 60여 척 되는데, 급수(汲水)하는 작은 배가 절반이 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신이 어느 지역에서 왜군(倭軍)을 진압하였는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한산도(閑山島)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이 어떠한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한산도는 해문(海門)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으로, 전면에서 보면 바다에 통하는 길이 있는 듯하지만, 그 가운데에 들어가면 사면이 모두 막혀 있습니다. 그 당시 왜군은 산을 뚫고 나가려고 하기에 이르렀으나, 곧 암석(巖石)이 노출되어 다시 뚫지 못하고 마침내 이곳에서 함몰(陷沒)되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거북선이 있는가, 없는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있습니다. 그 모양이 거북같이 생겼는데,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 없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이 마치 거북이 떠 있는 것 같으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므로 지금도 표류(漂流)해 온 왜인(倭人)이 이를 보면 서로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을 사로잡는 기계이다.’라고 한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사적(事蹟)이 무슨 책에 있는가?"

하니, 승지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손으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이인수(李仁秀)·이승권(李升權)이 모두 그 자손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수조, 그러니까 수군 훈련용으로 쓰는 붉은 깃발은 명에서 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통영에 흰 옷을 입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이 이순신으로 인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엄청난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순조 32년 2월 6일 계미 2번째 기사로 넘어간다.


하교하기를,

"올해를 당하여 명(明)나라의 재조(再造)해 준 은혜를 생각하매 하늘과 같이 높고 땅같이 두터운데, 보답할 길이 없으니 비풍(匪風)·하천(下泉)의 감회를 어디에 의뢰하겠는가? 선무사(宣武祠)와 정동 관군사(征東官軍祠)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侑]하게 하고 평양의 무열사(武烈祠)에도 일체로 치제[致侑]하되 헌관(獻官)은 도백(道伯)으로 하도록 하라. 본국(本國)의 국난에 목숨을 바쳐 공훈을 세운 여러 신하들의 충성과 노고에 대해서는 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달천(撻川)의 전쟁터에는 예조 당상의 말로 인하여 이미 치제[致侑]할 것을 명하였지만, 그 중에 더욱 우뚝하게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또한 마음속으로 느낀 거조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충렬공 고경명(高敬命)·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순절(殉節)한 곳에는 함께 국난에 목숨을 바친 장사들과 더불어 단(壇)을 설치해 치제(致祭)하도록 하되, 제관은 본도(本道)의 수령 가운데에서 직질이 높은 자를 가려서 차출하도록 하라. 두 충렬공의 집과 문열공의 집에는 지금 녹사(菉仕)하는 사람이 없으니, 봉사손(奉祀孫)을 해조(該曹)에서 이름을 물어 수용하도록 하라.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문충공 유성룡(柳成龍)·충장공(忠壯公) 권율(權慄)의 가묘(家廟)에는 승지를 보내 사제[賜侑]하게 하되, 사판(祠版)이 시골에 있는 자는 도내의 수령으로서 일찍이 승지를 겪은 사람을 가려 제관에 차출하도록 하라. 아! 전후 8년 동안의 난리에 충절(忠節)을 다해 몸을 바친 사람의 그 수효를 어찌 한정하겠는가마는, 예(禮)란 번잡하게 되면 도리어 잗달게 되는 것이니, 지금에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 중에서 가장 드러난 자를 들어서 행하였는데, 옛일을 추억하는 감회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 실은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 어찌 누구는 치제하고 누구는 치제하지 않았다 하여 간격이 있겠는가? 해방(該房)에서는 자세히 알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이미 제사를 지내도록 했지만 충렬공 송상현, 문열공 조헌, 충렬공 고경명, 충무공 이순신이 순절한 곳에는 특별히 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 기사가 순조의 행장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니 특별히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종 시기에는 건의 상소에 이순신이 언급되고(고종 19년 5월 4일 기축 1번째 기사), 서원 철폐령 당시에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이 훼철되지 않은 것을 통해 기본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취급을 알 수 있다. 또, 영의정 심순택과 만난 자리에서 다시 이순신 언급이 나온다. 고종 28년 12월 24일 갑인 1번째 기사를 보자.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관리를 두고 직책을 분담한 것은 곧 그 법을 맡아 가지고 그 법을 법으로 삼아서 백성이 잘못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에서 도적이 갈수록 더욱 성하여 도성 안에서 대낮에 물건을 약탈하며 기전(畿甸) 안에서는 큰길이 막히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하고, 전하는 소문이 놀랍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법이란 나라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법이 믿을 수 없다면 누가 경외(敬畏)하려고 하겠습니까? 지금의 백성도 옛날의 백성인 것만큼 모두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자기 몸과 생명을 아끼는 것도 그때 사람들과 같은데, 단지 법이 있어도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뿐입니다. 근래에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서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함부로 마구 행동하므로 마을이나 상점에서는 대개 그들의 얼굴을 알고 그들의 소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만일 그들의 자취를 따라서 진심으로 염탐하고 살핀다면 어찌 잡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을마다 남의 일 보듯하고 매사에 두려워하면서 아직 한 명의 도적도 잡지 못하고, 한 가지 법도 적용하지 못하여 그들이 점점 불어나도록 맡겨두어 이렇게 소란을 피우게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조령(朝令)이 시행되지 않으며 나라의 기틀이 더욱 해이되게 되어 극히 개탄할 일이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재 백성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니 우선 거듭 신칙한다는 내용으로 다시 팔도(八道)와 오도(五都)에 엄히 신칙하여 관하(管下) 각읍(各邑)과 각진(各鎭)을 단속하고 나서 각별히 계책을 세워 빠른 시일 간에 도적을 없애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즉시 소탕하지 않아 날마다 소란을 일으켰으니 수령이 있고 법과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옛날 순조(純祖) 임진년(1832)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선무사(宣武祠), 정동 관군사(征東官軍祠), 평양 무열사(平壤武烈祠)에 제사를 지냈고,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절개를 지켜 숨진 곳에 제단을 만들고 그들과 같이 희생된 장사(將士)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으며, 두 충렬공(忠烈公)과 문열공(文烈公)의 집안의 봉사손(奉祀孫)을 수용(收用)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은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내렸으며, 고(故)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 고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圽), 고 목사(牧使) 이종장(李宗張)은 전쟁 터인 충주(忠州) 달천(㺚川)에 같이 희생된 장사들과 함께 제사를 내렸고, 고 종사관(從事官) 박호(朴箎)·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는 절개를 지켜 숨진 곳인 상주(尙州) 증연(甑淵)에 모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내렸습니다. 오래도록 잊지 않는 뜻과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훌륭한 덕에 대해 참으로 흠모하여 마지 않는데 내년은 바로 옛날의 그 해입니다.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이어받는 뜻에 있어서 마땅히 은덕을 갚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모두 순조(純祖) 때에 시행한 전례대로 내년 봄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순조 임진년(1832)에는 전교(傳敎)를 내려 제사를 지내주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인 동묘(東廟), 남묘(南廟)와 안동(安東), 성주(星州), 남원(南原), 당진(唐津)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나누어 보내 예를 행하였다. 내년에는 북묘(北廟)와 평양(平壤)에도 예를 행할 것이니 모두 8개소가 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옛날 순조 때에 처음으로 관례를 세워 옛날 그해에 느끼는 바가 있어 예를 행하였는데, 이것은 사체(事體)가 특이한 만큼 신은 감히 아울러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을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세밑을 당하여 녹봉과 요미를 나누어 주지 못하였으니 매우 걱정이 되고 염려스럽다. 방금 두 달 분을 대내(大內)에서 획하(劃下)하였는데 정월 이후에는 계속 새로 받아들일 것이므로 아마 그전처럼 군색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녹봉과 요미를 나누어 주는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이렇게 대내에서 획하였으니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더욱 흠모하는 마음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음이 풀려서 배가 행하여 새로 받은 조세(租稅)를 수송하여 군색한 일이 없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근년에 받는 조세의 실지 수량과 탁지부(度支部)의 재정사정을 보면 또 녹봉과 요미를 주는 것만이 아니니, 지출이 수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므로 이것이 걱정됩니다."

하였다.


이순신을 비롯한 다른 충신에 대한 제사를 매년 봄마다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건의에 고종이 허락해준다.


그리고 순종 시기에도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한다. 순종 2년 1월 7일 양력 3번째 기사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신하의 곧은 절개와 뛰어난 충성심에 대하여 늘 크게 감동하고 있었는데, 행차가 이 곳을 지나면서 사당을 보게 되었다. 고(故)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의 사판(祠版)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 네 정승들은 그 당시에 지조를 굳게 지켰으며, 그 덕에 사직이 안정되었다. 행차가 여기를 지나면서 사당을 바라보니 충직한 의리를 생각하게 되며 슬픈 생각이 더욱 절절하다. 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여섯 신하〔死六臣〕의 뛰어난 충성과 절개는 위아래로 천년 동안 대비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행차가 그들의 무덤을 지나게 되니 더욱 감회가 크다. 고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아! 우리 선조 임금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에 충성을 다하여 큰 공훈을 세웠으니 천년이 지나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행차가 호서(湖西)를 지나면서 큰 나무를 바라보니 깊은 감회를 금할 수 없다. 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무덤에 지방 관리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유학을 추세우고 큰 의리를 확고하게 지키며 효종(孝宗)과 잘 맞았으니 백대에 이르도록 감동하게 된다. 호서 지방을 지나게 되니 그가 남긴 기풍을 찾아볼 수 있다. 선정(先正)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기미를 밝혀서 강경하게 상소를 올리고 어려운 때를 당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높은 충성심과 굳센 절개는 오늘까지도 역역하다. 호서 지방을 지나가니 슬픈 감흥이 이니 선정인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무덤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학문이 순수하여 한 시대의 스승이 되었으니 선대 임금이 예의로 대우한 것을 생각하면 그 감흥을 어떻게 비유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고장을 지나면서 그의 사당을 가리키게 되니 선정인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도덕이 순수하고 연원이 정확하여 백대가 지나도 영원히 사람들이 흠모하게 되었다. 호서 땅을 지나가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선정인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과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수많은 사람에 대한 제사 와중에도 이순신의 이름이 빠지지 않으니 나라가 망할 지경에도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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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이순신 이야기는 끝났어.

워낙 이순신은 민간, 지방관리 등등이 비석도 세우고, 사당도 세우고 했기 때문에 실록 외에도 찾아볼 수 있지.


느그나라를 헬조선이라고 하는데, 국가유공자를 대접하는 것에서 조선보다 느그나라가 취급이 더 안 좋다는 것만은 알아주면 좋겠다.